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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우상, 레닌의 영웅이었던 사람은?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11>

제 3 장. 히틀러의 우상, 레닌의 영웅

□ 자동차왕 포드

세기의 독재자, 학살자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세기의 범죄자도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농담도 잘 하고 유머러스하여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알랙산더? 나폴레옹? 칭키즈칸? 모두 아닙니다. 바로 헨리포드(Henry Ford, 1863~1947)였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무실에 헨리포드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을 정도입니다. 독일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생산성이 크게 뒤진 상태에서 포드의 경영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세계 최고수준의 공업 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38년 히틀러는 포드에게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합니다.

▲ 히틀러와 포드. 오른쪽 훈장 사진은 히틀러가 포드에게 수여한 최고훈장(Grand Cross of the German Eagle). ⓒ위키피디아

소비에트러시아(소련)도 앞을 다투어 포드주의 시스템을 도입하여 초기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합니다. 당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1917)을 성공했던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모로 위태로웠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유럽의 국가들이 러시아를 봉쇄했고 러시아 내부의 자본가들도 연대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의 군대로 결사 항전하여 이를 물리칩니다. 그러나 구국의 전쟁이 끝나자 바로 이들의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한 일이었지요. 여기저기서 "땅은 우리의 것이지만 빵은 당신들의 것이요, 산림도 우리의 것이지만 목재는 당신들의 것"이라는 등 노동자 농민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옵니다. 이에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과감하게 신경제정책(NEP : New Economic Policy)을 단행합니다.(1)

나아가 레닌은 러시아 이민 미국인의 아들인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 1898∼1990)를 통해 헨리 포드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러시아 최초의 '가제' 브랜드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연 10만대가 넘는 자동차를 생산하게 됩니다. 이것은 러시아 경제의 큰 돌파구가 되었습니다. 레닌은 "전쟁이 끝나고 소련은 거의 시체에 가까웠으나 이제 간신히 지팡이를 집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레닌은 포드의 열광적인 숭배자였고, 그에게 포드는 영웅이었습니다.(2)

이와 같이 세계의 자동차 왕 헨리포드는 당대의 대표적인 거물과 영웅들이 모두 존경한 경영의 성자(聖者)였습니다.

포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업에는 전혀 뜻이 없었습니다. 포드는 아버지의 농장에 대해서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사랑하는 어머니뿐"이었다고 말합니다. 포드는 발명왕 에디슨(Thomas A. Edison, 1847∼1931)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에디슨의 지원 하에 엔진개발에 몰두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여 자동차왕으로 우뚝 섭니다.

1914년 포드는 생산비를 줄이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의 강력한 지도 아래 저 유명한 조립라인(assembly line)을 도입합니다. 이것은 생산의 동시화(synchronization), 부품의 표준화(standardization)로 이어집니다. 이로써 자동차의 가격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동시에 포드는 다른 기업의 2배 이상의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이합집산이 심했는데 높은 임금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이탈이 없어지고 숙련공들이 증가하여 생산성(productivity)이 오히려 크게 향상됩니다. 1918년에 이르러 미국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 자동차라고 합니다.

바로 '중산층의 나라', '자동차의 나라 미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끈 리더가 바로 포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드 이전의 미국과 포드 이후의 미국은 서로 상상하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이것이 포드의 성공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제가 굳이 여기에 소개할 정도는 아닙니다. 포드는 여러분이 아시는 단순히 성공한 경영자가 아니라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보다도 더 위대한 경영의 스승이었고, 사회 사상가였습니다. 세계 그 어느 위대한 사상가도 포드가 행한 만큼 할 수가 없고, 사회주의 자본주의 할 것 없이 그 어떤 사상가의 이론도 포드의 경영이론만큼 앞을 다투어 도입하려고 했던 사례는 없었습니다.

(1) 사상가 헨리 포드(Henry Ford)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포드주의 즉 포디즘(Fordism)을 말하는 것이죠? 이해가 안 되십니까?

