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의 IMF?
북한이 드디어 핵실험이란 칼을 빼들고 나왔다. 다만 아직 핵실험을 단행한 것은 아니고 앞으로 할 것이니 최악의 상황으로 가기 전에 '제발 좀 말려달라'는 메시지를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에 던진 것이다. 여러 보도들도 분석한대로 6주 앞으로 다가온 미국 중간선거에서 핵문제를 쟁점화시키면서 미국에 대해 협상을 압박하려는 조치인 셈이다.
과학적 안전성 범위 내에서 핵실험을 한다는 점, 한반도 비핵화가 궁극적 목표라는 점, 핵무기의 대외 이전을 하지 않겠다는 점,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점 등을 강조한 것은 대북제재로 가기 이전에 협상의 기회를 찾으려는 북한 나름의 안전장치가 된다.
앞으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관련국들의 노력이 활발해질 것이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 출범 이후 제1기 4년, 제2기 1년 반, 도합 5년 반을 거치면서 진행되어 온 '제2차 핵위기'는 거의 막바지로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동안 한국은 김대중 정부 2년, 노무현 정부 3년 반을 경과했다. 추석 연휴가 끝나면 해법을 둘러싼 논의가 모든 지면을 장식할 것이다. 그 전에 5년 반이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닌데 어떻게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차분히 되돌아볼 기회를 갖는 것도 한가한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노무현 정부가 놓이게 된 처지를 '안보의 IMF상황'이라고 평하는 논의가 있다. 이는 일단 노무현 정부의 성과 내지 노력을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좌절'로 보면서 거세지고 있는 비판론에 대해 변호하려는 논리로 여겨진다. (강태호, "변화하는 한미관계와 노무현 독트린의 운명", 창비, 2006년 가을호)
이러한 논법은 노무현 정부가 맞이하게 된 안보현안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시각에서 도입된 것으로 일정한 공감을 얻는 데 효과를 거둘지 모른다. 실제로도 북핵문제가 진행되고 있는 데에다가 이라크 파병문제에 직면했고, 용산기지 이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등 힘겨운 대미협상에 임해야 했던 상황에서 보면 적어도 과제만큼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힘들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안보의 IMF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면, 이 용어는 자칫하면 노무현 정부가 역설적으로 경제 분야의 김영삼 정부와 같은 처지로 간주되는 빌미가 될 소지가 크다.
우선 김영삼 정부는 한국경제를 파탄상태로 몰아넣은 부(負)의 유산이 분명했던 데에 비해, 김대중 정부는 6.15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성과와 그 이후 지속된 남북화해·협력이라는 정(正)의 업적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한 외교안보 분야에서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한계를 넘어서기는커녕 그 성과에 기대어 연명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급기야 북한의 핵실험 발표에 처하게 된 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1차 북핵위기는 바로 김영삼 정부 하에서 발생한 사태라는 점을 뒤돌아볼 때,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도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지 답답한 심정은 필자만 느끼는 바가 아닐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한미FTA 협상을 개시했던 것은 이러한 힘겨운 상황을 일거에 만회해 보려는 그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경향신문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던 "대북관계에서 조성된 한미동맹의 균열에 대해서는 경제밖에 해결방법은 없다"고 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 여부나 그 판단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정황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FTA협상 개시를 위한 4대 선결조건 수용이나 그 이후 협상과정에서 드러난 준비부족, 의사결정과정의 비밀주의, 독단성 등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문제점들은 이 발언과 연관시켜 볼 때 사태의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초점은 북핵문제가 아닌 한미관계였다
그런데 지금 위기로 치달을지 모르는 핵문제의 상황을 지켜 볼 때 가장 아이러니로 느껴지는 사실은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부시 행정부가 가장 먼저 제안했던 이슈는 북핵문제가 아니라 한미동맹 재조정 문제였다는 점이다.
북핵문제는 김대중 정부 이래로 진행형이었고 국민들의 관심도 이에 집중되어 있어 한미관계의 최대 쟁점은 북핵문제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는 있으나, 실은 한미동맹 재조정 문제였던 것이다.
