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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사 석탑의 몸돌 조각에서 '신심'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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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천룡사 석탑의 몸돌 조각에서 '신심'을 읽다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0〉탑상편 '천룡사'조

경주 남산은 산 전체에 불상이나 탑 같은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어 흔히 노천박물관으로 불린다. 그런 남산에 이따금씩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모르고 있던 유적이 새로 발견되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탑골 초입에서 제2의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이 발견되었다든가, 선방골 능선 위에서 석불 입상이 발견되었다든가 하는 것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작년 11월에는 남산 남쪽 새갓골의 머리 없는 불상 근처 골짜기에서, 그 불상의 불두(佛頭)를 찾게 된 경사도 있었다. 무심한 사람들은 뭐 그런 걸 가지고 경사라고 호들갑 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불상이나 탑을 만들려면 엄청난 공(功)이 들어가는 것은 상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 공은 아마도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더 클 것이다. 불상이나 탑은 어찌 보면 금전으로보다는 신심(信心)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극한 신심으로.
▲ 고위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천룡사터 전경. ⓒ김대식

그런 지극신심의 예로 우리는 '삼보일배(三步一拜)'를 알고 있다. 세 걸음 걷고 한 번씩 절을 하는 행보. 그런데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일보일배(一步一拜) 얘기가 나온다. 진자라는 승려가 미륵선화를 만나러 웅천 수원사를 찾아가면서 한 걸음에 한 번씩 절을 했다는 것이다. 또 있다. 고려 시대에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경판에 글자를 새기는 각수(刻手)는 글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절 한 번씩 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런 지극신심들이 탑이나 불상에 천년 세월 동안 올려받쳐졌음을 생각해 보면, 탑이나 불상은 그 자체가 신심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은 그냥 돌로 된 탑 또는 불상이 아니라 백년, 천년을 두고 쌓여온 지극신심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석탑이나 석불들은 저절로 무너진다든가 깨어진다든가 하지 않는다. 탑상의 무너짐이나 깨어짐에는 으례 전화(戰禍)라든가, 종교적 박해 같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할진대, 무너진 탑을 일으켜 세우고, 불상의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이어맞추는 것은 단순한 복원(復元)을 넘어, 하나의 새로운 불사(佛事)가 된다.

"경북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천룡사 터 삼층석탑(보물1188호) 주변에서 떨어져나갔던 탑의 1층 몸돌 조각이 발견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윤근일)는 최근 석탑 배수로 정비 공사 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탑에서 80여m 떨어진 축대석 무더기 사이에서 높이 39cm, 너비 38~41cm의 1층 탑신석 모서리 조각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연구소 관계자는 '발견한 몸돌 조각 표면이 1층 탑신석과 동일한 장석 띠를 이루고 있고 탑의 깨어진 부분과도 딱 들어맞았다'며 '석탑에서 떨어져 나온 탑재 일부가 후대에 탑 주위 석축을 쌓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되찾은 탑 몸돌을 정밀 분석한 뒤 제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지난 6월 초, 남산 천룡사 터 3층 석탑의, 일부 떨어져 나간 몸돌 조각이 발견되었음을 조그맣게 알려준 신문기사다. 떨어져나간 몸돌 조각. 별 대수롭지 않은, 예사스러운 그 기사에서 나는 '해후(邂逅)'라는 말을 떠올렸다.
▲ 천룡사터 5층석탑 탑신부. 1층 몸돌에 돌이 떨어져 나간 자국이 남아 있다. ⓒ김대식

천룡사는 경주의 문화유산 답사 단체들이 매우 아끼는 곳으로, 답사 단체들은 봄 가을의 보름달이 뜨는 날을 잡아 '달빛 기행'을 하곤 한다. 여러 가지 코스가 있지만 그중 대중적인 코스가 보름날 저녁 무렵 통일전 어름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칠불암으로 오르는 것이다. 십리 가까운 봉화골 골짜기를 한 시간 남짓 올라가면, 남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불교유적인 칠불암에 이른다. 거기서 마애삼존과 그 앞의 사방불에 경배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수십 미터 깎아지른 절벽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절벽 끝에는 또 마애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칠불암에서 한 숨 쉬고 절벽을 돌아올라가서 거기 마애보살상 앞에 서면 보살상의 화려한 의관과 꽃을 든 자태가 우리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애보살상 앞으로는, 길게 뻗은 남산 자락과 그 너머 남북으로 구비치는 토함산 능선이 시원하게 눈에 든다. 그 무렵이면 멀리 토함산 위쪽으로 보름달이 떠올라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구경거리들을 두루 구경하고 다시 산길을 올라가면 바로 남산 주능선이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 있겠지만 달빛을 의지하여 길을 걸을 만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천룡사로 이어지는 길은 쉽다. 달은 점점 높이 떠오르면서 밝아져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렇게 달빛에 젖으며 능선길을 걷다가 백운암 가는, 평지 같이 순한 산 허릿길로 접어들고, 다시 백운암을 지나면 높다란 나무들이 늘어선 숲길이다. 그리고 그 숲길 끝에 서면, 아래쪽 널따란 천룡사 터에 달빛이 은은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느 핸가 달빛 기행으로 천룡사 터 여염집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다. 늦은 저녁을 마치고 천룡사 터로 나섰더니 3층 석탑에 달빛이 은은했다. 달빛 자체가 환상이었고 그 속에 서 있는 탑 또한 환상이었던 그윽한 풍경 속을 나는 거닐었다. 탑이 거기 있음이, 달빛에 탑이 젖고 있음이, 그리고 나 또한 거기 있음이 축복으로 다가와서, 축복에 겹고 겨운 마음으로 그저 망연했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경주 남산에서도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천룡사는 1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절이다. 문무왕 때에 신라에 왔던 악붕귀라는 당나라 사신이 사천왕사를 조사하러 왔다가 천룡사에도 들러서는 "이 절을 없애면 며칠 안 가서 나라가 망하리라"고 했다는 일이 탑상편 '천룡사'조에 실려 있다. 천룡사가 국가의 안위에 관련될 만큼 중요한 절이었다는 얘기다. '천룡사'조 기사에서 천룡사를 '높은 절[高寺]'이라고도 불렀다는 구절은, 절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천룡사가 황룡사, 사천왕사와 같은 사격(寺格)을 가졌던 절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고 보면 천룡사가 예사 절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천룡사는 어느 때부터인지 폐허가 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발굴현장의 모습. ⓒ김대식

천룡사 터에는 오래된 석물들이 적지 않이 널려 있다. 근래 발굴작업으로 복원된 3층 석탑 말고도, 인근에는 큼지막한 주춧돌들, 거북등 무늬가 뚜렷한 석당(石幢), 안상(眼象)이 새겨진 석조(石槽), 대형 맷돌 등 많은 석물, 석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무너진 석축의 석재들을 모아서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3층 석탑의 1층 몸돌 조각이 그 무더기에 파묻혀 있다가 이번에 발견된 것이다.

3층 석탑이 무너지고, 무너진 석탑이 조각나고, 그 석탑 조각이 축대석으로 쓰이고 다시 그 축대가 무너져 돌무더기로 쌓이고 하다가, 천행으로 건져진 1층 몸돌 조각. 그 운명이 기구하다는 한 마디 말로 다 표현될 수 있을까? 그리고 몸돌과 그 조각돌의 만남이 해후라는 단어 하나로 다 설명될 수 있을까?

탑이란 것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염원이나 원망(願望)의 간곡한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부서진 몸돌과 조각돌의 천년만의 해후가 천년 전 지극신심이 이루어낸 경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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