북·미·중 3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가 31일 베이징에서 만나 '가까운 시기'에 6자회담을 재개하기로 전격 합의하면서 북한의 회담 복귀 배경과 회담 전망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가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9월부터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자금이 동결되면서부터 금융제재를 풀지 않으면 6자회담에 나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1년여 동안 고수했었다.
지난 10월 9일 핵실험을 한 후에는 평양을 방문한 중국 탕자쉬안 국무위원에게 '6자회담에 복귀할테니 곧바로 금융제재를 풀라'고 한걸음 물러서긴 했지만 금융제재와 회담을 연계시키는 기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이날 베이징에서 회담 재개 사실을 발표하면서 북한이 6자회담에 아무런 전제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밝혀 북한이 사실상 '무조건적으로' 회담에 돌아오는 것임을 시사했다. 탕 위원의 방북 때보다 한걸음 더 물러난 것이다.
중국 '당근과 채찍' 전략 주효한 듯
이같은 태도변화의 배경에는 우선 북한을 '어르고 달랜' 중국의 중재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 압도적인 분석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중국은 지난달 18일 북한에 탕자쉬안 특사를 파견해 추가 핵실험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는 '추가 핵실험은 없다' '금융제재 해제 약속 있으면 6자회담 나간다' 등 탕 특사에 대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말만 주로 흘러 나왔었다. 하지만 실제 그 만남에서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경고 메시지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중국 동북지역 일부 은행들의 대북 계좌 동결과 북중 국경 일부 지역에서의 철조망 설치 같은 간접적인 압박 전술도 주효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지도부가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할 경우 대북 원유 공급을 중단하는 것을 검토했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도 북한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을 법한 메가톤급 소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탕 위원은 또 그같은 경고와는 별도로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안보리 제재 움직임에 적극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 금융제재 문제에 관해 북한과 미국의 중재역을 하겠다는 것 등의 약속을 하는 '당근'도 제시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탕자쉬안 특사의 '중재 외교'를 통해 금융제재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그가 미국에 가서 금융제재를 풀어주면 북한이 회담에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탕 특사는 평양 방문에 앞서 미국과 러시아를 순방하며 북한 핵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평양과 워싱턴에 갈 수 있는 나라가 중국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국, 러시아, 북한에 갔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중국 입장에서도 갈등만 고조될 경우 언젠가는 북한과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미리 막고자 적극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6자회담 존폐에 관한 위기감도 한 몫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과 압박에 대한 위기감도 회담 복귀의 주된 요인으로 분석된다.
유엔 대북 제재위원회에는 오는 15일을 기한으로 192개 유엔 회원국들의 대북 제재 참여 방안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에도 70여개 국가들이 참석하고 있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대한 한국의 참여를 압박하고 있고, 한국 정부 역시 내용적으로는 전면 참여를 예고하고 있다.
또한 30-31일 미국이 주도하는 핵테러방지구상이 본격 논의되는 것도 압박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구상'에는 북한에게 우호적이었던 러시아와 중국도 이미 참여하기 되어 있다.
이같은 국제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북한은 일단 6자회담에 전격 나가겠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한껏 고조된 긴장을 일단 이완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기획실장은 "한국과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되면서 북한으로서는 이를 완화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이 최근 '6자회담 재개해도 안보리 제재는 계속된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6자회담이라는 마지막 대화틀마저 없어질 위기를 감지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지난 25일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더라도 "북한이 비핵화에 진전을 이룰 때까지"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의 1718호는 유지키로 동북아순방에서 합의했다고 밝혔었다.
김근식 교수는 "제재의 칼날이 더 강해지는 상황에서 6자회담도 '날아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고, 이를 미국이 의도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일단 북한이 '고개를 숙인' 형국이 됐다"고 말했다.
'당당한 핵국가' 요구할 수도
전문가들은 미국의 11월 7일 중간선거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도 북한의 회담 복귀에 영향을 줬다는 해석을 내놨다.