포드는 조립라인(assembly line)으로 대량생산을 달성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노동생산성(productivity of Labor)을 극대화하여 노동자에게 고임금을 지급함으로써 광범위한 중산층을 만들고 당시 최고가품인 자동차를 값싸게 공급하여 대중화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전후 자본주의의 가공할만한 성장과 풍요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물론 이후의 자본주의는 자원의 낭비와 수요의 부족이라는 다른 문제가 나타나서 상당한 기간의 조정기를 거치고 있기는 합니다). 이를 보면 확실히 포드주의(Fordism)는 자본주의의 하드웨어(hardware)임이 분명합니다.


▲ 포드의 조립라인(1913)과 현대의 조립라인. ⓒ위키피디아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는 그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이나 상부구조를 지탱하는 거대한 하부구조는 바로 포드주의(Fordism)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소프트웨어(S/W)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포드주의라는 하드웨어(H/W)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포드주의는 단순한 하드웨어만은 아닙니다. 포드는 원대한 비전(vis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지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의 건설이라는 것입니다. 포드는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임금은 다른 회사의 두 배로 올리는 혁명적인 기업경영을 합니다. 당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세력이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죠. 그가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극심한 비난 속에서도 노동자들에게 고임금을 지급한 것도 바로 복지 자본주의 즉 복지국가의 건설의 엔진이 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여 이룩한 엄청난 기업이윤을 노동자들과 함께 나눔으로써(profit-sharing), 그는 미국이 중산층의 나라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직원들의 사생활도 건전하게 하기를 요구합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사생활 침해'의 논란이 불가피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근무 후 음주, 도박 등에 월급을 탕진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포드는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파괴는 결국 회사의 파괴로 이어지고 그것은 바로 생산성의 파괴로 이어지고 결국 국가체제의 위기로 귀결됩니다. 포드가 직원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개입을 한 것은 그가 단순히 간섭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죠. 자기가 생각할 때,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었던 것이죠.

이런 점에서 포드는 노조(Labor Unions)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좋은 동기보다는 일부 지도자들의 정치적 욕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물론 이 같은 그의 생각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요소가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포드는 당시의 노조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되어 사회를 위기로 몰고 간다고 확고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이 대안일 수가 없다고 그는 믿었죠.

▲ 헨리 포드(왼쪽)와 에디슨(오른쪽) ⓒ위키피디아

포드는 현재의 사회를 조금 손질하면 얼마든지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데 굳이 혁명을 노래하는 것은 옳은 행위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포드는 전쟁이나 혁명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포드는 당시 역사적으로 아직은 미성숙한 미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전세계에 구현해갑니다. 이 점을 대부분의 경제∙경영학자들은 너무 간과하고 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세상이었죠. 영국적이거나 프랑스적인 것이 '선진화'의 상징이었죠. 당시 미국은 스스로도 세상을 경륜할 만한 능력을 가진 나라라는 인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1차 대전 이후 쇠락한 영국을 대신할 것을 종용받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를 앞서 '포드주의'가 세계의 생산과 경영방식을 주도합니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자들도 포드주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후 나타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이전에 이미 하드웨어로서 이미 세계를 주도한 것이 포드주의라는 것입니다. 포드주의(Fordism)는 바로 성공적인 아메리카니즘의 본질(the essence of successful Americanism)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포드는 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수호자(patronus)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제2차 대전 후 엄청난 풍요를 구가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위대한 설계자가 바로 포드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포드는 위대한 사회사상가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에 이미 포드에 의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포드는 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건설자였던 셈이죠.

나아가 포드는 세계평화라는 원대한 비전(global vis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 평화의 열쇠는 바로 고도 소비사회의 건설로 파악한 듯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수호자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합니다. 하나는 포드의 생산방식을 전세계에 수출함으로써 전세계적인 생산성 향상 및 임금 인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국제교역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포드의 생각은 세계 평화가 국제교역의 확대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드의 경영사상을 흔히 포디즘(Fordism)이라고 합니다. 여러 면에서 포드는 모범적인 사업가이자 경영혁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은 이런 기업가들 때문에 기업가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문화가 형성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포드가 주로 활동한 시기는 세계적으로 계급갈등이 가장 심했던 1900년대 초반입니다. 그는 기업을 자본가의 영리추구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서비스 기관으로 간주합니다. 즉 기업은 사회적 봉사가 원천적인 목적이며 영리추구는 그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인 테일러가 단지 노동자들의 과학적 관리(scientific management)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는 총체적인 생산과정 전반을 재조직화(reorganization)한 사람입니다.

