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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뒤집어 쓴 정치적 신데렐라의 발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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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뒤집어 쓴 정치적 신데렐라의 발바닥

김민웅의 세상읽기 〈237〉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 쓴 아이"입니다. 아궁이 옆에서 지내는 소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몰골이 어떨지는 뻔합니다. 밤낮 일만 강요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인생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방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집에서 그녀가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는 없습니다.
  
  그녀를 온통 뒤덮고 있는 잿더미는 아궁이 속의 불쏘시개가 만들어내는 먼지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다 타서 더 이상 불길을 기대할 수 없는 그녀의 현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에 한 가닥 탈출구가 열립니다. 왕궁의 무도회는 그 나라 처녀들이라면 누구든 초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데렐라가 애초부터 무도회에 나가 왕자의 눈길을 끌어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도회는 젊은 여성이 마음에 맞는 남자와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데렐라는 그 기회를 매우 제한적으로, 그리고 임시로 얻었습니다.
  
  신데렐라의 이야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점인데, 그녀의 화려함이 어느 시간까지만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그 시간을 넘기면, 신데렐라는 다시 재를 뒤집어 쓴 소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시간의 경계선을 넘으면, 신데렐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멸과 천대를 받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신데렐라가 무도회에서 그만 시간이 다 되자 벗겨진 채 놓아두고 나온 구두는 그녀의 진정한 정체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 자신을 감출 수 없는 증거입니다. 신데렐라에게 반한 왕자는 무도회에 초대했던 방식대로 구두의 주인이 어떤 모습과 처지에 있는지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것이, 구두 주인을 확인하는 것은 입고 있는 옷이나 살고 있는 집으로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에 맞는가아닌가를 통해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는 바로 그렇게 발바닥의 현실, 즉 자기 자신 자체로 자신을 입증하는 순간, 재를 뒤집어썼던 소녀에서 왕자의 사랑하는 여인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무도회의 흥겨움에 온통 빠져 있다가, 시간이 다 되었거나 또는 그 시간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잿더미를 쓰고 아궁이 옆에 있다가, 역사의 부름을 받고 무대위에 올라갔지만, 마법의 시간이 다 됐는지도 모르는 채 초라한 행색이 드러나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탄핵 사태 이후 정치적 신데렐라가 된 여당은 오늘날 투표가 임박한 상황에서,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의 모양이 되고 있습니다. 다수당이 되었다는 기쁨에, 무도회의 왈츠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다가 그만 시간을 넘겨 마차는 호박이 되고 마부는 시궁창에 있던 쥐로 돌아가고 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데렐라가 재기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왕자가 손에 들고 있는 구두에 발이 맞는가 아닌가 입니다. 본래의 자기로 돌아와, 잿더미를 쓰고 있어도 구두에 발이 맞으면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겁니다. 무서운 각오로 발바닥의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마도 어떤 구두도 맞지 않게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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