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중국은 변화의 충격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달라지지 않고서는 새로운 미래는 없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느끼기 시작합니다.
잡지 <신청년>을 이끌고 있던 진독수는 변화의 조류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무지몽매의 늪에서 깨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자칫 개인의 깊은 각성과 만나지 않으면 다만 집단적인 광풍(狂風)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는 소수의 욕망을 고고한 명분으로 포장해서 다수를 희생시키는 사태를 가져올 뿐입니다.
혁명은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기회였습니다. 그 기회를 잡은 자들이 무지와 탐욕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혁명은 저들만의 잔치이자 광란의 축제일뿐입니다.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국은 혁명의 기쁨은 잠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은, 어떻게 새롭게 일어서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Q'는 떠돌이 날품팔이였습니다. 미장이라는 곳에서 사방의 천시를 받아가며 살아간 한 중국민중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는 미장의 유력자에게 치도곤을 당하고 몰리고 몰려 기아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절창이라고 할 수 있는 노신의 <아Q정전(阿Q正傳)>, 그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흘러 아Q가 도시에서 미장으로 돌아와 제법 행색을 갖춘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대합니다. 혁명당의 소문과 권세가 그에게서 느껴진 탓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미장 사람들은 눈치 채고, 아Q와 친하게 지내려 합니다. 아Q는 이런 세속의 모습 속에서 혁명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인지 절감합니다.
"다를 땅에 엎드려 말할 것이다, `아Q, 살려줘요.' 누가 그 말을 들어 주나? 제일 먼저 처치할 놈은 아무개이지….서양은화, 옥양목, 가재도구 모두 가져와야지…. 계집은 누구를 고르나?" 이렇게 아Q는 혁명당의 일원으로 자신이 누릴 영화를 꿈꾸고 계산합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어, 그는 혁명권력에 빌붙은 자들보다 못한 처지가 되고, 급기야는 억울하게도 약탈의 주범으로 몰려 총살당하고 맙니다.
아Q의 비극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의 정신현실에 대한 고발이기도 했습니다. 노신은 국민당 정권이 아Q가 장악한 집단이라고 말했습니다. 혁명을 통해 탐욕을 갈망했던 자들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각성하기까지 무수한 아Q가 결국은 그보다 더 악랄한 자들에게 희생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정권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정권 15년, 노신의 <아Q정전>은 지금도 이 땅에서 거듭 새롭게 읽혀져야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식하고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독선적인 권력과 집단은 반성의 기회가 그토록 많이 주어져도 그걸 가볍게 여깁니다. 맞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역사를 탕진합니다. 혁명을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그 중에는, 자기가 저 남루한 복색의 '아Q'였던 때를 잊고 본래부터 권력자였던 것처럼 행세하는 자들도 있어 더욱 가관입니다. 옷을 갈아입었다고 예전의 아Q가 아닌 척 하기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제 버릇 누굴 줄 수 있을까요?
평택 대추리엔 사제들의 삭발한 머리카락이 눈물처럼 땅에 떨어지고, 비정규직의 서러움으로 절규하는 젊은 여성들이 몸부림쳐도 정부와 한때의 혁명가들은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습니다. 혁명당의 아Q에게는 달리 해야 할 일이 많은가 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에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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