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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청암사 후원 살림살이를 뜯어보니…

김영옥의 '즈믄 江에 뜨는 달'…비구니 열전〈6〉

네 발밑부터 살펴라

불령산 깊은 속, 가야산 자락이 보이는 곳, 초행이라면 더욱 멀게 느껴질 만한 곳이다. 그러나 막상 이 곳에 이르러서는 도량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개울 위 다리께에서 한 걸음도 들여 놓지 못할지도 모른다.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청암사, 일백오십 대중(스님)이 살고 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곳, 그것만으로도 그만 마음이 그윽해져 법당이 있는 도량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 놓지 못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그냥 발길을 돌려 나오기는 못내 서운하여, 이 너머에는 뭐가 있나, 개울 이 편 오르막길 위로 올라가게 될지도 모른다.

극락전, 세월 끝에 말가니 단청 칠이 벗겨져서 삭은 뼈로만 남은 듯한 집, 주춤주춤 다가가 열린 대문 앞까지는 다가갔었다. 그 때가 가을이었다. 금사초, 봉숭아 따위가 끝물로 남아 있는 뜨락을 들여다보다 말고 돌아서자니, 서 있는 품이 조금은 헐거운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 물이 함빡 든 나무 한 그루가 시봉하고 있는 집.

그 작은 집을 시봉하는 나무가 홍도화인 줄을, 불이라도 켜 든 듯 꽃을 피워 주위를 온통 환히 밝히고 있는 이 봄철에사 알게 되었다. 이제 보니 '동사(東司)'라는 패찰이 걸린 그 작은 집은, 지난 날 이 곳이 비구 스님들의 강원일 적부터 해우소로 쓰던 곳이었다. '동사'란 '동정(東淨)'이라고도 하는데, 사람과 불법을 궂은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제예명왕(除穢明王)이 동쪽에 산다고 믿어 뒷간을 동쪽에 두던 옛날 풍습에서 비롯되어, 이후로는 방위에 상관없이 '해우소'를 뜻하는 말로 쓰이던 이름이다. 이제는 해우소를 그렇게 부르지도 않지마는, 뜻 알아 볼 이가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맨 나무판에 먹빛으로 '동사'라 적힌 자그마한 패찰은 오늘의 청암사를 엿보는 창호 하나로 삼을 만한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라야 하되, 지난 세월을 버리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니, 새로운 오늘의 바탕으로 삼아야 할 바였다.
▲ 장꽝은 후원과 지근 거리에 있되, 볕이 바르고 바람의 소통이 좋아야 한다. ⓒ허경민

신라 헌안왕(859년)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암사는 조선조 때의 대강백인 회암 정혜 이후로 근년의 고산 스님에 이르기까지, 숱한 강백들이 강석을 펴 온 유서 깊은 비구 강원이었으나, 1987년도에 강주 지형 스님과 강사 상덕 스님이 열여섯 학인들과 함께 이곳에 깃을 들인 뒤로 비구니 강원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곳이다. 초기에는 이 곳을 공부터로 삼을 학인들을 모으는 일도 큰일이었지만, 폐강이 된 지도 십여 년, 폐사지경이라 할 만한 도량을 정비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새로 짓기보다는 본디 건물의 원형을 지키는 고쳐 짓기, 두 스님과 학인들이 몸으로 겪어 낸 고단한 불사 이야기는 이제는 옛일로만 여길 만해졌다. 그러나 조고각하(照顧脚下), 네 발밑부터 살펴라. 장안으로 가는 길도 삽짝문 밖으로 난 작은 길에서 시작된다. 대방(큰방) 앞에 줄 맞추어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만 보아도 알 일이었다. 옛적 모습을 짐작할 수도 없이 단아해진 도량을 더욱 맑게 빛내는 것은, 두 스님의 한결같은 가르침 속에서 이루어지는 학인들의 여법한 나날일 터였다.

