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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후원으로 동포노인 지원, 사회봉사엔 국경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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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인 후원으로 동포노인 지원, 사회봉사엔 국경이 없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07] 공생복지재단 윤기 명예회장

전남 목포 유달산 아래에는 공생원이라는 아동복지시설이 있습니다. 1928년에 문을 연 이래 78년간 3,700여명의 원생을 배출했는데요

현재, 공생원은 한국의 목포와 서울, 제주는 물론 오사카와 교토, 고베 등 일본까지 확대해서 재일동포 고령자를 위한 복지시설을 마련하는 등 한일간의 복지활동 교류에도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생복지재단의 윤기 명예회장은 최근 이같은 공로로 호암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했는데요

37년간 고아들의 아버지로 살아왔던 윤기 명예회장...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공생복지재단 윤기 명예회장을 만나봅니다.

젊은 나이에 그를 공생원에 머물게 했던 공생원의 설립자이자 부친 고 윤치호 선생과 일본인 어머니 윤학자 여사의 헌신적인 봉사활동 얘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재외동포 고령자를 위해 복지시설을 마련하게 된 배경을 들어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공생복지재단 윤기 명예회장입니다.

윤기명예회장은 국내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인 공생원을 설립한 윤치호씨의 장남으로 1942년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1966년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한 이후 26살의 젊은 나이로 공생원 원장이 되면서, 고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1977년에는 국내최초로 고아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직업훈련학교인 서울시립소년소녀직업훈련원을 설립했고, 재활원, 장애인요양원등을 운영하다가, 1982년부터는 일본에 공생복지재단을 설립해, 재일동포를 위한 복지활동을 시작했고 1988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을 설립해 재일동포 고령자들의 안식처인 <고향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37년간 사회복지활동을 펴온 윤기명예회장은 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 재일코리아 고령자 생활지원 네트워크 하나 공동대표, 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최근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습니다.

윤기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우선 호암상 수상을 축하드리구요, 물론 상받기 위해서 봉사하신 건 아니겠지만 상당히 기쁘시겠습니다.

윤기 명예회장 : 예. 받고 보니까 너무나 큰 상이라서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오래 사셔서 이 상을 받았으면 참 좋았겠다.. 하면서 한편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박인규 : 이번 상 받기 이전에도 사회봉사 관련해서 상을 많이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 명예회장 : 제가 좀 상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소파상을 비롯해서 젊은 나이에 국민포상도 받았구요, 일본에서는 마이니치 신문사의 사회복지상, 국제교류기금의 지역교류진흥상, 일본재단의 사회공헌상 등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만, 호암상처럼 이렇게 큰 상을 받아보기는 처음입니다.

박인규 : 상당히 많이 알려진 상이기도 하고, 좀 쑥스러운 얘기긴 하지만 상금도 굉장히 많더라구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97.3MHz)'

윤기 명예회장 : 글쎄요 이번에 제가 상을 받아 보니까.. 여러 사람들의 전화가 와서, 특징이 하나 있더라구요. 큰 상 받아서 축하한다고. 대단히 큰 상인데.. 그래서 큰 상의 의미를 제가 한 번 새겨봤습니다. 제가 공생원 원장을 할 때 320명 아이들의 한 달 생활비가 약 40만원 미만이었는데, 그걸 1년 곱하면 480만원.. 500만원으로 치면, 이번에 받은 상금이 2억이니까 500만원으로 나누면 그 때 당시 생활수준으로 보면 40년간 생활하는 돈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큰 상은 큰 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인규 : 물론 인플레가 있어서 그때와 지금의 돈가치가 다르긴 하겠지만. 그동안 일하신 것에 대한 보답도 될 수 있을 거고. 이번에 받으신 상금은 어떻게 쓰실 생각이십니까?

윤기 명예회장 : 전북 공생복지재단에 기증을...

박인규 : 기증하셨군요. 공생원은 사실 언론에도 보도가 많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1928년이면 거의..

윤기 명예회장 : 제가 항상 가슴 속에 뜨거운 걸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1928년이면 나라도 없고 일제 식민지 시절인데, 돈도 없고 회사도 사회복지법도 없는 상황에서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이들을 데려다 키울 수 있었던가... 그 마음이 말입니다. 항상 아버지에게 질문하면서, 당신은 어째서 그 어려운 시절에 고아들을 데려다 같이 생활하는 시설을 만들었습니까. 그것도 공생원이라는.. 같이 살자는 멋있는 이름을 만들었습니까.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인규 : 1928년이면 윤기회장님도 태어나시기 전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버님인 윤치호 선생께서 공생원을 만들게 됐는지요?