실제 업무 면에서도 노무현 정부에서 설치된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주된 임무는 북핵문제보다는 한미관계에 집중되어 있었고, 용산기지 이전문제가 협상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되고 있었다. 북핵문제는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대한 우려가 일단 외교적 해결방식의 접근으로 타협을 보면서 6자회담 개시로 이어졌다. 이는 북핵문제가 해결까지는 못 가도 최소한 상황악화를 억제하는 현상유지 내지는 관리 차원으로 수렴되었음을 뜻했다.
사실 DJ정부 말기 미국 부시 행정부는 우라늄농축프로그램(HEU)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남북화해·협력 기조를 유보시킬 수 있었다. 나아가 상대적으로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정체상태이던 남북관계 대신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으로 새로운 탄력을 받고 있던 북일수교 교섭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함에 따라 미국 국내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북-미 코뮈니케가 무효화된 데 이어 남북관계나 북일관계의 진전이 차단된 것이다.
그 이후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제2차 북핵위기'의 발생으로 이어지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 페리프로세스 이래 진전되던 상황은 '역코스'를 밟게 된다. 한반도의 냉전 해체 내지는 종식이 임박했던 국면은 다시 냉전의 유지 내지는 악화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동북아시아 정세의 초점은 북한의 대외관계,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북미관계, 북일관계의 개선 여부에 모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이란 구도에서는 그 중심이 대북 정책에서 미일동맹, 한미동맹 재편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이미 대만해협 분쟁을 그 포괄범위에 포함시키는 미일동맹 재조정 작업이 일정에 오르기 전에 그 틈새에서 고이즈미 정부는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전격적인 평양 방문으로 사태 타결에 나섰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전후처리 과제인 북일관계 타개 이후 미일동맹 재편을 마무리하는 것이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직접 당사자가 되기 위한 독자외교의 수순이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냉전해체를 목표로 남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던 김대중 정부 하에서 한미동맹 재조정 문제는 한미협상의 의제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반도 차원에서 보면 남북관계, 북미관계 개선, 즉 한반도 냉전 종식은 미일동맹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한미동맹의 성격을 규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 주도의 협상구도
따라서 부시 행정부의 전략은 남북관계, 북미관계를 묶어두고 한미동맹 재조정작업에 주력한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핵문제가 타결되지 못하고 있는 한, 북미관계의 대치상태 하에서 남북관계 진전은 일정한 선을 넘기 어렵고, 한미동맹 재편 협상에서 주도권은 미국이 쥐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군사위협이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대하는 듯한 상황에서 한국이 대북억지력으로서 주한미군의 존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미동맹 재편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즉 주한미군을 대북억지력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의 신속기동군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은 북핵문제가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어서는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핵문제가 악화되는 것도, 진전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유지되는 편이 미국에게는 유리한 것이며, 이 역할은 6자회담으로 충족되고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대응은 남북관계 개선을 6자회담에 맡겨두고 한미동맹 재편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의도하는 전략구도에 따라 깔아놓은 협상판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했다. 특히 대북 송금 특검 문제를 제기한 것은 김대중 정부 이래 남북관계의 연속성을 끊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차원에서 평화번영정책을 내걸고는 있었으나, 독자적인 남북관계 개선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이는 출범 이래 견지했던 '북핵문제 진전 이후 남북정상회담'이란 원칙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이는 한미관계와 남북관계가 상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협상전략 차원에서는 대북관계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미국의 안보적 요구를 최대한 수용한다는 자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 용산기지 협상은 노태우 정부 당시부터 서울 한복판에 외국군 사령부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주권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의 요구라는 성격이 강했지만, 부시 정부 출범 이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필요라는 성격이 보다 전면에 나선 것이었다.
순서가 뒤바뀐 한미동맹 재편 협상, 일본과 대비돼
그러나 한국의 협상전략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용산기지 이전 문제를 분리 대응하는 것이었고, 더욱이 '선 전략적 유연성-후 기지이전'이 되어야 할 협상순서를 뒤바꾼 것이었다.
미일 간에는 2002년 12월부터 2006년 3월까지 미일동맹 재정의 작업을 통해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원칙은 수용하되 일본 열도 내 주일미군의 이동(유연성)은 미일방위조약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사전협의를 의무화하였다.