그 하루가 시작되는 시각, 새벽 세 시에 도량석이 올려지고, 운판과 목어와 법고와 대종이 차례로 울리고 난 뒤로 시작된 아침 예불이 끝날 즈음, 공양간에는 불이 켜진다. 공양간에 상주하시는 조왕님 놀라시지 않게 똑똑똑 문을 세 번 두드리고 들어간다. 한 쪽 벽에 모셔진 조왕단 앞에 다기물 올리고, 초와 향에 불 붙인 다음 세 번 절하여 예를 올린다. 부뚜막과 아궁이 사이에는 유리문이 달려 있다. 바람이 불어 아궁이에서 내쳐지는 검불 따위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솥을 지키는 상공양주는 맑은 물로 솥을 부셔 놓고, 하공양주는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자루에 담겨 있는 마른 솔잎을 불쏘시개 삼아 피워진 불은 삭정이를 불 붙이고, 이어서 굵은 장작으로 옮아 붙는다. 일백오십 명 대중을 위한 조죽(아침죽) 끓이기, 서 되가 좀 못 되는 쌀을 씻어 뜨물을 받아 둔다. 밥쌀과는 달리, 죽쌀은 씻어서 바로 끓여야 쌀알이 퍼지지 않고 맛있다.

죽을 끓일 때는 죽 끓이는 일에만 온 마음을 쏟아야 한다. 팥죽을 쑤던 무착 스님이, 그렇게도 뵙기를 원하던 문수 보살이 죽 솥에 나타나셨으나, 주걱으로 쳐서 쫓아 버린 뜻이 그러하다. 뜨물이 끓으면 솥에 쌀을 넣는데, 십 분 안에 거품이 올라올 만큼 불을 괄게 해야 한다. 쌀을 넣고는 밑이 눋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어 주되, 한 방향으로만 그리 해야 죽이 삭지 않는다. 피어오른 거품이 자잘해지면서 솥 가장자리로 모이기 시작하면 아궁이 불을 끄고 솥 뚜껑을 열어 둔 채 뜸을 들인다. 상공양주가 지키는 솥 곁에 놓인 일고여덟 개 작은 진지 그릇으로 죽을 퍼 담되, 한 번에 하나를 온전히 채우는 식이 아니라, 찻물을 따라 붓듯 순서대로 한 바가지씩 돌려 담는다.
▲ 식품 저장고인 양진소(養眞所). 계곡의 축축한 그늘을 만개한 황매가 환히 몰아낸다. ⓒ허경민

삼인일상, 준비된 찬을 세 사람이 덜어 먹을 수 있게 보아진 찬상은 공양간에서 대방까지 한 줄로 늘어선 학인들의 손에 손으로 전달된다. 하루 세 번 온 대중이 가사 장삼 깍듯이 갖춰 입고 대방에 모여 앉아 발우를 펴되, 아침 공양으로는 흰죽을 먹는다. 채마밭에서 길러 낸 아욱으로 죽을 끓이거나, 시주물로 들어온 대추나 잣에 여유가 좀 있으면 대추죽이나 잣죽을 쑬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 이곳에 깃을 들인 뒤로, 십오 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지켜 온 아침죽 전통이다. 부처님은 걸식하여 하루 한 끼만 공양을 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배고픔을 견디지 못했던 아들 라훌라의 원만한 수행을 위해 죽 먹기를 허락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결제 중인 선방에서는 조죽 전통이 아직 지켜지고 있는 편이나, 콩, 잣 등의 잡곡이 섞인 것이기 쉽다. 오롯이 흰죽만 고집하고 있기로는 이곳이 나라 안에서 거의 유일하다.

쌀로 죽을 쑤되, "주걱으로 저어서 글자가 쓰이지 않게 (묽게) 하라"고 했다. 수행자에게 있어 죽이란, 간소한 공양으로써 검박함을 지키려 함이요, 한결 가벼운 몸으로 수행에 이롭기를 도모함이요, 밥보다 쌀이 덜 드는 것이니 시주의 은혜를 몸으로 되새기려는 뜻이 된다. "별빛이 아직 아침이 되기 전에 먹는 정미한 음식"(남곡 회신)의 이로움은 <사분률>에도 적히어 권장되어 오는 것이다. 어떻게 유익한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흰죽을 먹으면 혈액 순환이 원활해지고, 체력이 증장되고, 몸과 마음이 안락해지고, 음색이 맑아지고, 풍증이 없어지고, 잠과 배고픔과 갈증이 줄게 된다고 했다.

