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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15> 북한의 핵실험을 보고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새를 떠올렸다. 한국의 국조나 다름없는 까치. 책상 서랍을 열어 그 까치의 목각 상을 꺼냈다.

광주 시립 박물관 정원에서, 나는 천문도가 새겨진 바위 옆에 서서 한 무리의 까치를 바라본 적이 있다. 까치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내게는 다정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 중 한 마리를 택해 그 새가 지저귀는 대로 따라해 보았다.

십오 분 쯤 따라해 보고 나서 나는 그 리듬을 터득한 것 같았다. 내가 휘파람을 불자 그 새가 나를 따라했다. 내가 다시 휘파람을 부니 그 새가 또 응답했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한국어라고는 두 마디도 못하는 내가 한국의 국조하고는 이야기를 해냈어!"

아마도 내 착각이었을 게다. 그 새는 나를 비웃으며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서쪽 끝에서 온 저 멍청하고 까치처럼 홀쭉하게 생긴 작자는 뭐야?" 어쩌면 그 새는 내가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평소대로 지저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한국 새한테 말을 거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 라말라 서재에서 한국 방문의 추억이 담긴 까치 조각상을 서랍에서 꺼내 바라보는 자카리아 모함마드 선생.

어쨌거나 시인이 새하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황당한 발상은 아니다. 시인과 새가 마치 하나처럼 똑같이 생긴 경우가 적어도 한 번은 있었다. 14세기 위대한 여행가 이븐바투타가 아프리카의 말리 왕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왕의 전속 시인들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새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새 가면을 쓰고 왕 앞에서 시를 낭송했다. 시인은 새의 전갈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븐바투타는 중국의 어느 지역까지는 다다랐으나, 많은 학자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한국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시인이 새를 흉내 낸다는 그의 구상을 광주 박물관 정원에서 내가 실연했다.

내게 응답했던 그 까치는 북한 핵 실험 이후 땅 밑에서 울리는 깊은 진동을 들었을까? 그 새는 놀라 떨며 울었을까? 인간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미미한 지진도 새들은 느낄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내가 그 울음소리를 흉내 낸 것이 그 새와 나 사이 대화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까치를 기억한다. 몇 마디도 안 되는 대화였지만, 요한복음이 전하는 대로라면 세상은 단 한 단어, 한 구절 위에 세워졌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광주의 정원에서 나와 그 까치는 바로 그 말씀을 발음했으며 다시 한 번 신을 창조해냈다. 우리의 대화는 신성했다.

나는 하양과 검정으로 색칠된 목각 상을 손에 들고 바라본다. 사랑스러운 긴 꼬리, 멋진 부리와 매력적인 날개! 이 새가 단지 기본적인 두 색깔, 검정과 하양만으로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나는 이것이 한국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혼은 상반된 두 가지를 양쪽 날개로 삼을 수 있으며, 이 두 날개로 날아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검고 하얀 새를 자기들의 상징인 국조처럼 여긴다. 검정과 하양, 남과 북, 좌와 우, 한국의 영혼 안에서는 이들은 적이 아니다. 친구다. 이들은 날아오르기 위한 두 날개일 뿐이다.

나를 쳐다보았던 그 까치의 검은 눈동자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핵 실험의 깊은 진동을 느끼고, 그 새는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핵무기가 왜 있어야 하지? 북쪽과 남쪽은 내 양쪽 날개인데. 한반도는 핵무기가 아니라 날아오를 두 날개가 필요하잖아. 남과 북."
▲ '한반도 상황이 나빠지지 않기를 빌어요. 내 마음은 당신들과 함께 있어요. 초강대국의 힘에 억눌린 이 세상에서 당신들은 마치 고아처럼 외롭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고아이며 우리는 같은 처지예요.....' 자카리아 선생이 한국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문도가 새겨진 바위 옆에 있는 나를 데리러 와서 한국 문인은 내게 물었다. "당신의 별자리는 뭐예요?" "산양좌." 나는 내 출생연도를 말해주었다. "그럼 당신은 우리 식으로는 호랑이띠예요." " 와, 호랑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사냥할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미소 지었으며,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그 까치를 두고 떠났다. 그 새의 긴 꼬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검게 빛났다.

여기 라말라에서 내가 서재에 앉아 글을 쓰노라면, 창가 나뭇가지에서 나이팅게일이 지저귄다. 나이팅게일의 색깔은 새벽빛이다. 이는 검정과 하양의 다른 조합이다. 내가 창문을 열면 나이팅게일은 겁을 먹고 날아가 버린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내 친구 까치도 핵실험의 충격에 굉장히 놀랐겠구나. 나무들의 뿌리도 지하의 은밀한 진동 때문에 움츠러들었겠구나."

그러나 한국의 새는 살아갈 것이다. 까치는 그 충격을 이기고 여전히 지저귈 것이며, 더욱 높이 날아오를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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