또 이 원칙의 합의를 토대로 하여 그 다음 단계로서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역할분담, 주일 미 해공군의 재편 및 기지 이전 협상이 진행된 바 있다. 수년 간에 걸쳐 난항을 겪는 협상에서 합의를 이룬 뒤 미일정상 간의 공동선언으로 합의 내용을 최종 확인한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면, 협상의 전략과 자세에서 한일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조성렬, "주일미군 전략적 유연성은 미국 맘대로 안 됐다" , <프레시안>, 2006년 2월 22일)
한국의 경우 기지 이전이 한국의 요구라는 '허구의 주권문제'를 앞세움으로써 이전비용을 한국 측이 압도적인 비율로 부담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서 심각한 것은 전략적 유연성 협상의 지렛대가 되어야 할 기지이전 협상을 순서까지 바꾸어 기꺼이 신속하게 해소해 주고, 용산기지 이전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철저히 은폐한 사실이다.
이미 기지라는 하드웨어의 변화를 인정한 이상, 주한미군 역할에 대한 재정의라는 소프트웨어의 변화는 자동적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으며, 남는 것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작전범위 확대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단서 조항뿐이었다.
한미동맹은 냉전시대의 전쟁동맹에서 평화동맹으로 확실한 전환을 이루어야 했으며, 한미동맹 재편에서 한국의 지렛대는 남북관계 개선이며,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가능한 한 감소시키는 데에 있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의 '선 남북관계 개선(선 한반도냉전해체)-후 한미동맹 재편'의 구도가 그대로 지켜질 수는 없었다고 해도 최소한 남북관계 개선과 한미동맹 재편의 병행 추진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한미동맹 재편문제를 한미협상 의제로 수용한 이상은 이를 국민에게 알리고 정면 대응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모으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협상과정은 북핵문제로 전전긍긍하는 한국이 미국에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고 보인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군의 주둔을 필요로 하는 한 한국이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요구를 일정 부분이라도 수용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북핵문제 해결이나 한반도 냉전해체를 선행시켜 북한의 안보위협을 감소시킨 이후 한미동맹의 성격 전환을 꾀하는 것이 어렵다면, 가능한 한 협상과정을 늦추면서 한국의 이해를 확보하는 편이 유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상지연은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한미동맹의 균열이 심각하다는 비판을 의식하는 한 어려운 일이었다.
두 가지 핵심의제 협상은 3년이 안 되어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6자회담의 2005년 9.19합의로 북핵문제나 남북관계 개선은 일시적으로 진전되는 기미가 있었으나 결국은 미국의 북한 위폐문제 제기로 답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협상구도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평화로 국면이 타개가 되기 이전에 노무현 정부 임기 내에 한미협상을 밀어붙이겠다는 자세였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도 북핵문제를 빨리 해결하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겠지만, 역설적으로 한미협상에 밀려 대북관계 개선은 뒷전으로 미뤄져 있었던 것이다.
자주라는 명목 하의 미국 이익 수용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가 대응책으로 내놓은 국방정책이 '협력적 자주국방'이며, 이에 따라 '국방개혁 2020'과 '5개년 중기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방안도 수립 이후 대대적인 홍보와는 상반되게 입안과정에서 시민사회의 공론화를 포함한 논의과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한 군사력이 북한에 대해 열세에 있다는 낡은 냉전시대의 남북군사력 비교평가가 변함없이 군사력 확충의 인식 토대가 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2020년까지 681조 원이 투입되고 앞으로 5년간은 161조 원이 투입되는 구도로서 '막대한 군비증강안'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한미국에 의존했던 정보전력을 확충한다는 것이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는 미국의 이해에서 보면 거대한 군수산업 시장이 한국에 조성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등 직접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을 제외하면 바로 한국에서 냉전 이후 세계 최대의 미국 무기시장의 하나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은 "군의 욕심은 차제에 최고 A급, 최고 수준의 장비와 시스템을 갖춘 군대를 만들어보고 싶은 거다. (…) 최고 장비, 최고 시스템을 내놓으라는 거고, 대통령이 '그래 준다'라는 거다"는 <연합뉴스>와의 회견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안보 분야의 일련의 협상과정에서 의도를 관철시킨 부시 행정부는 여세를 몰아 차제에 한미FTA협상까지 새로운 한미협상 의제로 제시하며 이것까지 노무현 정부 임기 안에 끝내겠다는 결의로 나서고 있다.
