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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이 없는 시대의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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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이 없는 시대의 쓸쓸함

김민웅의 세상읽기 〈242〉

제대로 된 역사소설을 만날 수 없는 시대는 그만큼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대한 성찰이 시들어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지나간 과거를 소재로 하고 있다 해도 그것은 사실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겨냥한 발언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소설의 존재는 당대의 정신사를 주목하게 합니다.
  
  박경리의 <토지>나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또는 <한강>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꿰뚫고 있는 우여곡절의 정체를 밝혀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그 소재가 된 역사적 시점은 격동과 폭풍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은 것입니다.
  
  지외르지 루카치의 <역사소설론>이 집필된 때가 대략 1936년 즈음이었는데, 이 시기 세계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전야라는 현실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역사소설에 대한 관심과 논란은,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과 역사의 운명에 대해 조명하려는 치열한 지적 탐색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루카치는 그의 역사소설론의 첫 장에서 역사소설의 등장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역사소설은 19세기 초에, 대략 나폴레옹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하여 발생했다."
  
  물론 역사를 소재로 삼은 문학이 이전에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식이라는 근대적 사유로 당대를 보는 작업이 이때 시작됐다는 겁니다.
  
  그건, 프랑스혁명 이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극단으로 엇갈리고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유럽의 보수적 질서가 복구되는 전환기에서, 그렇다면 이제 어떤 역사가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쏟아진 상황을 말해줍니다. 격렬한 변화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에 이 의미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날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충격이 유럽을 강타하고 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깊어가는 시기를 넘어서면서 소설은 역사에 대해 주목했던 것입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문학은 광장에서 개인의 밀실로 그 시선을 돌렸습니다. 광장의 뜨거운 함성도 좋지만, 지치고 힘들었던 개인의 실존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밀실에서의 칩거는 소비주의적인 개인과 역사에 대한 냉소를 상식으로 가진 사회를 가져온 책임도 지게 됩니다.
  
  개인적 일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역사에 대한 섬세한 애정과 힘 있는 전망을 그 안에 깔고 있는 역사소설의 등장을 이제는 기대해도 될 만한 시기가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럴 희망이 불투명한 것은 우리의 정신사적 풍토가 너무도 가볍고 얕기 때문입니다.
  
  유행에는 민감하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는 능력은 부족한 사회에서 문학은 영화보다 못한 소비상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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