포드는 생산의 표준화(standardization)와 동시관리기법(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 효율을 극대화 시킵니다. 그는 당시의 극심한 계급 갈등을 표준화·동시관리 →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 단위당 가격 하락 → 노동생산성(productivity of Labor) 증가 → 저렴한 가격의 상품 공급으로 국민후생(welfare)의 증대 → 기업 이윤(profit)의 증대 → 노동 임금(wage)의 증대 → 계급갈등의 해소 등의 일련이 과정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는 모든 미국 가정에 자동차 한 대씩 공급하려는 사명감을 가졌습니다(a car in every home in America). 이 같은 그의 생각은 계급 갈등 해소는 물론이고 국민적인 복리증진 이라는 두 마리 토기를 동시에 잡는 효과를 가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포디즘의 영향으로 자본주의는 큰 성공을 거두는 듯합니다. 그러나 포디즘은 인간을 지나치게 기계화(mechanization)시키고 한 라인이 멈추면 전체 라인이 중단될 뿐만 아니라 수요의 변화에 따른 생산라인의 교체가 힘든 문제점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났습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대량생산은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판매할 시장이 항상 부족한 상태가 되는 문제를 심화시켰습니다. 대량생산으로 경제는 성장하는 듯이 보이지만 부족한 수요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뇌관(雷管, detonator)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죠. 그것이 경제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경제대공황 당시 실업자들의 행렬. (캐나다 토론토, 1930년) 피켓에 "우리는 일시체류자가 아니라 시민이 되고 싶다"고 쓰여 있다. ⓒ위키피디아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한 이가 바로 케인즈(Keynse, 원 발음은 [킨즈]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케인즈로 부르고 있어 주의)입니다. 케인즈는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공산주의나 다른 어떤 체제보다는 나은 경제체제라고 확신하면서 정부가 나서서 자본주의를 통제하면 대량생산 체제가 가진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포디즘의 바탕 하에서 정부가 정부지출(government expenditure)을 통하여 경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자본주의는 다시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적어도 미국이 베트남전쟁(Vietnam War)을 일으키고 위대한 사회건설(Great Society Initiative, 존슨 대통령 시대의 미국의 전국가적인 대규모 복지프로젝트)로 경제가 곤두박질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세계를 이끌어 가던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군수공업이 산업을 주도함에 따라 민수(민간) 산업이 약화되어 극심한 무역적자가 발생했고 위대한 사회건설이라는 야심 찬 사회복지정책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재정적자를 가속화하여 미국이 주도하던 세계경제에 큰 균열을 초래하면서 1980년대 미국은 나락(奈落)으로 빠지게 됩니다. 1990년대 초반 인터넷(Internet)과 IT로 화려하게 부활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2) 제2차 산업 분화(Second industrial divide)

케인즈는 포디즘의 문제들을 정부개입을 통해 해결하였지만 그것이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에 주로 거론되고 있는 케인즈식의 복지국가(welfare state)란 좀 많이 어려운 전문용어로 하면,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극심한 갈등의 교착상태의 정치적 표현(the political expression of a stalemate between bourgeoisie and the working clas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많이 어렵지만 매우 정확한 표현입니다.

케인즈 혁명이 한계에 도달하자 다시 포디즘의 위기가 나타나고 이것은 곧바로 세계 체제(자본주의)의 위기로 나타납니다. 포디즘은 자동차 생산과 같이 대규모로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막대한 비용의 설치비가 들어가고 일단 설치된 생산라인은 변경이 매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매우 경직된 생산라인입니다. 생산라인의 경직성(硬直性)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마치 과거 근대 초기의 다양한 수공업 체제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다양한 생산라인의 확보가 필요합니다. 산업조직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

세이블과 피오레(Sable & Piore)는 주저인 『제2차 산업분화(Second Industrial Divide, 1984)』에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특징을 대량생산[mass production : 포디즘(Fordism)]과 개별 국민국가(single nation)이라고 보고, 대량생산 체제 하에서도 견고하게 존재하는 중소기업의 존재를 보면서 산업적 이원주의(industrial dualism)의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일본과 독일 등 신흥 강국들의 생산체제가 포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미국의 생산체제[mass production]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들 나라들의 생산체제는 기존 수공업적 생산방식과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체계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제도, 관습, 사회적 규범(norm) 등의 지역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3) 대량생산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 보완하는 것으로 현대적인 수공업 생산(modern craft production)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한 것이죠. 이것이 유명한 유연전문화(flexible specialization) 생산체제입니다.

