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우리는 울라간 라이온의 수도 울라간(1227m, N50°37'162", E87°55'674")에 도착했다. 고르노-알타이스크에서 411km 지점, 악따쉬에서 56km 지점인 이 마을에 오면 우리는 이미 빠지릭에 거의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한 눈에 참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원과 이깔나무가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바쉬까우스강 가 낮은 언덕에 여유 있게 서있는 집들이 마치 알프스의 한 마을에 온 것 같다.
실제로 모스크바, 노보시비르스크 같은 큰 도시에서 온 돈 많은 사람들이 여름철을 보내는 곳이라고 한다. 잠시 차에서 내려 마을 구경을 하며 보니 생각보다 큰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맑은 날씨라 그런지 거리로 나와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마을 분위기는 아주 활기차고 화사하기까지 했다. 마을 빈 운동장에는 사람들 대신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인구 2만5000명인 이 도시는 빠지릭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이 도시에는 알타이-텔렌기트인들이 살고 있다. 울라간에는 크지 않은 향토지박물관이 있는데 텔렌기트인들 전통, 문화, 언어에 관한 자료, 추이스키 대로의 역사에 대한 자료, 빠지릭인들의 꾸르간(무덤)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울라간에는 민요와 민속춤을 전문으로 하는 음악 앙상블이 있다. 그들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알타이의 다른 마을로 공연을 가기도 한다. 최근 울라간에서 가까운 바쉬까우스 강변에 작은 어린이야영장이 세워졌다.
울라간을 벗어나서도 아스팔트길은 이어지지만 조금 지나면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울라간을 지나면서부터 꾸르간이 몇 기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다음 마을인 발릑뚜율(Balyktuyul)까지는 16㎞, 우리는 발릑뚜율에 도착하기 전에 오른쪽으로 빠져 강을 따라 나 있는 작은 길로 들어선다(1227m, N50°37'162", E87°55'674").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니 갖가지 꽃으로 가득 찬 꽃밭을 지난다.
우리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차를 멈추고 한참동안 꽃을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인간이 만든 꽃밭과는 다르게 자연이 만든 꽃밭은 풀들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어 좋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빛깔들을, 코로는 내뿜는 향기를, 귀로는 벌과 풀벌레의 소리를, 그리고 온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는 벅찬 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마치 소풍을 온 것처럼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스키타이에서 가장 동쪽의 빠지릭문화
꽃밭에서 조금 가니 대형 꾸르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치 개인 농장을 들어가듯 울타리가 쳐져 있고 문이 닫혀 있다. 플루스닌 교수가 주인을 찾지도 않고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더니 그대로 입성한다. 울타리를 들어서니 바로 커다란 목장이 나오고 이 목장은 그야말로 빠지릭시대의 무덤터라고 할 만큼 꾸르간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집이 한 채 있는데 아마 이 목장의 주인이 사는 곳으로 보인다.
이어서 울타리가 대형 꾸르간의 위로 지나간다. 이 꾸르간이 대형 꾸르간 가운데는 유일하게 발굴이 안 된 것이라고 한다. 바로 왼쪽에 다시 대형 꾸르간이 있는데 발발(선돌)이 아주 잘 남아 있다. 최종 목표가 가까웠으니 돌아오면서 자세히 보기로 하고 계속 달린다. 대형 꾸르간 가운데는 큰 나무들이 하나씩 서 있는 것이 특이하게 눈에 띈다. 목장이 끝나는 지점에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그 언덕을 올라 산 위를 오르니 다시 넓은 숲속의 초원이 이어지고 그곳에 대형 꾸르간 5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그 유명한 빠지릭이다.
지금까지 우코크의 빠지릭문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빠지릭과 스키타이를 섞어서 쓴 때가 많았다. 이제 빠지릭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지 전에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빠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의 한 가지다. 다시 말해 빠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키타이문화란 무엇인가.
스키타이 문화는 BC 7세기에서 BC 3세기에 걸쳐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기마 유목민족의 문화를 말한다. 유라시아 내륙의 광대한 초원지대에서 활동했던 세계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의 문화를 통틀어 말하기도 하고, 흑해 북쪽 연안 일대에 예부터 살고 있던 특정 민족의 문화라고도 한다.
스키타이는 그들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다만 그리스인이 스키타이, 페르시아인은 사카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 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키메리아인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 국가를 건설하였고, BC 4세기에 돈강에서 온 사르마티아인에게 쫓겨 서방으로 옮겼다. BC 3세기에는 사르마티아인의 압박으로 세력을 잃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주요 유적은 크림 반도와 드네프르강 ·돈강 하류지역, 흑해 북쪽 기슭, 서쪽으로 다뉴브강 남부, 동쪽으로 카프카스산(山)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스키타이 문화유적의 발굴이 18세기부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많은 꾸르간(무덤)과 삶터(취락지)에서 금은제의 화려한 출토품이 발굴되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알타이산맥 주변의 유적들이 가장 동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알타이의 빠지릭(파지리크), 뚜엑따(투에크타), 카자흐스탄의 바시다르, 몽골의 시글리-비지 같은 발굴지는 사실상 모두 알타이산맥의 언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고학으로 본 스키타이문화의 특색은 ①아키나케스형의 검, 세 날개식 청동 화살촉, 도끼·던지는 창·화살통 같은 무기 ②재갈 같은 말갖춤(馬具) ③ 동물무늬 같은 장식미술이라고 한다. 이들 문화적 요소의 성립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BC 4세기에 스키타이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날카롭고 용맹한 유목민족으로 소가 끄는 천막집에서 생활했으며, 소유한 말의 숫자로 부(富)를 결정했다. 청동제의 갑옷과 투구, 미늘로 된 갑옷 속옷을 입었으며, 단검·활·화살로 경쾌한 기동력을 갖춘 기병대로 강적(强敵) 페르시아인을 괴롭히는 뛰어난 전술을 자랑했다. 드네프르강 하류 니코폴 근방이 스키타이 왕국의 정치 ·경제 중심지였으며, 흑해 북쪽 연안 지역 그리스 식민지에서 가축 ·곡물 ·모피 ·노예 등을 도기 ·직물 ·금속제품 ·기름 등과 교환하는 광범한 통상으로 부유한 계층이 성립되었다. 귀족층에서는 딸려묻음(殉葬)이 행해져 여자 ·노예 ·말 들을 함께 묻은 장대한 꾸르간을 만들었다. 이들 꾸르간에서 금·은·동으로 만든 단지, 스키타이 청동 솥, 손으로 빚은 바닥이 납작한 질그릇, 갈아 만든 질그릇, 다양한 장식 무늬가 있는 암포라, 스키타이와 그리스인 장인(匠人)이 만든 정교한 보석 장식품들이 나왔다.
스키타이 미술로는 맹수 ·괴수(怪獸) ·동물 같이 싸우는 모습을 주제로 한 동물무늬가 두드러진다. 이 동물무늬의 기원이 동방에서 전파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최근 시베리아 남부 기원설이 우세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10월 에르미타슈 미술관 소장의 스키타이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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