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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와 "악붕귀(樂鵬龜)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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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와 "악붕귀(樂鵬龜) 게이트"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7〉사천왕사라는 절 (5ㆍ끝)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부터 당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사비에 1만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옛 백제 땅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로 만들어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신라와 백제의 화친을 강요했다. 그러다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러서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신라를 안동도호부의 관할 하에 두고자 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얻은 이득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의 속방이 될 처지에 놓인 셈이었다. 문무왕이 당에 전쟁 참여의 대가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당은 오히려 신라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 측에서도 당과의 결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라는 우선 옛 백제 영역부터 탈환하는 전략을 택했다. 670년 신라는 당의 웅진도독부 관할 하에 있던 55개 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당군을 몰아내고 옛 백제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시 대당총관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전일에는 충의(忠義)의 인(人)이더니 지금은 역신(逆臣)이 되었다"고 경고했고, 문무왕은 답신에서 예전에 당 태종이 신라 무열왕에게 했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당태종이 했던 약속이란, "짐이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신라가 [백제, 고구려] 양국에 핍박되어 매양 그 침해를 입어 편안할 날이 없음을 애달피 여김이니, 산천토지는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니며, 옥백(玉帛) 자녀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674년 당 고종은 신라가 당에 고하지 않고 "고구려의 반중(叛衆)을 받아들이고 백제 고지(故地)를 점거했다" 하여 문무왕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당시 당에 와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케 하기도 한다. 이에 문무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입공(入貢)하자 다시 문무왕을 신라왕으로 삼고 김인문을 도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신경전이 벌어지면서도 나당 간의 전쟁은 계속되어 당에서 몇 차례 대군을 파견했지만 신라 측의 문두루 비법으로 연속 참패를 당했다. 이런 와중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발생하게 되는데,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 망덕사터 당간지주. ⓒ프레시안

"신미년(671)에 당나라가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문두루] 비법을 썼더니 배들은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이 김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을 불러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새로 천왕사를 짓고 황제의 만년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예부 시랑(禮部 侍郞)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박문준이 당 고종의 물음에 나름대로 둘러댄다고 했던 대답은 전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예부 시랑 악붕귀가 신라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 조정에는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때인데 느닷없이 당나라 사신이 사천왕사를 시찰하러 온다는 것이니, 신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을 터. 더구나 그 사신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외교, 의전을 담당하는 부서의 차관에 해당하는 최고위급 관리인데다, 사신의 예방 목적이 말인즉슨 "당나라 황제의 수(壽)를 축원하기 위해 지었다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시찰하러 오는 것이라지만, 신라 쪽에서 보면 사천왕사란 "당나라 군사들을 몰살시키려는 문두루 비법의 설행처"여서 대외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될 특급 군사기밀을 지닌 곳이 아닌가?

신라 조정으로서는, 도대체 박문준이 당 고종에게 어떻게 둘러댔기에 사천왕사가 "당나라 황제의 수(壽)를 축원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둔갑되었는지 그 경위도 모른 채, 당의 고위 관료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어야 할 판이라 참으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궁리해 낸 계책이 가짜 사천왕사를 짓기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가짜 사천왕사를 급하게 짓느라고 다시 한 바탕 소동을 겪은 뒤 당의 사신이 도착한다. 계속 『삼국유사』를 읽어보자.

"당의 사신이 신라에 와서 청했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신라 조정이 새로 지은 절을 사천왕사라고 하면서 악붕귀에게 보여 주었지만 악붕귀는 속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조차 없었던 가짜 사천왕사는 악붕귀가 '망덕요산의 절'이라고 했던 덕에 '망덕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망덕사가 당나라와 관계가 있는 절이라고 알려지면서, 후대에 당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망덕사 탑이 반응을 보였다는 전설 같지 않은 전설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몇 차례 기록되어 있다.
▲ 망덕사 금당. ⓒ프레시안

아무튼 신라 조정은 애초부터 당의 예부 시랑 악붕귀의 눈을 속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난감하기 짝이 없던 신라 조정은 뇌물로 사건을 무마하기로 결정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금 1000냥으로 악붕귀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악붕귀가 신라의 뇌물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다. 악붕귀라는 인물이 맹탕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다시『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탑상편 '천룡사'조에,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귀가 천룡사에 와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이라는 문헌에서 이미 지적되었던 것으로 "계림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여기에다 속전(俗傳)에 "역수는 이 고을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악붕귀는 이 점을 정확히 짚어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인물을 입막음하려면 신라 조정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해야 했을 터인데, 그 조건이 바로 '금 1000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금액이 어느 정도 큰 금액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 역시 『삼국유사』에 나온다.

"786년 10월 일본왕 문경(文慶)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물리고 금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했다. 신라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내가 듣기로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에 일본에서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 망덕사 동탑 터와 서탑 심초석. ⓒ프레시안

우리는 이 일화에서 '금 1000냥'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 만일 신라 조정이 악붕귀를 구워삶지 못했더라면 "당군 몰살을 위한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는 황제의 수를 비는 곳이라고 속였고, 그 사실을 조사하러 온 당의 관리를 매수하려 했다"면서 당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올 명분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위기일발의 순간에 신라는 '금 1000냥'으로 국운(國運)을 건 베팅을 했던 셈이다.

여기에 후일담이 있다. 신라에 왔다가 뇌물을 먹었던 악붕귀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금 1000냥'의 뇌물이 부차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엿보인다. 악붕귀가 당으로 돌아간 뒤, 박문준이 말을 잘해서 당 고종이 감옥에 갇혀 있던 김인문을 풀어줄 뜻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문무왕은 재빨리 문장가 강수(强首)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당나라에 보냈고, 고종이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문은 그러나 옥에서 풀려나 귀국하던 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고 만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당에서 돌아오다가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역시 '문무왕 법민'조에 전해지고 있다.

악붕귀 사건은 당시 신라 측에서 극비로 덮어버렸던 일이었을 텐데 세월이 흐른 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셈이다. 이렇게 후세의 역사에 의해 우리는 뒤늦게 신라 시대의 초대형 정치 추문 내지는 스캔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탄로가 되었다면 치명적이었을 사건이, 신라가 운이 있었던지 무사히 넘어갔던 아슬아슬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만일 당나라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았더라면 신라의 역사 내지는 동아시아의 역사가 달리 쓰여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닉슨 정권의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대형 정치 비리 내지 스캔들을 게이트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 비록 사후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악붕귀 사건은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악붕귀 게이트"로 부르고도 남을 사건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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