세이블과 피오레는 포디즘으로 야기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유연전문화에 접근합니다. 그들은 당시의 포디즘의 위기는 정부 개입의 축소나 경제정책을 통한 시장기능의 회복으로 극복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나아가 그들은 새로운 유연전문화 생산체제가 사회의 상부구조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시기의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광범위한 화해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을 복지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 또는 복지국가(welfare stat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이블과 피오레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한 산업의 번영은 그 노동자들의 번영과 밀접히 관련되어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성(productivity)이 노동자와 경영자들 사이에 협력을 통해서 증진될 수 있다는 생각들을 경영자들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세이블과 피오레는 케인즈식 자본주의는 문제가 있으며 경제에 있어서 정부의 정치적 개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부는 개입을 자제하라고 주장합니다.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다만 표준화( standardization)에 경도되어 대량생산(mass production)을 기초로 한 산업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의 한계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소득의 흐름(the flow of income)과 권력의 분배(distribution of power)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산업기술의 선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기술을 선택하는 가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향방이 달라지는 것이죠.

세이블과 피오레는 첫 번째 산업적 분화(industrial divide)는 19세기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두 번 째 산업적 분화는 1980년대를 전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발전을 추론해 볼 때, 경제는 기본적으로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지만, 경제를 조절할 수 있는 각종 기구나 조직들이 광범위하게 확대됩니다. 그리고 선진국(developed countries)과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ies) 사이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면서 기존의 확립된 생산기술로부터 1차 산업분리의 대상이었던 수공업적인 생산방식으로 방향을 재조정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이블과 피오레는 제 2차 산업분리(Second industrial divid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3) 제3 이탈리아 모델

유연전문화(flexible specialization)는 효력을 발휘하여 정부가 지역기업들과 서로 협동하고 화합하여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대응한다거나 경영자와 노동조합이 경영권을 공유함으로써 시장의 수요변화에 대응하는 형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지역에서 유연 전문화의 성공모델이 나타납니다.

이 지역은 중세부터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소규모 생산자들의 협동조합이 발달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수의 능력 있고 특색 있는 작은 기업들이 과거의 지식과 경험들을 축적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죠. 이들 기업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하여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 협동조합은 대기업과의 협상이나 마케팅, 생산조정 등 여러 업무들을 대행함으로서 변화된 사정에 발 빠르게 대응합니다. 이를 두고 제 3 이탈리아 모델(The Third Italy model)이라고 합니다.(4)

제 3 이탈리아 모델은 지역 경제의 대표적인 성공모델임은 분명해보이지만 우리가 찾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조가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차라리 이 모델은 현대에 나타나는 각종 산업 클러스터(Cluster) 모델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5) 다만 포디즘을 서서히 지양하면서 다양한 소비자들의 수요를 맞추는 방향으로 산업기술들이 조정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특히 미래 산업인 IT 분야에서 이 같은 경향은 두드러진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은 고도로 슬림(slim)화되면서 커스티미제이션(Customization : 개별적인 고객의 수요에 다양하게 대응하는 것)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기업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운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조업(manufacturing industries)이 산업을 선도하던 시기에는 포디즘 이외의 대안은 없을 것입니다. 제조업은 일반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해 많은 설비와 많은 노동력, 그리고 그 노동력을 관리하기 위해 또 많은 전문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민경제 전체로 본다면 고용창출의 효과가 매우 큽니다. 즉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쉽게 줄 수 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보면 제조업이 건실하면 사회는 안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조업은 노동의 가격 즉 임금(wage)에 따라서 경쟁력이 좌우될 수 있습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경향이 강화됨에 따라서 제조업들은 고임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기업을 유지하려면 제품의 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경쟁력은 간단히 말하면 "싸고 품질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품질 문제를 일단 제외하면, 문제는 가격이 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지 선진국화되면서 임금이 높아지는데 이 임금이 높아지는 압력을 기업들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발달할수록, 노조가 강화될수록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임금은 상승하게 되고 기업은 더욱 경쟁력이 약화됩니다. 물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기업가들이 자기의 이윤을 포기하고 고임금을 감내하면 되지만 세상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사시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기업가들의 투자의지를 급격히 감소시키게 됨으로써 차라리 해외 투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유연전문화 생산체제를 제시한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과 같은 곳에서는 충분히 검토해 볼만 했고 많은 형태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고용률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노사간의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다양한 시장 수요를 충족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이 사이가 좋아지려고 하니 그들의 사랑과 밀월(honey moon)이 의미 없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사이좋게 지내든 말든 관심을 끊은 지 오랩니다. 왜냐하면 현대 세계경제의 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화해와 협력의 문제가 아니라 취업 자체가 안 되는 광범위한 실업자, 불완전 취업자, 궁핍화 성장의 희생자들, 빈민, 소외계층들과 각종 루저(Loser)들의 존재에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세이블과 피오레의 분석은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일부의 변화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포디즘의 그늘에도 명맥을 유지한 많은 기업들의 존재가 포디즘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alternative)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틈새시장에서 숨죽이며 생존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포디즘 이후의 세계를 다시 좀 더 정교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필자주석