윤기 명예회장 : 아버님은 13세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소년가장이 되셔서,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에서.. 장에 나가서 벼루나 석유나 비누 같은 걸 받아다가 동네에서 파는 일을 했는데.. 마율리아라는 선교사가 그 마을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너의 집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13살 소년가장이었던 윤치호가.. 위로는 누님을 모시고 밑으로는 여동생과 다리가 불편한 남동생을 돌보면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결국에는 그 마율리아 선교사가 신학교를 보내줘서. 피어선 성경대학.. 지금의 평택대학이죠. 거길 졸업하고 목포에 와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 게 그 시초였습니다. 그래서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을 데려가서 밥을 사주고 옷을 입혀주고. 헤어질 때 너희들 집이 어디냐고 물이보니까 다리밑이라고 해서 그 7명의 아이들을 데려와서 같이 생활한 게 공생원의 시작입니다.

박인규 : 그 당시 아버님 나이가 상당히 젊으셨다고..

윤기 명예회장 : 열아홉에 그 일을 시작하셨으니까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을 합니다.

박인규 : 아버님은 그 뒤에 어떻게 되셨습니까?

윤기 명예회장 : 아버님이 그렇게 고군분투를 하다 보니까 도와주는 분들이 필요해서.. 아이들에게 웃음이 없다. 웃음을 만들고 싶다. 음악을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을. 요즘말로 볼룬티어를 일본인 학교에 가서 부탁을 했는데요, 음악선생을 하던 저희 어머니가 공생원에 가서 보니 음악을 가르칠 형편보다는, 바닥은 가마니고 벽은 쓰러져 나가고, 애들이 세수를 했는지 먹을 것이 없고. 저희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딸이고 집안에 여유가 있어서, 집에서 점점 아이들에게 비누, 수건도 갖다 주고 위생적인 생활을 위해서 도와주는 사이에, 저희 아버지가.. 한국사람도 거지들이다 냄새난다며 별로 같이 지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일본여자가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대해주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주신 배필이 아닌가 해서 프로포즈를 했다고 합니다.

박인규 :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의 남성과 일본의 여성이 만나서 한국의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 공생원이라는 걸 하신 거군요. 아버님이 공생원을 만드신 나이가 19살. 상당히 젊으신 나인데, 윤기 회장도 공생원 맡으셨을 때 26살이셨으면 상당히 젊으셨어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맡게 되신 겁니까?

윤기 명예회장 : 아버님의 경우는 본인의 사명으로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저는 일본 동서대학 대학원에 입학한 실정이어서... 제 욕심같아선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6.25때 행방불명돼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전쟁통에 고생하시면서 일본여성으로 3000여명 고아들을 길렀는데. 57세 젊은 나이로 돌아가셔서 그 때 제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자격증 있느냐 경험 있느냐 해서 이사회에서 뽑았을 텐데, 하도 어려운 때라 장남이 해야 된다.. 장남이 해야 된다 해서 할 수 없이 맡아 보니까, 빚 때문에 한달 생활비보다 이자로 나가는 게 더 많고. 생활도 힘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있었던 아이들한테 참 미안한 감이.. 제가 정말 그 애들에게 더 잘 해줬어야 되는데 빚 갚고 공생원 안 쓰러지게 만들다 보니까 참 해준 것들이 없어서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박인규 : 스물여섯 살 나이에 몇백명 되는 고아들을 맡았고, 돈은 거의 없고.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헤쳐 나가셨습니까?

윤기 명예회장 : 아이들이 많이 참아줬구요. 또 공생원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해서 도와줬고. 저는 한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모금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청구서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남에게 부탁하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박인규 : 일본까지 가서 모금활동을 하신 건 어머님이 일본인이시기 때문에 그런 연고로 가신 겁니까?

윤기 명예회장 :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적에 제게 수첩을 하나 줬는데 어려울 때 이 분들을 만나면 도와줄 거다 해서 가게 된 겁니다.

박인규 : 직업학교도 설립하셨죠?

윤기 명예회장 : 제대로 된 잠자리도 없고, 신원보증 재정보증 봐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신세타령을 듣다 보니 참 이 아이들을 자립하게 해줘야겠다. 생각을 해보니까 저희 아버지도 그 어려운 시절에 자립해라. 또 나사렛 목공소 같은 거 만들어서 자립하라고 노력했던 흔적이 있고. 어머니는 6.25 직후에 제주도에 목장을 만들고 목포에 조선소를 만들면서 자립의 중요성의 흔적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이 아이들이 하나의 기술을 가져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해야겠다고 해서 서울소년소녀직업훈련원을 만들고 나서 일본으로 들어간 겁니다.

박인규 : 그게 1977년이고.. 그 당시 만드신 직업훈련이라는 게 국내에서 처음 생긴 겁니까?

