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레이로 박사는 에바에 대해 "한마디로 프랑스의 잔다크 같은 여성이었다"고 정의했다. 잔다크가 신의 계시를 내세우며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한 몸을 내던진 것처럼 에바도 거부들과 빈민층으로 양극화된 아르헨 사회의 개혁을 위해 짧은 일생을 아낌없이 바쳤다는 설명이다.
현지 역사학자들은 에바 페론이 '성녀'라는 최상의 평가와 '창녀'라는 최악의 평가가 상존한다는 질문에 대해 "두 번씩이나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페론 제거에 실패했던 군부는 에바의 이미지 깎아내리기에 고심했다. 성녀라는 이미지로 전 국민의 국모로 존경 받는 에바를 단번에 무너뜨리기 위해선 무슨 말이 가장 효과적이었겠나를 한번 생각해 보라"면서 "상황이 이러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라고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한 페론재단의 한 관계자는 "극적인 스토리를 선호하는 서방언론들이 여기에 편승해 '창녀에서 대통령 영부인으로'라는 소설적이고도 드라마적인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고 목청을 높였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에비타(에바의 애칭)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단적으로 보여준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0여 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팝 가수 마돈나와 스페인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하고 알란 파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뮤지컬 '에비타' 촬영에 관한 얘기다.
파커 감독은 이 영화의 전 장면을 아르헨 현지로케로 촬영하겠다면서 상당한 경제적인 지원을 앞세워 아르헨 대통령궁의 발코니 사용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아르헨 국민들은 마돈나가 에바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주연배우 교체를 요구했다. 또한 영화의 내용도 상당부분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 시나리오의 대폭적인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메넴까지 나서서 파커 감독을 설득했다. 하지만 파커 감독은 이와 같은 아르헨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촬영을 강행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아르헨 국민들은 촬영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파커 감독은 아르헨 현지촬영을 포기하고 도시 분위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비슷한 부다페스트로 장소를 옮겨 세트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에바타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는 얘기다.
아르헨 사람들의 영원한 '국모' 에비타
아르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이었던 에바의 짧았던 일생을 현지시각으로 새롭게 재평가 해본다.
오는 7월 26일은 생의 마지막 순간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향해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겨 지금까지 '에비타의 타이틀' 곡(Don't cry for me, Argentina)으로 불리게 한 에바 페론이 사망한 지 54년이 되는 날이다.
33세의 한창 나이에 세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꼽히며 아르헨티나를 일류 복지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해 살아 있는 성녀로 추앙받는 등 가히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다 전설처럼 사라져 간 에바에 대한 인기는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른다.
특별히 선거철이 되면 아르헨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페론이즘'의 본류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에바는 선거유세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기도 한다. 에바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신들이 대신하겠다는 공약인 것이다. 지난 1952년 7월 26일 세상을 떠난 에바는 54년이 지난 지금도 아르헨티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정치인들 모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 현지의 진보적인 언론들은 에바에 대해 '서민들의 희망이자 빈곤을 위해 투쟁했던 의협심이 강한 여자, 사회부정과 극심한 양극화를 바로잡은 전설적인 사회운동가'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녀는 농업국가인 아르헨티나의 경공업을 발전시켰고 국내 유통구조를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극소수에 몰린 부를 일반대중들과 소외계층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창안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일부 보수층들은 극빈자들과 노동자들을 자신의 특성에 맞게 페론주의와 접목시킨 후 정치세력화시켜 군부반란을 통한 페론의 정치적인 패배와 박해를 희망의 깃발로 바꾼 의지의 여성이었다는 평가를 한다. 그런가 하면 지나친 사치와 인기영합으로 아르헨티나 국민성을 망친 '포퓰리즘의 대명사'라고 악평을 하기도 한다.
평가야 어떻든, 그가 설립한 에바 페론 재단(Fundación Eva Perón)은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캠페인의 핵이었다. 이 재단의 활동은 정당이나 노동계, 언론이 배제된 민간 차원의 운동으로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사회운동이었다. 이를 통해 에바의 사회운동은 여성, 청소년, 노인, 병자들을 모두 포괄하는 방향으로 계속 범위를 넓혀 나가 아르헨 최초의 대중운동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아르헨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희망이었던 에바는 지난 50년대 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전세계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에바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두 번씩이나 표지 인물로 선정, 당시의 인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유럽 사교계에 '에바 패션'이 유행할 만큼 상류사회의 유행을 주도해 아르헨 서민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상반된 삶을 누리기도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 지식층들은 에바의 삶이 모순된 것이었고 '성녀를 가장한 야심 많고 허영심 넘치는 정치인'이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오'라는 유언도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에바 지지자들은 " 에바는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페론을 만나기 전부터 아르헨 사교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연예계의 스타였다"고 반박한다. 빼어난 미모와 화술로 잘나가던 사교계 여왕이 퍼스트레이디가 되다 보니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고 유럽의 일류 디자이너들이 '에바 패션' 창조를 위해 앞다투어 물량 공세를 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허영과 사치로 국고를 거덜냈다는 비난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후안 도밍고 페론을 만나기 전 에바의 삶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페론 사후 군부의 페론 업적 말살 및 흔적 지우기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삶이 상당부분 왜곡되고 평가절하 되었다는 것이 아르헨 현지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 비협조적이었으며 패망한 독일 군 수뇌부의 망명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로부터 노골적인 견제를 받다 보니 서방 언론들 역시 이들에 대해 부정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대중 속에 '페론주의'의 영향력이 아직도 강력하게 살아 남아 있는 아르헨 현지에서 에바가 사후에 더욱 각광 받는 건 페론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에바는 정치적으로 매장될 뻔한 페론을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 쿠데타에 의해 스페인으로 쫓겨간 페론을 곤경에서 구하고 대통령 3선을 이룩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저 페론의 대통령 재임 시절에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삶을 누리기만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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