1. 소비에트형 경제조직(Soviet type economic system)은 역사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치고 형성된 것이다. 자본주의가 미성숙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상반된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를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the weakest link in the capitalist chain)"이라 규정하고, 볼셰비키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후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산업의 국유화, 화폐제도와 개인 상거래 폐지, 노동자 계급의 군대화, 평등 임금제와 농산물 배급제 실시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던 1918년부터 1921년까지를 소련역사에서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소련은 소련영토의 1/3이 볼셰비키의 적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현실적 상황에 굴복하여 1921년 레닌은 전시공산주의의 원칙을 후퇴시키고, 자유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신경제정책(NEP : New Economic Policy)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공상당과 농민간의 갈등도 해소되고 경제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1924년 레닌이 죽고 1920년대 후반에 에 들어서 소련의 경제정책에 관한 일대 논쟁을 거쳐 NEP는 폐기되고 1928년부터 소위 '스탈린주의'에 의한 억압과 명령을 특징으로 하는 '계획경제'가 구축되었다. 그 후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의 경제조직은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소위 '스탈린주의 모형(Stalinist model)'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구축되었다.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NEP 포기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① 당면한 위기 모면의 일시조치에 불과, ② 공산당과 적대관계에 있던 부농(富農)과 사상인(私商人 Nepman)의 제거, ③ NEP기간 중 농업부문의 급속한 성장으로 1923년 말부터 협상가격차(scissors crisis)가 커지는 등 시장통제의 필요성이 제기, ④ NEP는 소련의 경제적 낙후를 벗어날 수 있는 급속한 공업화 추진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 등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Paul R. Gregory & Robert C. Stuart, Soviet Economic Structure and Performance, (New York : Harper & Row, 1981), pp52∼55 를 보라.

2. 베르나르 앙리 레비(Bernard-Henri Levi)『그럼에도 나는 좌파다』(프로네시스, 2008) 279쪽.

3. Piore and Sable, The Second Industrial Divide, (Basic Books, 1984).

4. John Agnew, Michael Shin, Paul Richardson "The Saga of the 'Second industrial divide' and the history of the 'third Italy': Evidence from export data", Scottish Geographical Journal Vol. 121 No.1 pp83~101 2005.

5. 산업 클러스터(cluster)란 일정지역에 어떤 산업과 상호 연관관계가 있는 기업과 기관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는 '산업 집적지역'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실리콘밸리, 포항 지역의 철강 단지, 이탈리아 북부의 섬유단지 등이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공업단지(공단)와는 다르다. 즉 공단은 단순한 기업의 집단 입주지로 입주한 기업들 간의 연관성이 낮고, 비용절감을 주목적으로 형성되어 입주 업체 들 사이에 나타나는 시너지효과가 적은 반면, 클러스터는 비슷한 산업 관련 기업들과 각종 (정부 또는 비정부) 기관들이 네트워크(network)를 구축, 정보 교류 상호협력체계 구축 등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 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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