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27년 서른다섯에 요절한 천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는 그의 작품 <라쇼몽(羅生門)>을 비롯한 단편들과, 그의 이름을 따 만든 "아쿠다가와 문학상"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입니다.
그의 "라쇼몽"과 "덤불 속"이라는 글 두 편을 하나로 묶어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의 영화 <라쇼몽>은 영화사의 고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근대적 전환기에 등장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문학은 격렬한 변화 앞에서 사라져가는 막부시대의 풍경과, 기아(饑餓)의 와중 그리고 닥쳐오는 새로운 삶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진실한 것인지, 일본적 욕망과 풍습, 그리고 윤리 등을 하나로 뒤섞어 신랄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숲 속에서 벌어진 강간과 살인 사건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른 시선을 등장시킨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1950년에 나왔는데, 이 역시 패전 이후 미국의 점령시대를 거치면서 혼란의 시간을 보냈던 일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시선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인생과 역사에 대한 질문,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삶과 죽음들의 현실은 문 앞에서도 출구를 찾지 못한 이들의 고통입니다.
재앙이 덮쳤을 때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다만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이 던진 질문만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입니다. 그의 작품에 도둑들의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본래 도둑이 아니라 시대가 달라지면서 억울하게 몰락한 이들의 형편과 관련이 있는데, 그건 그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일 이런 현실을 담아내는 문학이 없다면, 철학이 종적을 감춘다면, 그리고 정치가 이를 감당하지 않고 딴 곳만 계속 쳐다보고 있다면 우린 라쇼몽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비가 그친다고 해서 딱히 어떤 돌파구가 있는 것도 아닌 처지가 될 도 모릅니다. 결국 그 작품의 주인공처럼 시신 사이에서 죽은 자의 머리카락을 훔치고 있는 처참한 노파의 옷을 벗겨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결국 모두가 생존의 칼날 앞에서 짐승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수도 교토의 중앙에 있던 대문 "라쇼몽"은 더 이상 헤이안이라는 말 그대로 별로 평안하지 않는 자리로 전락하고, 세상은 도둑의 천지로 변하는 겁니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겨우 스물셋에 쓴 작품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신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문학의 세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를 비롯한 다른 문화적 매체가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학이 가진 힘은 이 모두를 떠받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은 독자의 외면과 세상의 다른 관심에 의해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질문들을 달가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일깨웠던 것이 이미 30년 전입니다.
우리의 정신사적 풍토가 날로 가벼워지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사회적 논쟁도 무력해지고 있습니다. 우린 어느새 비오는 날 라쇼몽 아래 서 홀로 있는 자들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새로운 질문과 깊은 대화가 절실해지는 시대입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