아마도 용산기지 협상이나 전략적 유연성 협상이나 마찬가지로 FTA 협상도 비밀에 붙이는 것이 가능했다면, 한미 양국 정부는 의회의 행정부에 대한 협상권한 위임 시기가 사실상 만료되는 내년 3월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미FTA 협상 개시에 이르러서 미국의 의도는 북핵문제 해결이나 북미관계가 아니라 한미동맹 재조정, 나아가 한미관계 전반의 재조정에 있었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일련의 한미협상이 최소한 북핵문제의 타개는 아닐지라도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느냐는 논리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의도에서 보면 한미협상이 진행 중인 동안 대북관계는 크게 악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크게 개선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경제 분야 고유의 논리를 제외할 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미관계가 대북관계 타개를 위한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면, 미국에게 대북관계는 한미관계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망각한 자신의 전략적 가치
여기서 미국의 의도에서 본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일련의 협상과정에서 부시 행정부는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철수도 있을 수 있다는 카드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내에서 주한미군의 위치는 좀 더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미국 내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한반도 평화 내지 통일 이후 한반도는 중국과의 전통적 우호관계에서 볼 때 중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지역이 될 것을 우려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박건영 토론문, "한나라는 '작통권 환수 반대'를 대선공약으로 하라", <프레시안>, 2006년 9월8일). '중국위협론'에 따라 미일동맹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지만,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질수록 한국의 전략적 위치도 높아지게 되어 있다.
미-일 대 중국 사이에 끼어 그 갈등에 말려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균형자론'을 꺼내든 바 있지만, 상황은 반드시 위기로 볼 것은 아니었다. 이 논리는 표현만으로 보면 상당히 대담한 발상이지만, 오히려 그 이면에는 현재 국제정세를 구한말로 환치하는 역사적 피해의식이 가로놓여 있으며, 그나마도 미국 측의 반론에 슬그머니 수그러들고 말았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세계 11위 규모인 한국경제는 IMF금융개방 이후 월가의 동아시아 금융시장 거점이 되고 있다. 미국 재정채권의 최대 보유국으로서 미국의 대외적자를 메워주는 일본, 중국경제에 대하여 견제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 한국 금융시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동남아시아도 포함해 'ASEAN+한중일'이 달러 활용을 줄이고 독자적인 지역통화협력으로 나아가는 사태를 미국은 우려하고 있다. 또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아시아지역 내 미군은 주일미군만 남게 되어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주한미군 철수가 일본의 안보 독자화를 부추기면서 주일미군의 위치에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미 공화당 정부는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결합시켜 나토형의 한미일 3각군사동맹으로 확대시킬 의도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정치·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독자적 위치나 비중을 한국 정부 스스로가 제대로 평가하고 소중히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은 절실한 과제였다.
그러나 과연 노무현 정부는 자신의 힘과 존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며 이를 지켜내려 노력했는가? 아시아지역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문화적으로 뒷받침하면서 한류의 저수지 역할을 하는 한국 영화에 대해 스크린 쿼터 축소를 단번에 FTA협상 개시의 전제조건으로 결정한 데에서 그 인식의 일단이 드러난다.
이 점은 한미FTA가 그리는 미래상에서 '중국경제위협론', 심지어 '일본경제위협론'까지 동원하면서 정작 동북아시아에서의 지역협력 비전은 빠져 있는 데에서도 엿보인다.
북한의 폐쇄적 인식과 한반도 핵의 문명사적 의미
물론 남한만의 책임을 묻는다면 노무현 정부 입장은 억울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북한 측에서도 중시해야 할 측면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7월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한의 대중들이 북한 '선군정치'의 덕을 보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물론 북한 입장에서 2300만의 인민을 포함한 자기 체제는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동아시아, 아니 전 세계의 시야에서 자기 존재를 객관화하고 상대화시켜 보는 일이 북한에 시급함을 상기시켜 줬을 뿐이다.
북한 당국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자기 인민들도 먹여 살리기 힘든 북한 체제의 현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부담 내지 짐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거꾸로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동북아시아 지역 내 평화증진을 꾀해 가는 데 남한의 정치·군사, 경제 역량이야말로 핵심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할 것이 요구된다.