전단나무 숲에서는 전단나무 되고

올해 세속 나이로 쉰셋이 되는 상덕 강사 스님은 1965년에 충청남도 개심사로 출가, 동학사 강원과 서울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서울 경국사 법보 강원 시절에 수학한 지관 스님으로부터, 지형 스님에 이어, 비구니 스님으로는 두번째로 전강 제자가 된 그의 이력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학승으로서의 일관된 삶을 살아온 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화엄반(대교반)을 맡고 있는 지형 강주 스님과 함께, 사집반, 사교반 학인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일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방부 들이려는 이를 모두 받을 수가 없을 만큼 규모가 커진 학인들의 공양을 맡아 보는 후원 살림살이 또한 자신의 몫이다. 음식 솜씨? 상덕 스님은 그 말에 하하하 웃었다. 지난 날에 자청해서 공양주 노릇을 한 해 동안 한 적이 있으니, 아직 밥짓기는 해 볼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학인 시절에 채공일을 맡는 별좌 소임도 맡아 보았으되, 그나마 바깥일을 거드는 하별좌 노릇만 했다고 했다. 맨간장도 맛나고, 소금으로만 간해 담갔을 무짠지도 깊은 맛이 나니, 후원에는 음식 맛을 관장하는 숙수가 필경 계시리라 여겼던 객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스님은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고추장을 담는데, 속성으로 익히려는 마음이 너무 급했던가 조청을 너무 많이 넣어, 숟가락으로 뜨려니 고추장이 담긴 그릇이 딸려 올라오더라는 것이었다. 이 말에는, 다시 들어도 우스운지, 함께 자리했던 학인 스님들까지 하하하 웃었다.
▲ 청암사에서 고집스럽게 이어가고 있는 아침죽 전통. ⓒ허경민

지난 날과는 달리, 비구 비구니 스님을 가릴 것 없이 출가 연령이 삼십대 중반을 넘보는 이즈음, 버려야 할 습은 더욱 뿌리 깊고 시간 또한 길어지고 있다. 출가한 이가 거치는 수행의 첫번째 과정은 여섯 달 동안의 행자 노릇이다. 그 때에 공양간과 채공간을 두루 거치게 함은 수행의 바탕이 될 하심(下心)을 익히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청암사 학인들이 강당으로 쓰고 있는 당우가 '육화료'라 이름 붙은 곳이거니와, 깨달음을 구하고 깨끗한 행을 닦되, 여섯 가지 화합의 뜻을 하심으로써 받든 끝에, 마침내 "사자굴 안에서는 모두 사자가 되고, 전단나무 숲에서는 순전히 전단나무가 되려 함"(장로 종색)이다. 4년 강원 기간 동안에 사중 소임은 4학년인 대교반 학인들이 나누어 맡되, 공양간 일을 보는 원주와 별좌는 남다른 원력이 필요한 소임이다. 공양을 지어 올리되 대중을 부처님처럼 여기는 성심과, 고단한 몸을 이겨 내려는 단단한 수행 의지가 없이는 견디기 힘든 탓이다.

해마다 새로 신입하는 학인들은 일차로 윗반 스님들이 제접하게 된다. 그러나 날이 훤히 밝은 뒤에도 실없이 방에 불을 켜 놓거나, 산에서 그저 흘러내리는 물일 망정 허투루 쓰는 듯해 보이면 지나치는 법이 없이 '잔소리'를 맵게 내리는 일말고도, 상덕 스님이 후원 살림 속에서 관장하는 것이 없을 수가 없다. 그것은, 모자라는 양이 문제였지, 무엇을 어떻게 조리해 먹을지는 아무런 걱정이 없던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입에 남아 있는 그 때 그 맛을 끊임없이 말로나마 되짚어 주는 일이다. 가장 좋은 조리 선생은 입이 기억하고 있는 맛일 터였다.

그러나 이즈음의 하수상해진 식문화에 익숙한 입으로는 애초에 가당한 일이 아니다. 고서에 이르되, 음식은 깨끗하고도 부드럽게, 그리고 여법하게(재료의 본디 성질을 그대로 살려서) 만들어져야 한다 했다. 그리고 그가 덧붙인다. "이 곳에서 거두는 것이 모자라 재료를 밖에서 들여와야 할 때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외래종 말고, 이 땅에서 오래 동안 대대로 먹어 오던 것이라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 그러나 오늘 우리가 차리는 밥상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내용일 터였다.

