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이 개시되자 미국 내 일부 한국 전문가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하는 것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 방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유를 했다.
'반미 좀 하면 어떠냐?'는 식의 발언을 하면서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걷고, 경제적으로는 대외개방과 사회통합을 조화하는 정책을 모색하는 듯했던 노 대통령의 급작스런 변신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주·진보 진영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노 대통령이야말로 한미 FTA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졌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나 미중관계 정상화의 초석을 놓았듯이 노 대통령도 손상된 한미관계를 치유해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어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닉슨 대통령은 중국방문을 전후해 당시 미소 냉전체제에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얻을 수 있는 편익을 지지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의 닉슨 행정부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고, 반공주의자들이 보기에도 닉슨 행정부가 제시한 '차이나 카드' 논리는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참여정부에 대한 신뢰의 기반은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 확인된 것처럼 이미 무너진 상태이고, 한미 FTA 추진 논리 역시 원론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조악한 수준이다.
협상 상대방인 미국과 제대로 협상도 하지 못하면서, 비록 정부는 준비가 안 되어 있지만 국민들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훈계하는 식이다. 특히 한미 FTA의 세부 협상조건에 대해 우려하는 국제통상법 전문가나 경제학자들을 구한말 쇄국론자나 종속이론 추종자로 취급하는 데 이르러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미관계 균열 정석으로 해결해야
이처럼 한미 FTA 추진에 무리가 따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미 FTA의 세부조건을 따져 체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FTA를 통해 손상된 한미관계를 치유한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협상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및 <프레시안>) 하지만 FTA를 통해 손상된 한미관계를 치유한다는 발상은,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손에 잡히는 약부터 써보자는 식의 잘못된 생각이다.
한미관계에 균열이 왜 생겼는가?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유는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대북정책, 더 나아가서는 탈냉전시대 동북아의 미래 비전에 대해 한미간에 이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고 선언한 아버지 부시나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클린턴 행정부 때 한국은 미국과 긴밀한 조율 하에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가 대북 포용정책을 전면 부정함에 따라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더 나아가 미일동맹을 축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네오콘의 정책구상에 대응해 한국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화해와 협력을 주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둘째 이유는 한미관계를 좀 더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중생 사망사건과 촛불시위부터, 주한미군 기지 이전과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논의에 이르기까지 한미 양국이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를 조정하면서 갈등을 겪은 것이다.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긴 마지막 이유는 서로 거친 말이 오가면서 감정이 쌓였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장관 등은 북한과의 직접 협상은 배제하고 대북 군사적 조치 운운하며 마치 한국인의 안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노 대통령은 노 대통령대로 국내정치용이든 아니든 미국인의 감정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미국내 전문가들 중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에 질린 나머지 'DJ가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정도다.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긴 이유가 이와 같다면 치유책 역시 문제가 생긴 곳에서 찾는 것이 정석이다.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이미 지난 10여 년 동안 체험한 바와 같이 '상호위협 감축'이라는 대원칙 하에 북한과 미국이 협상을 하는 것이 해법임을 꾸준히 설득하고, 동북아에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대립하는 구도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미국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실패한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추종하거나 미국과의 정책조율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에 대해 한국이 일방적으로 보상해 줄 필요는 없다. 한미 FTA로 참여정부가 '성의'를 표시한다고 해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동북아 전반에 대한 외교정책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한편 한미관계를 좀 더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은 어차피 한번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지이전과 작통권 환수 등 개별 사안에 대한 협상이 필요하지, FTA 협상으로 이를 대체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감정적인 요소가 개입된 부분은 한미 양국의 주요인사들이 언행에 신중을 기함으로써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한미관계에 균열을 가져온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FTA로 덮어씌운다고 해서 균열이 없어지지도 않겠지만, 주로 외교안보 분야에서 생긴 갈등을 경제분야에서 양보해 해결한다는 발상은 FTA 협상 과정에서 우리측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개성공단 문제는 부시 행정부 대북정책 전환 상징할 것
실제로 최근 밝혀진 것처럼 정부는 중국이 한중 FTA와 관련해 쌀을 비롯한 한국의 민감품목에 대해 상당한 양보를 할 의향이 있음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활용하기는커녕 한미 FTA를 추진하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중국과 FTA를 먼저 체결할 경우 한국이 중국 편으로 넘어갔다는 인상을 미국에 줄 것을 우려해 한중 FTA 추진에 신중을 기할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중국이 제시한 협상조건을 한미 FTA 협상과정에서 카드로 활용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한미관계의 균열을 가져온 근본 원인에 대한 치유책을 한미 FTA 협상과정에서 모색하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전개해야 한다.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이 거두는 편익의 대부분은 한국시장에 대한 접근 확대로 얻는 것인 반면, 한국의 편익은 한국시장의 개방 확대로 구조조정이 일어나면서 효율이 향상되는 데 기인하는 비대칭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다. 즉, 이미 관세율이 낮은 미국시장에 대한 접근이 확대된다고 해도 한국이 얻는 편익은 크지 않고, 편익의 대부분은 고통이 따르는 국내시장 개방과 구조조정 과정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편익이 한국에 대한 수출 확대를 통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한국의 편익은 대부분 국내경제의 효율 향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성격을 가진다. 또, 미국은 한미 FTA 체결을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미일 FTA를 압박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한국은 이와 같은 부수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처럼 한미 FTA는 미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므로 이에 상응하는 이익을 확보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전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는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FTA 협상과정에서 이를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 비록 현재 개성공단의 생산규모는 크지 않지만,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상징하는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미국이 전방위 압박을 통해 북한정권의 붕괴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북한의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지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또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은 한미 양국이 상이한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극복하고 한미관계의 균열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처럼 미국의 대북정책이 전환될 경우 한국의 '북한 리스크'가 줄어들고 신용등급은 향상될 것이다.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은 이미 관세율이 낮아 한국에 별로 줄 것이 없는 미국이 FTA 협상을 통해 한국에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다.
또 정부의 논리대로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제고가 한미 FTA 추진의 주요 목표라면 FTA를 통해 최대한 선진 노하우가 전수될 수 있도록 협상할 필요가 있다. 미국기업이 미국에서 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한국에 상주지사를 개설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내 고용과 기술이전이 최대한 많이 이뤄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꾀하더라도 제조업을 지레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싱가포르 등 인구 수백만 명 규모의 일부 국가사례에 매료되어 서비스산업 육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지막으로 이미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투자자-국가소송제 등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제도의 도입은 막아야 한다. (<프레시안> 송기호 변호사 글 참조) 한미관계의 균열을 FTA로 어떻게든 치유하겠다고 나서다가는 투자자-국가소송제처럼 FTA 체결 자체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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