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첫 반응은 북한을 6자회담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합의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이 한국과 미국의 공허한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을 암시했다.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이 정상회담 직후 회담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접근방안'이 미국도 아닌 한국만의 희망사항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갖게 한다.
백악관이 부실하게 발표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언론들조차 한국에서 그토록 논란이 되는 '접근방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상은 그같은 의구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북한과 미국 양쪽에서 무시당하는 '공통의 포괄적 접근방안'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구제적인 내용이 어떻다느니, 어떻게 협의해 나가겠다느니 한 판 말잔치를 벌이고 있다.
알 수 없는 '포괄적 접근방안'
정부가 구체적인 내용을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 당국자의 비공식 발언과 그에 따른 유추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접근방안'에 대해 지금까지 나오는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것이다.
우선 '접근방안'의 핵심은 9.19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상호조치'를 단계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북한이 핵동결 또는 폐기를 위한 행동을 할 경우,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동시에 이행한다.
가령 북한이 영변 5MW 원자로 가동을 중단한다면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하고, 중유 등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식이다.
금융제재에 대해서는 지난 3월 뉴욕에서 있었던 북미 협의에서 북한이 제기한 4대 요구사항과 미국의 요구사항을 양측이 동시에 이행하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
뉴욕 접촉에서 북한은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해제와 위폐 검사를 위한 북미간 비상설 협의체 구성 △미국 내 은행에서 북한 개좌 개설 허용 △위조지폐 감식을 위한 미국의 기술 지원 등을 요청했고, 미국은 북한에 국제사회의 돈세탁 방지활동에 참가하려 한다면 APG(아시아태평양 자금세탁 방지기구)에 우선 가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방안들이 회자되고 있는 가운데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은 18일 "다른 쪽에서 볼 때는 꼭 해야 되지만 반대쪽에서는 결코 못할 일들을 제외시키면서 가능한 걸 뽑아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조합하는 일"이라고 '접근방안'의 기조를 설명했다.
북·미 모두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러나 과연 이같은 '기술적인 조합'들이 북한을 6자회담으로 복귀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예컨대 '북한이 핵동결 또는 폐기를 위한 행동을 할 경우', 혹은 구체적으로 '북한이 영변 5MW 원자로 가동을 중단한다면'이란 전제를 북한이 받아들일 리 없다.
미국을 극도로 불신하면서 '동시행동' 원칙만을 고집하는 북한이 자신들의 '선(先) 행동'을 요구하는 방안을 받아들인다면 '핵폐기가 먼저냐 경수로 제공이 먼저냐' 같은 지루한 논쟁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은 미국이 원하고 있는 대북 제재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걸 중국과 합의하고 북한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뉴욕 북미 협의에서 북한이 요청한 방안들은 '금융제재를 해제한다면'이라는 전제가 있다. 미국이 금융제재를 걸어 6자회담이 1년간 좌초됐고, 앞으로도 제재의 해제는커녕 강화를 천명하고 있는 마당에 '제재 해제'라는 조건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거라면 9.19성명 이후 '잃어버린 1년'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영남 위원장이 '제재 해제 없이 6자회담 없다'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한 것이나, 미국이 시큰둥한 이유는 이처럼 '공통의 포괄적 접근방안'이 가진 비현실적인 가정들 때문으로 보인다.
가까스로 마련된 '외교의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으로 대표되는, 북한을 6자회담에 복귀시키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이 북한에 대한 직접 설득 없이 미국과만 협의되는 '원 사이드' 외교라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정부는 지난 7월 남북장관급회담이 조기종결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빚은 후 북한과의 당국간 접촉을 하지 않고 있다. '포괄적 접근방안'이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한미정상회담이 최소한 '시간벌기'에는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그 '시간'을 북한과의 대화에 쓰려는 계획 또한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한미정상회담으로 어렵사리 확보한 기회를 십분 활용해 미국과의 협의에 쏟는 노력만큼 북한과의 직접 접촉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중간선거를 겨냥해 핵실험을 실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남북 간의 직접대화가 절실한 또 하나의 이유다.
이에 남북대화를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거론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중단한 쌀·비료 지원을 재개해 대화 복원의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쌀·비료 지원 중단' 결정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도로 이제와 뚜렷한 명분도 없이 지원을 재개하는 것은 국민들을 납득시키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일각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기 목표'가 될 수는 있어도 6자회담 복원이라는 당면의 목표를 위해 쓸 카드는 아니라는 점에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DJ 특사 논의되지 않고 있다"…그 다음은?
이같은 현실을 고려할 때 대북 직접 설득을 통해 6자회담 재개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꼽히는 것이 대북 특사 파견이다.
미국 9.11사태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2002년 4월 임동원 당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북한을 방문했던 경험, 지난해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6자회담 복귀의 물꼬를 텄던 경험 등을 사례로 북한에 '대통령 특사'를 보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17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 특사 자격을 부여해 북한을 방문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나온 것도 그같은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송민순 실장은 18일 <YTN>과 가진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 특사 파견 문제는 필요시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이 문제를 두고 논의하지는 않고 있다"며 현 단계에서는 추진되고 있지 않음을 시사했다.
송 실장이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는 것에 한한 것인지, 특사 파견 자체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정부가 한미정상회담으로 그야말로 어렵게 마련한 외교의 공간을 특사 파견을 통해 활용하지 못하고 미국과의 공허한 논의에만 집착한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리 만무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 전 대통령이 아니라도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제2, 제3의 인사가 북한에 가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주장에 정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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