한반도 전체의 견지에서 볼 때, 이를 지켜 갈 책임은 우선 남한의 몫이지만, 북한의 몫도 따라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독자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소홀히 한 노무현 정부의 책임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하고 미사일 실험발사를 한 것은 자기 체제의 안보를 위한 군사적 억지력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북한이 세계 초강대국 미국에게서 느끼는 안보 불안은 외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남한 정부나 국민들도 북한이 느끼는 안보 불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서 하루빨리 북한의 취약한 군사력의 실태를 무시하고 자기 안전만을 위한 군비증강만을 고집하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은 자신의 핵실험 시도로 이러한 남한의 일방적 안보가 거꾸로 자기의 안보 불안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남한 정부는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정지작업을 해야 했으나 시도조차 되지 못했고, 국민의 안보의식은 여전히 보수적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논리도 외부 세계의 이해나 남한의 처지에 대한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주장된다면, 자기 체제만을 고집하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것으로 폄하될 뿐이다.
북한 체제의 입장에서는 핵이나 미사일을 미국 네오콘의 대북 공격을 저지할 군사적 억지력으로 간주하겠지만, 미국 네오콘의 군사적 해결방식에 대한 보다 중요한 억지력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나아가 국제사회의 평화의지다.
이라크 전쟁을 보면 이러한 것이 무력하게 비칠지도 모르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남한의 정치·군사, 경제적 위치는 미국도 무시할 수 없다. 남한은 물론이지만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미국 네오콘이 대북 군사공격을 감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하고 미사일 실험발사를 해도 미국 정부는 무시정책으로 대응해 왔다. 1992~93년도 '제1차 북핵위기' 때와 양상은 달라져 있다. 더욱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이 지역, 특히 남한 시민사회의 평화의지와 상충되는 데 문제가 있다. 2000년도 6.15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진전되고 있는 남북화해·협력은 남북이 함께 지키고 키워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북한이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면 할수록 남한 정부나 시민사회의 평화역량은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앞에서 언급한 한미관계에서 한국 정부의 대미협상력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번 발표에서 북한도 강조는 하고 있으나, 한반도 비핵화는 역사적·문명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일본만이 원자폭탄 투하로 직접 피해를 입은 '피폭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민족(조선민족)도 '피폭민족'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는 일제 식민지로 강제동원된,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피폭을 당한 바 있다.
일본민족과 한민족은 피폭 체험을 승화시켜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비핵평화를 문명사적 사명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공동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아무리 협상카드라고 해도 이러한 문명적 의미에 반하는 행동이다.
앞으로의 과제
스스로를 위해서나 남한을 위해서 북한이 할 일은 최소한 남북관계를 복원하여 군사실무회담을 진전시키고, 6자회담에 복귀할 절차를 밟아 가는 것이다.
남한 정부도 미국이 협상에 임하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미국에 요구해야 하며, 나아가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독자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DJ방북 카드, 남북정상회담 등 모든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
이처럼 목전에 박두한 핵문제 처리가 한국 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현안이 될 것이지만, 이와 함께 앞으로 한미FTA협상이 남아 있고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협상도 일정에 올라 있다.
이제 노무현 정부는 중단이 불가능하다면 한미FTA협상에서 최대한 한국 국민의 삶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며, 협상시한을 넘기게 된다면 차기 정부의 과제로 넘겨야 한다.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도 주권문제로만 볼 일은 아니며, 이미 인정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사전협의 메커니즘을 설정할 수 있는 마지막 협상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국 정부보다 미국 정부가 이양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 것은 이것이 주권문제만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충분한 국민적 합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치며 대미협상에 임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협상 타결이 늦어졌다고 해서 실패로 간주할 만큼 한국 국민들의 수준이 낮지는 않다. 이미 기왕의 한미협상들에서 미국의 말을 들어주며 양보하는 것이 북핵문제 해결에서 미국의 유연성을 이끌어내는 길이 아님은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협상 자체가 갖는 고유의 가치, 즉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소중히 지킨다는 확고한 인식에 입각하여 협상에 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협력으로 반기문 외교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하여(이근, "시나브로 변해가는 한미동맹과 '반기문 UN총장'" , <프레시안>, 2006년 10월 3일) 미국의 전략에 대한 인식을 안이하게 가져가서는 안 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