윤기 명예회장 : 서울특별시에서 해오던 걸.. 공무원이 해서는 한계가 있다. 사명감 있는 단체에서 맡아 줬으면 좋겠다 해서 한남직업기술보도소와 성북동에 있었던 소년기술원을 같이 인수해서 소년소녀직업훈련원으로 만들어서 오대양육대주에 나가서 일을 하자. 오천년의 가난을 우리들 손끝으로 물리치자. 비록 우리가 정부의 혜택을 받지만 유능한 기술자가 돼서 세금을 낼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 하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박인규 : 일본에 가셔서는 재일동포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됐나요?

윤기 명예회장 : 운명적인 얘긴데요, 일본하면 잘 사는 나라. 재일교포 하면 부자들.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모임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웃으면서, 저 친구 고향 가느라 전당포에서 옷 빌려 입고 갔다고 비웃더라구요. 아.. 재일동포 속에는 금의환향 못하고 자기 고향 찾을 때 전당포에서 옷을 빌려입는 마음아픈 사람도 있구나. 또 좀있다 보니까 재일동포가 돌아가셨는데 13일만에 발견됐다 그래요. 일제때는 나라 없어 끌려가서 고생하고 희생만 당하고. 전후에는 일본재건 복구에 노력을 했는데.... 남들은 돈을 벌어서 서울을 이웃처럼 다니고 있는데, 옆에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이 다다미방에서 혼자 죽어갈 때 저 사람의 인생은 뭐였겠는가. 우리가 흔히 재일동포 하면 한 많은 인생이라고 하는데. 고향산천 생각하면서 부모형제 생각했지 않겠느냐. 과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 이 노인들의 한을 풀어줘야겠다. 적어도 일본땅에서 한국인으로서 한국말을 하고 김치를 먹고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양로원을 만들어 드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 때 윤석중 선생님의 고향땅 노래가 생각나서. 우리 어르신들이 고향의 집에 모여서 고향땅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할까 생각하면서, 일본땅에 한국인양로원을 만들자고 아사히신문 논단에 외쳤더니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이..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소노 아야코라는 사람. 유도선수 야마시타 선수는 올림픽에서 항상 금메달 경쟁할 때는 한국인데 한국선수들 입에서는 김치냄새가 폴폴 나더라. 역시 한국교포들은 나이들면 김치를 먹고 싶어할 거다. 써보냈는데 일본의 오피니언리더들이 전부 참여를 해줘서 130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해서 만들어진 게 고향의 집입니다.

박인규 : 주로 일본인들의 후원을 받아서...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최근 호암재단으로부터 사회복지상을 수상한 공생복지재단 윤기명예회장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말씀 듣고 보니까 윤기회장님의 활동에서는 일본인들이 아주 좋은 역할을 해주는 예가 나타나네요. 그래서 고향의 집을 처음 만드신 게 언젭니까?

윤기 명예회장 : 1989년입니다.

박인규 : 지금 몇 군데 있다고 들었습니다.

윤기 명예회장 : 오사카 사카이시, 오사카시, 고베. 이렇게 세 군데 있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거기서 모실 수 있는, 돌봐드릴 수 있는 재외동포 노인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해요. 몇 분이나 되시죠?

윤기 명예회장 : 한 160여 명 정도 저희들이 모시고 있구요. 재가복지로는 한 1500여명 홈헬퍼를 파견을 해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또 주간보호소에 어린이집처럼 주간에 와서 점심도 드시고 목욕도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저녁때 돌아가시게 하고. 또 남편이 해외출장 가면 부인도 같이 가고 싶잖아요. 그러면 일주일이나 보름, 한달정도.. 단기간 보호해 드리는 서비스도 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노인복지시설을 경영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더니 며느리 복지센터 같은 기분이 들더라구요. 그 며느리들이 휴식할 수 있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어르신을 오래오래 집에서 모실 수 있으니까.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으로 어르신은 정든 집에 오래 살 수 있어서 좋고, 정부에서는 시설이 들어오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되는데 재가하게되면 한 3분의 1정도 경비로 보호해 드릴 수 있으니까 정부 재정에도 도움이 되고. 그래서 재가복지가 앞으로 한국에서도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고향의집에 그냥 상주하는 분들도 계시고, 잠깐 왔다 가는 분들도 계시고, 직접 집에 가서 돌봐드리는 분도 계시고. 저는 궁금한 게 재정.. 이런 건데요, 처음에 주로 일본사람 13000명이 후원금을 내서 시작하셨다고 했는데 지금도 주로 일본인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계십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97.3MHz)'