경학과 울력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청정 도량, 나라 안 대여섯 군데의 비구니 강원 가운데서 학인들이 이곳 청암사를 찾는 까닭으로 손꼽는 것이다. 울력은 이른 봄에서 늦가을까지 하루 한두 시간쯤 한다. 고소, 근대, 아욱, 상추, 토란, 산동초, 어수리, 참, 취,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원추리, 오이, 배추, 무, 열무, 고추, 감자, 가지, 참깨, 들깨, 옥수수, 수수, 호박, 청경채, 대두, 땅콩…. 정랑(淨廊)에서 거두어내는, 낙엽과 섞어 잘 썩힌 거름과, 한 해 동안 밭에 묻어 썩힌 음식물 찌꺼기 따위를 두어 비옥해진 밭에 온갖 작물을 다 가꾸니, 쌀과, 미역, 다시마, 톳 따위 해산물 말고는 먹거리가 거의 모두 자급된다.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고추와 감자 농사다. 지난해는 마른 고추 이백 근쯤을 거두어 사천 포기가 넘는 김장을 감당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던 백장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어여쁜 후예들이 아닐 수 없다.

이 곳에서는 월 단위 또는 주 단위의 식단을 짤 수가 없다. 영양과 맛을 배려하되, 밭에서 거두어지는 대로, 냉장고와 식품 창고의 재료 사정에 따라, 또는 신도들의 공양물에 따라 그날 그날 정한다.

승속이 다르지 않아, 일 년 중 후원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장 담그기와 김장이다. 장은 음력 시월 초,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에 담그는데, 정월에 담근 장은 삼월 삼짇날이 지나면 먹을 수 있다지만, 계곡이 깊어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 곳에서는 여섯 달쯤 익힌다. 이즈음에는 출가 전에도 장을 담가 본 학인이 드물 뿐더러, 소임자도 해마다 바뀌니 이 일만큼은 상덕 스님이 직접 나선다. 해마다 해 오는 일인데도, 요즘 같아서는 세간에서 쓰고 있다는 염량계 생각이 굴뚝 같다. 올 정월도 춥지 않았다. 어째 기후는 점점 불순해져 가고, 소금도 옛날처럼 달지도 않고 뒷맛이 쓰다. 해마다 소금량도 늘어, 옛날에 물 두 바켓에 서 되가 좀 못 되게 넣던 것을 이제는 너 되나 넣는다. 그러면서 불안해진 마음은, 소금물을 만들 때에 그저 고무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을 쓰고,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 바가지 따위를 쓰는 성심으로 눅이면서, 산 속에 관을 박아 걸러 쓰고 있는 이 계곡의 좋은 물맛에나 기대어 보는 터였다.
▲ "수행자에게 죽이란 간소한 공양으로써 검박함을 지키려 함이요, 한결 가벼운 몸으로 수행에 이롭기를 도모함이요…" ⓒ허경민

상덕 스님의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간장과 된장은 맛나기만 하다. 아마도 이 산중의 맑은 햇빛과 공기, 그리고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이 장꽝을 돌보는 원주 스님의 손길 때문일 것이다. 채공간 앞 장꽝에는 "2002. 2 간장", "2000년 된장", "감장아찌 이천일년 양력 9월 24일." 이런 글귀들이 붙은 장독들이 놓여 있다. 요것들이 얼마나 사람 손을 타는데요. 계곡으로 내리부는 바람이 아직 선뜩한 때, 그러나 울창한 숲 나무들이 지우는 축축한 그늘을 환히 몰아 내는 축대 밑 황매 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올 봄의 그 지독한 황사 바람, 그리고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송화 가루만 걱정인 문성 원주 스님이 장독을 닦으며 하는 말이었다.

이곳에서는 물론 인공 조미료를 쓰지도, 인스턴트 음식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파, 마늘, 달래, 부추 등의 오신채를 제외한 채식만 취할 뿐이다. (근년에 들어 우유나 요구르트, 치즈 따위는 먹게 하고 있다.) 이 같은 식의 섭생을 통해 학인들이 해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상덕 스님의 눈에는 보인다. 세간을 떠나 온 기간이 짧을수록, 그러니까 학년이 아래일수록 속이 헛헛해 하더라 했다. 배가 고프면 (죽을) 한 국자 더 떠 먹어라. 그런 학인들에게 상덕 스님이 이르는 말이다. 헛헛한 속은 내용을 바꿀 것이 아니라, 양으로 조절하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졸업반쯤 되면 그런 '증상'이 가신다. 몸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취하는 소금량이 지나치게 많다고 하지만, 생소금과 발효 식품인 간장과 된장의 염분은 다르다고 상덕 스님은 생각한다. 조리를 할 때 간은 기본적으로 간장과 된장을 써서 하는 것이 옳다. 빛깔은 좀 덜 깔끔하더라도, 그래야 깊은 맛이 나고 소금 섭취량도 줄일 수 있다. 땅에 묻지 않고, 겨우내 창고에만 보관해 두어도 이듬해 여름까지 먹을 수 있는 김치마저, 양념은 주로 간장으로 간하고 소금을 추가하는 식이다. 산초나 가죽, 제피를 넣어 담근 간장, 그리고 가을에 거둔 무, 깻잎, 더덕, 도라지, 무 오그락지, 고추 따위를 간장, 된장, 고추장 따위에 박아 만드는 장아찌는 이 곳의 중요 밑반찬들이다.

