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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에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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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에 바치는 헌사"

김민웅의 세상읽기 〈233〉

1871년의 파리 코뮨이 이랬을까요? 광포(狂暴)한 권력에 저항했던 시민들은 핏빛 꽃잎으로 떨어져갔습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쿠데타 사상을 몸에 익힌 자들의 반역으로 1980년 광주의 5월은 순간 연옥(煉獄)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주는 외딴 섬이 되어 폭력의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말은 쓸 때가 따로 있는 법입니다. 그건, 우리 모두의 무력감 속에서 태어난 현실입니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귀를 유순하게 대하는 것은, 본래 마귀가 살던 지옥으로 그 마귀를 돌려보내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광주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마귀는 내부에도 있었고 외부에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총칼이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겉모습은 국가안보였습니다. 이들의 무기는 분단이었습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우리의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키워 온 것은 우리의 굴종이었습니다.
  
  쿠데타의 사상으로 뭉친 이 자들의 광주 습격사건은 그러나 치열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이걸 제압하지 못하면 마귀들의 천지가 될 수 없다는 공포가 다급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모든 패악한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머리숱이 별로 없는 두목이 명령을 내리면, 머리숱이 그보다 많은 졸개들은 명령 이상의 것을 실행했습니다.
  
  광주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고립무원은 점차 역사의 중심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도움이 어디서 올꼬?" 했던 탄식은, "여기서 우리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진다"라는 결의로 성숙해져갔습니다.
  
  광주를 벗어나면 도리어 감옥이었습니다. 광주는 감옥을 부순 자리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광주는 그 본연의 "빛 고을"의 진상을 드러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의 패색은 짙어졌습니다. 애초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총칼의 종교를 평화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광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악한 자들에게 승리는 돌아갔습니다. 역사는 침묵했고 "신 새벽 뒷골목에서 너의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라고 우리는 아는 이들끼리 눈빛으로만 암호를 교환했습니다.
  
  아, 하지만 역사는 무자비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뜻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광주는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겨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봄을 잉태하는 과정을 겪어냈던 것입니다. 칼로 일어선 자들의 승전가는 도리어 이들이 저지른 죄의,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승패는 바뀌고, 무도한 반역자들은 마침내 쫓겨났습니다.
  
  태양이 결코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여명(黎明)의 깃발은 나부끼고, 죽은 자도 무덤에서 일어나 산 자와 춤을 추는 날이 결국 오고 말았습니다.
  
  혁명을 배반한 자들은 역사가 그 이름에 수치의 낙인을 찍을 것이며, 무명의 민주용사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광주는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에, 꺼지지 않는 봉화불이 되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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