윤기 명예회장 : 2000년부터는.. 저희가 지금 2008년에 수발보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태까지는 어르신은 가족이 모셔야 된다. 어떻게 자기 부모를 남에게.. 양로원에 맡기느냐 이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70세 딸에 90세 어머니가 되다 보니까 딸이 부모를 모시고 싶어도 70세 딸이 어떻게 스물 네 시간 모시겠습니까. 그 분도 노인이니까. 그래서 노노개호(老老介護)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인이 노인을 보호해야 하는 실정이 되다 보니까, 가정에서 모신다는 게 한계가 있다. 어르신 모시는 걸 사회가 맡아야 된다고 해서 개호보험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아주 좋은 제도인데요, 모든 비용은 10%만 본인부담, 나머지 90%는 보험에서 지불하는 것으로 돼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재일동포 어르신들 생활보호나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에서 그 10%마저 대주고 있기 때문에 거의 부담이 없이 이용할 수 있어서 요즘 재일동포들이 참 좋아합니다.

박인규 : 어머님 말씀을 좀 해주세요. 어머님이 68년도에 돌아가실 때 아마 처음으로 목포시민장으로 치를 정도로 목포시민들이 상당히 존경하고 사랑했던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어떠셨습니까?

윤기 명예회장 :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과 같은 일을 목포시민들이 해주셨다 생각하면서.. 국적보다도 인간이 우선한다는 시민정신을 목포시민들이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를 고아들 안에 같이 넣어서 키울 때..

박인규 : 자신의 자식이라고 특별대우 하지 않고 같이 키우셨군요?

윤기 명예회장 : 누나, 여동생, 남동생도... 왜 친구들 어머니는 내 자식을 챙기는데 우리 어머니는 챙기지 않는가 원망도 많이 했구요. 또 어떻게 보면 손해보는 일만 골라 하시는 것 같아서. 왜 우리 어머니는 일본사람들이 살았던 집 한채도 없고, 그냥 여러 사람들이 오면 미안하다고 고개만 숙이고 큰 소리도 한 번 못 치고 바보같은 인생을 보내는가 해서, 출판사에서 책을 써달라고 해서 '어머니는 바보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내놓고 보니까, 어머니는 바보야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던 게 아닌가. 어머니가 병들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적에 한국말에서 일본말로 변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어느날은 일본말로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 매실장아찌가 드시고 싶다. 그랬을 때, 바보로 생각했던.. 약하게 생각했던 어머니가, 당신이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하기 쉬운 일본말을 참고 한국말을 하면서 김치를 드시면서 남편도 안 계신데 고아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했을 때 저절로 '어머니 죄송했습니다. 제가 불효했습니다.' 하고 눈물이 나오고 어머님 앞에 고개 숙이게 되고. 제가 일본에서 이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일본말로 우메보시가 먹고싶다고 한 것은 고향에 대한 정직한 심정이었다는 거죠. 재일동포들도 비록 일본에 살지만 나이가 들면 김치가 먹고싶다고 한국말로 할 것 아니냐... 하고 일본시민들에게 강조했을 때 모두가 동감을 해주고 과연 그럴 수 있다 하면서, 진실한 생애에 감동을 해서 참여한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입니다.

박인규 : 윤기회장 부인도 일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윤기 명예회장 : 제가 부모님 흉내를 낸 건 아닌데, 공생원 아이들이 바다 저쪽, 섬쪽으로 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손잡고 노래할 적에 고아들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행복에 들떠있을 때. 아이들이 우리를 키워준 어머니 나라에 가요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일본 어머니 고향 지사에게 편지를 하고 일본 항공사에 편지를 했더니 티켓과 초청장을 보내와서 수선화합창단을 인솔하고 일본에 갔을 때 어느 복지시설에서 지금의 저희 집사람을 만나서, 이 사람 같으면 고아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하고 프로포즈를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박인규 : 윤기회장님께서 하신 일을 보니까 물론 어려운 분들을 도우셨지만, 한일간의 민간외교에도 상당히 기여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요즘 사실 독도문제다 뭐다 해서 특히 일본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안 좋은데, 윤기회장이 만나신 일본인들은 다 좋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윤기 명예회장 : 한국이나 일본이나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같은 인간입니다. 진실한 인간애를 갖고 대화를 나누면 이 세상에는 부정적인 사람보다 긍정적인 사람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거창하게 한일관계를 논할 입장은 못 되고. 저는 제가 하고 있는 복지분야에서만은 한일간의 벽을 없애고 인간의 고귀함을 서로 인정해주는..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데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한국의 좋은 걸 일본에 알리는 역할을 하면서 우리가 배워야할 일본의 좋은 제도 같은 게 있으면 받아들여서 정보 교환을 하면서, 모두가 잘 사는 나라 행복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박인규 : 국적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게 굉장히 중요한 거군요. 장애인이나 나이드신 분들에게도 도움을 많이 주시지만,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인간간의 교류에도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윤기 명예회장 : 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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