백학순 실장은 "미국 민주당이 하원은 물론 상원까지도 장악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는 상황"이라며 "대화와 협상을 주장해 온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데에 맞춰서 6자회담에 돌아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압력과 대결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미국 대북정책의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당당하게' 6자회담에 나오려 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백 실장은 "북한은 핵국가가 됐으니 협상장에서 입지가 강화됐다는 것도 고려했을 것"이라며 "핵이라는 가장 큰 카드를 갖고 있기 때문에 1대 3(미국, 중국, 한국)의 주고받기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렬 실장 역시 "핵실험을 할 때부터 북한이 조건없이 6자회담에 복귀를 선언할 수 있다고 전망했었다"며 "대북제재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하기보다 핵실험을 통해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장에 나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김근식 교수도 같은 견해를 밝히면서도 "그렇다고 6자회담을 핵군축 회담으로 규정할 것 같지는 않다. 9.19공동성명에는 이미 '핵무기를 포기한다'고 되어 있어 이미 핵군축 협상으로의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북한의 핵실험 이후부터 "핵보유국으로 당당하게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다"고 예견했었다.
회담 전망은 '짙은 안개와 높은 파고'
하지만 6자회담의 전망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금융제재 문제가 여전히 살아 있고, 미국은 법집행 차원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할 게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대북 금융제재에 대한 돌파구(breakthrough)가 있었을 것"이라는 우리 정부 당국자의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6자회담 재개에만 국한된, 예를 들어 미국이 기존의 입장을 바꿔 '6자회담에서 금융제재를 논의한다' 정도의 양보만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실제 회담에 들어가거나 회담 틀 내에서 북미 양자접촉이 이뤄지더라도 불법계좌와 합법계좌를 규정하는 문제나 궁극적으로 금융제재를 해소하는 문제 등에서는 북미가 지루한 공방을 계속할 것이라는 게 압도적인 전망이다.
김근식 교수는 "미국이 6자회담에서 금융제재를 논의하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진전이 있으면 회담 자체도 진전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제재는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회담이 교착되면 6자회담도 결국 시간끌기로 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또 "안보리 결의안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를 어느 정도 완비한 미국 입장에서는 일단 회담에 나갔다가 별게 아니라고 판단하면 제재로 가면 된다"며 "미국은 어떤 경우라도 손해볼 일이 없다"고 말했다.
조성렬 실장은 "우리 정부 당국자의 말대로 금융제재에 대한 모종의 언질이 미국에서 나왔을 수도 있지만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며 "미국이 아무 조건 없이 금융제재를 완화한다거나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결국 핵실험에 굴복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요구할 수도 있고 금융제재 해제도 계속 요구할 게 뻔한 상황"이라며 "회담이 재개됐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쉽게 풀릴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학순 실장도 △북한이 핵보유국으로서 핵군축을 대가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 할 것이라는 점 △금융제재는 법집행 차원이라는 미국의 입장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점 △유엔 결의안과 관련해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하는 것이라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제재를 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의 이유로 회담 전망을 어둡게 봤다.
그러나 백 실장은 미국 중간선거 결과가 회담 진전의 희망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당이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실패에 관한 청문회를 계속하고, 예산이라는 칼자루를 휘두르며 정책의 변화를 압박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파란불'…국내 여론 변수
한편 회담 전망이 어둡더라고 회담 재개 합의 자체가 남북관계에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은 우세하다.
한국은 지난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6자회담 복귀의 출구가 보일 때까지'라는 조건을 걸고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했고, 핵실험 이후에는 수해 지원 물자의 북송도 차단했다.
그러나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수해 지원 재개를 시작으로 쌀·비료 지원 재개에 관한 전제조건도 충족된 셈이 됐다.
금강산·개성공단·PSI 등에 대한 국내외의 압박도 완화시킬 가능성이 있을 뿐더러, 통일·외교·국방장관 및 국정원장 등 외교안보라인이 100% 물갈이되는 상황은 6자회담 재개와 맞물려 당국간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게 됐다. 특히 북한이 '기피인물'로 규정했던 이종석 장관의 사퇴도 당국간 대화 분위기 조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6자회담이 재개되는 데에 한국의 역할이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며 앞으로도 이같은 소극적인 태도가 계속될 경우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6자회담 진전에도 별 도움이 없는 외톨이 국가가 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이른바 간첩단 사건 등으로 인해 대북정책이 국내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적극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행보를 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이종석 장관이 우왕좌왕해서 북한의 신뢰를 많이 잃었다"며 "그 과정에서 북한도 남한과의 대화를 회피하고 미국과의 대화를 노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앞으로는 우리 정부가 6자회담을 낙관만 하지 말고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북한의 이번 회담 복귀는 단순 복귀가 아니라 핵실험 후의 복귀라서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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