이즈음 세간에서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서 섭생의 의견들도 갖가지로 구구한데, 상덕 스님은 이런저런 것들이 마뜩치가 않다. 건식? 승속을 막론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국이나 숭늉 등의 습식이 맞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높아진 육류 섭취량을 날야채를 숭덩숭덩 썰어 소스를 끼얹어 먹는 일로 얼버무리는 것도 못마땅하다. 쌈이나 생절이를 해서 먹기도 하지만, 채소는 기본적으로 국으로 끓여 먹거나, 삶거나 데쳐서 무치거나, 발효시켜 먹는 것이 옳다. 소나 돼지도 끓인 것을 먹이지 않았나요? 수행하는 스님들이 생식을 하는 것도 먹는 양을 줄이어 몸을 가볍게 하고, 공양 준비 시간을 줄이자는 뜻에서 취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상덕 스님표' 김밥
▲ 학승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강석을 펴고 있는 상덕 스님은 청암사 후원 살림의 '뒷지기'이기도 하다. ⓒ허경민

유난히 춥고 눈도 많아서 겨울이 긴 곳, 그래서 학인들이 "동토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는 곳, 그러나 양진소(養眞所)에 들앉아 겨울을 난 김치가 숨을 크게 쉬기 시작하는 어느 날, 조금씩 부풀어 오르던 땅에서 고개를 내민 푸른 싹을 누군가가 보아 내고 만다. 쑥이다! 냉이도, 그리고 원추리도! 그 때에 학인 스님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은 그것들이 봄의 신호이기도 하고, 입맛을 돋구어 줄 반찬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별꽃도 꽃이 피기 전에는 훌륭한 나물거리가 된다. 봄비처럼 풋풋한 맛인가? '봄비차'라고도 부르는 홑잎은 우려서 차로도 먹지만, 향긋한 봄나물이기도 한 것이다.

산중의 긴장되고도 단조한 생활, 긴 문장 속의 쉼표처럼 반가운 것은 역시 별식이 나올 때다. 한 달에 세 번, 삭발하는 날에 먹는 찰밥, 양력 섣달 그믐날 온 대중이 함께 만드는 만두…. 그 담박한 맛은 고기로 소를 해 넣은 것에 비길 수가 없어요. 봄철 애릿애릿한 쑥을 뜯어 만드는 쑥갠떡, 단오 때면 오동통 자라오른 상추 동(줄기)을 자근자근 두들겨 숨을 죽인 다음, 잎과 함께 된장을 약간 푼 밀가루물을 입혀 굽는 상추적, 도토리 가루를 입혀 부치는 배추 또는 두릅적. 그런데 학인들은 적보다 튀김을 더 좋아하니 상덕 스님은 걱정이다.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은 몸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서 스님들한테 썩 좋은 음식은 못 된다 여기기 때문이다.

"당근이나 쑥, 또는 말차 가루, 카레 가루, 치자 따위로 색을 낸 삼색 수제비는 뭐 별식이랄 수도 없고. 갖가지 채소를 넣어 푹 끓이는, 육개장 아닌 '채개장', 불린 흰떡을 식용유에 살짝 볶은 뒤에 양념을 하면 불지 않는다는 떡볶이, 팥물에 손으로 썬 칼국수를 넣고 끓이는 팥국수, 이건 '오뉴월 염천에 세 번만 먹으면 온갖 병이 다 없어진다'는 여름 별미죠. 새알 대신 칼국수를 넣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고명은 없이 국물 김치를 곁들여 먹어요. 감자, 속 넣은 고추, 깨 줄기로 만든 깨송이로 부각도 만들어 먹지요. 국수도 가지가지, 콩국수, 칼국수, 잔치국수, 송이째 쪄먹는 수수도 별미랍니다. 밥하고 남은 불에 구워 먹는 감자, 그 불에 날김 구워서 찰밥 싸먹는 맛은 또 어떻구."

