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지방선거에서 처음 시행됐던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선거 결과 유권자들이 정당만 보고 찍는 '일렬투표' 행태를 보여 풀뿌리 일꾼을 뽑는 기초의원 선거에는 정당공천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치권에서도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을 폐지하는 선거법 개정이 추진될 전망이다.
"중앙정치가 지방정치 장악"…정당공천제 폐지법안 제출 계획
열린우리당 이상민 의원은 11일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선거의 경우 정당공천을 배제하고 당적 보유자는 출마할 수 없도록 해 정당이 개입할 수 없게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초의원에까지 정당공천제가 도입되면서 공천권을 지닌 중앙정치가 지방정치를 장악했고 공천을 둘러싼 비리도 심화됐다는 것이 이 의원의 주장이다. 이 의원은 "지역 이슈는 사라진 채 중앙정치의 바람에 의해 결과가 좌우되는 등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기초의원 선거구제도 소선거구제로 환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중선거구제를 도입해본 결과 소선거구제에 비해 선거비용이 더 들 뿐 아니라 좁은 지역 내 '소지역주의'를 심화시켜 이웃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경향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넓어진 선거구가 광역의원 선거구와 엇비슷해져 광역의회와 기초의회의 활동범위가 중첩되고 모호해지는 등 여러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다.
이에 이 의원은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정당공천제 폐지에 공감하고 있으며 곧 공청회 등을 통해 공론화 과정을 거쳐 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 측은 "일단은 개인 차원에서 입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지방선거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은 "지방선거 직후 정치개혁특위를 열어 정당공천제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어 당 차원에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과 국민중심당도 폐지에 찬성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을 받은 당선자들 사이에도 정당공천제 폐지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조선일보>가 전국 기초단체장 당선자 230명 가운데 221명(96.1%)을 대상으로 실시해 12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국 기초자치단체장(시·군·구청장)의 85.1%가 기초의원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한 번 해보고 또 개정?","지역유지만의 리그 돼"…반론도
그러나 정당공천제를 유지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 지방자치위원장인 심재엽 의원은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지방선거 이후 정당공천제를 따로 논의해 본 적은 없지만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심 의원은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과의 관계를 정부와 국회의원의 관계로 놓고 보자면 단체장과 의원의 정당공천은 연동돼야 한다"며 "정당의 책임정치를 위해 기초단체장의 공천제를 도입한 만큼 의회 역시 정당에 따라 구성돼야 협력과 견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8월 이재오 원내대표는 기초의원 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환원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정당공천제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정당 지지율에 상응하는 의석배분을 위해 정당명부 비례대표 확대를 주장하는 민노당으로서도 정당공천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에 민노당 박용진 대변인은 "정당공천제도가 없었을 때에도 사실상 각 정당의 내락을 받아 출마하는 '내천'이 횡행했고 이는 오히려 투명성을 떨어뜨리고 지방선거를 지역유지들 간의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시켰다"며 "일부 단점도 있지만 책임정치라는 측면에서 정당공천을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실련·환경운동연합 "폐지운동 나서겠다"
시민단체 측은 정당공천제의 폐단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폐지 여부를 두고는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경실련은 "기초의원의 정당공천 확대는 유권자보다 국회의원에 잘 보여야 하고 기초의원까지 이어지는 독점적 지배적 정당구도의 형성으로 유권자가 아닌 정당에 충성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며, 환경운동연합은 "동네 일꾼인 기초의원이 유권자보다 국회의원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는 현실이 되면서 지방자치에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개발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며 연대를 통한 폐지 운동에 나설 뜻을 보였다.
그러나 참여연대는 공식적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관계자는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만 지방선거에서 노정된 여러 문제 중 정당공천제 만이 유일한 문제인 양 결론지어지는 것은 순서에 맞지 않다고 본다"며 "폐지냐 아니냐는 공식적인 입장을 먼저 내기 전에 지방선거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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