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저희들은 한미 FTA 협상을 잘해보라는 임명을 받은 공무원들입니다. FTA 협상을 하느냐 마느냐 논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협상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국민 여러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는 27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2차 한미 FTA 정부합동 공청회에서 이 말을 세 번이나 해야 했다. 한마디로 한미 FTA 협상 자체에 대한 찬반 여부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공청회 참석자들의 발언은 계속 한미 FTA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로 이어졌고, 한미 FTA 협상을 기정사실화 하고 '조언'을 듣기 위해 나온 대표단과 한미 FTA 협상 자체에 반대하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FTA 범국본) 소속 회원들 사이의 공방은 서로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계속 헛돌기만 했다.
결국 김종훈 수석대표는 '제대로 된 공청회를 다시 열자'는 FTA 범국본의 거듭된 요구에 "그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니 정부 안에서 협의를 하도록 하겠다"는 말로 이날 공방전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 돌아가 무엇을 협의하시렵니까"
이날 공청회는 사실상 무산됐다. 오전 일정은 FTA 범국본 측의 항의로 개회사도 미처 끝내지 못했고 오후에는 FTA 범국본 소속 회원들과 김종훈 수석대표가 공방을 벌이다 예정된 공청회는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김종훈 수석대표가 '범국본 측의 요구를 고려해 공청회를 다시 개최할지 다시 협의를 하겠다'고 밝혔지만, 만약 지난 2월 2일에 있었던 1차 공청회의 경우처럼 '원만히 진행되었다'고 발표하면서 한미 FTA 2차 협상에 바로 돌입할 작정이 아니라면 공청회를 다시 열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정부에 돌아가 무슨 논의를 할 것인가? 사실 중요한 것은 '공청회를 여느냐 마느냐'보다 '어떤 공청회를 열 것이냐'에 있어 보인다. 공청회를 열더라도 짜여진 일정에 맞추기 위해 이번과 같이 17개 분야를 발제자 22명이 한 명당 10분씩 발언하는 방식으로 몰아서 하려 든다면 그 결과는 보나마나 이번과 꼭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소한 18번의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는 FTA 범국본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FTA 범국본은 한미 FTA 총론에 대해 한 번, 그리고 현재 협상 대상이 된 17개 분과에 대해 각기 한 번씩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현재 7월 12일로 예정된 2차 협상 일정을 미뤄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전혀 비상식적인 주장은 아니다. 미국정부는 이미 한미 FTA 체결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산업의 협회 등을 돌아가며 심도 깊은 공청회를 주최했다. 한국 정부 역시 협상력을 높이고 보다 '부작용이 적은' 협상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업계와 시민단체 등 이해당사자들과의 긴밀한 협의가 꼭 필요할 것이다.
이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해야 제대로 된 공청회가 가능하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범대위는 1차 협상 초안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종훈 수석대표는 "협상전략을 보호하기 위해 협정문을 공개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김종훈 수석대표의 항변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허영구 부위원장은 "국민 전체에게 협정문을 공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협정안에 대해 업계 대표와 시민단체 등 해당 사안과 관련있는 이해 당사자들과 최소한의 논의를 하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공청회가 무산된 까닭은?
정부는 이날 공청회를 준비하면서 허공에 집을 지으려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김종훈 수석 대표가 거듭 말한 것처럼 공청회가 한미 FTA에 대한 찬반 토론장이 아니라 '협상 성공전략'에 관한 국민의 조언을 듣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애초에 한미 FTA 자체에 대한 찬반 논의가 필요했고, 어떤 대상이 협상에 올라가는지 국민들이 알고 있어야 하며,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실증적인 연구가 있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한번의 공청회에서 현재 진행중인 사안에 대해 국민의 조언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안이한 것이었다. 설령 이 모든 것을 용납하더라도 이날 공청회가 가능하려면 최소한 정부에 대한 신뢰라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공방에서도 그간 약속을 저버린 정부에 대한 불신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측에서 '정부가 FTA 체결 이후 3년간 합의된 협정문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것 같다"면서 "3년간 공개하지 않는 것은 합의된 협정문이 아니라 협정 체결까지 양 정부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라고 해명했다. 그는 "협정문은 당연히 체결되자마자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해명에도 정부에 대한 불신은 가시지 않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기환 사무총장은 "지난 마늘 협상이나 쌀협상에서 정부는 이면합의를 통해 농민을 속여 왔고, 농민들은 정부만 믿고 있다가 그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면서 "협정문을 공개한다고 해도 그 과정을 모른다면 이번 협상에서도 이면협상이 없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종훈 수석대표는 "내가 이 협상을 처음 시작하면서 이번 FTA에 관한 한 이면합의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면서 "직을 걸고 이면합의는 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믿어줘야 한다"고 말하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국민의 믿음'은 김종훈 수석대표 혼자 직을 건다고 얻어질 것은 아닌 듯했다. 한미 FTA 협상 대표단의 실력이 미국의 대표단을 능가할 만큼 출중하다고 해도 역시 국민의 신뢰는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한 일이다.
"대표단이 다 짊어지고 갈 일이 아니다"
이날 공방을 지켜보던 허영구 부위원장은 "한미 FTA를 제대로 체결할 절차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어째서 대표단이 짚을 지고 불로 뛰어들려 하느냐"며 개탄했다.
허영구 부위원장은 "민주노동당의 통상절차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고,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한미 FTA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으며, 한나라당에는 한미 FTA 관련 특위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면서 "지금의 구조대로라면 행정부가 만들어서 국회는 내용도 모르고 거수기 노릇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이제 2년도 안남은 상황에서 꼭 임기 내에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한미 FTA는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도 통상절차법도 만들고 국회에 '한미 FTA 특별위원회'도 만들고, 각 당도 협상 분야 별로 자기 방침 만들어서 협상 해도 늦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허영구 부위원장은 김종훈 수석대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협상을 중단한 다음 관련 절차를 다 갖춘 다음에 하자고 건의하는 게 어떻느냐"면서 "이런 상황에서 협상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종훈 수석대표도 "얼마 전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미 FTA 협상에 관심을 갖고 제 몫을 해달라고 부탁했다"며 "국회내 특위 설치 등은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라고 공감을 표했다.
누구와 공청회를 할 것인가?
허영구 부위원장의 제안처럼 국회가 한미 FTA 체결에 필요한 절차를 갖추고, 이제까지 밟아야 할 절차를 밟아 왔다면 이날 공청회처럼 국민들이 한미 FTA 협상 대표단에 해결할 수도 없는 요구들을 쏟아내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만약 한미 FTA 협상이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체결되고, 그로 인해 한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는다면 한미 FTA 협상대표단이 두고두고 비판을 받을 것은 불보듯 뻔하다. 얼마전 1차 협상 결과를 두고도 '다 퍼준 협상'이라며 많은 언론이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듯이 말이다.
그러나 한미 FTA 협상의 결과와 그 영향에 대한 책임은 협상대표단보다는 국민의 동의도 얻지 않고 협상부터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에 있지 않을까. 이날 공청회에서 쏟아진 말들의 대다수도 이들 대표단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들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다시 공청회가 열린다면, 무엇을 논의할 것이며 그 자리에는 누가 나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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