대중이 한데 모여 사니 감기가 시작되면 여럿이 한꺼번에 앓게 되기 십상이다. 재 속에 묻어 익힌 귤, 능이버섯, 통고추, 무, 콩나물을 한데 넣고 빛깔이 가무스름해지도록 고은 물은 감기에 그만이다. 꼬리와 대가리를 떼 낸 콩나물, 배와 무는 채 썰어서 전기 밥통에 담되, 노란 엿을 너무 달지 않게 적당량 켜켜로 두어서 하루 저녁 보온 상태로 두면 물이 생기는데, 자기 전에 먹고 땀을 푹 내면 기침이 똑 떨어진다. 그 물을 한 사흘은 먹어야 하고, 삼십 분만이라도 땀을 푹 내야 효과가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피자도 해먹는다. 고기만 안 들어가지, 갖은 야채와 과일 쓰기는 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밑판이 될 밀가루 반죽에 감자를 곱게 갈아 넣는 것이 좀 색다르다. 간은 썰어 넣는 김치로 맞춘다. 오븐은 없다. 큰 프라이팬이 총동원되고, 커다란 차판을 뚜껑으로 써서 익힐 수밖에.
▲ 대방 앞에 있는, 아귀를 위한 헌수대. 발우를 헹구어 낸 물이 맑아야 목구멍이 바늘귀만한 아귀가 능히 공양을 할 수 있다. ⓒ허경민

스님이 창안해 낸 '상덕 스님표' 김밥도 있다. 펴 놓은 밥에 산초 간장을 듬성듬성 바르고, 금방 꺼낸 김치를 길게 찢어서 심으로 박아 만 김밥이다. 김밥을 말 때는 숨구멍을 둔다는 기분으로 살살 쥐어 마는 것이 맛을 더하는 비결이다. 이 김밥을 지난 겨울 첫눈 오시는 날에도 만들어 먹었는데,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한자리에서 열다섯 줄을 먹어치운 학인도 있었더라 했다! 수행하러 온 사람이니 공부를 많이 하려면 밥도 많이 먹어야지. 겪어 보니, 밥 많이 먹는 사람이 망상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라고 스님은 웃으며 말한다.

사월 초파일이 보름쯤 남았는데, 이끼가 푸르게 자라는 개울 옆으로 난 오리(五里) 숲길에는 벌써 화사한 연등이 내걸렸다. 지금은 한참 아래쪽으로 비껴 나 있지만, 그 옛날에는 하루에 두 번씩 버스가 오가던 찻길이다. 그렇게 길을 돌려 놓은 것도 상덕과 지형 두 스님이 애쓴 끝에 이룬 것이다. 사람들이 계곡에서 더위를 피하는 일까지야 뭐랄 수 없었지만, 공부하는 도량 아닌가. 징과 장구에, 하루 종일 고성 방가도 모자라 앰프까지 동원해서 소리를 높이는 짓은 안 될 말이었다. 지금은 예불을 보고 있는 정법루 주변은 젊은이들의 텐트장이었고, 당우 아래로는 쑤셔 박힌 술병이 숱했었다. 올 한해는 또 어찌 보내나, 봄만 되면 그들과 실랑이 벌일 일이 걱정되어 한숨이 절로 나왔었다. 여기서 산 지도 십육 년, 벌써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계산법이신가. 둘을 보태니 삼십 년이 넘네, 한다.

강주 스님이 손수 지어 주신 거예요. 그런 시절 보내고, 오늘 상덕 스님이 입고 있는 노리짱한 동방아(윗적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먹물을 들이기 전, 하얗게 마전해 버리기가 차마 아까운 진솔 무명 옷, 소색(素色), 그것은 흰색이 아니라 천연한 자연색이다. 홑잎차 한 잔 우려 놓고, 두 스님이 마주 보고 웃는 웃음도 똑 그렇다. 동학사 강원 도반으로 만나서, 법보 강원, 화운사 등 이후로 함께 했던 세월까지 모두 보태면 몇 년이 되시는가.

계수나무 두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자[兩桂垂蔭]
한 송이의 꽃이 상서로움을 드러냈도다[一華現瑞]

청암사, 꽃이 뿜는 향훈은 오랠 터이니, 두 그루 계수나무가 숭산의 소림굴 앞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글은 2002년 4월 현재 청암사 후원 살림에 관한 내용으로서, 비구니 스님들의 오늘을 사는 형편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기고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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