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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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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34>

아슬아슬했던 순간들

  6.25 전쟁 도중 미국은 한때, 전황이 불리하자 한반도에서 전면 철수를 고려하기도 했다. 만일 그 당시 철수했더라면 당연히 오늘날의 번영하는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고 현대 한국사는 전혀 다른 길을 밟았을 것이다.
 
  오늘은 그 때의 아슬아슬했던 상황에 대해 음양오행을 통해 얘기하고자 한다.
 
  인천상륙을 통해 전쟁의 기선을 제압한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다가 몰래 숨어들어온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그만 대패를 거듭했다. 패색이 짙자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해서 일본에서 방어선을 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종의 패전 후 대책이었다.
 
  얘기에 앞서 미국은 그 기운이 계수(癸水)로서 목(木)운에 힘을 발휘하고 중국은 무토(戊土)로서 금(金)운에 힘을 쓴다는 것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를 명리학에서는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이라 부르는 기운으로서 기운이 밖으로 분출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1950년, 경인(庚寅)년의 전쟁은 천간(天干)에 경금(庚金)이 오고 지지(地支)에 인목(寅木)이 오는 운세이니 경금은 무토(戊土)인 중국이 주도권을 가진 다는 것이고, 지지에 인목(寅木)이 있다는 것은 미국이 그에 대항하여 힘을 쓰는 형국임을 말해준다.
 
  전쟁은 김일성이 시작했지만 결국 당사자는 중국과 미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중국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지금도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중공군은 그 해 11월 정해(丁亥)월에 기습공격을 개시하여 초전부터 미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12월은 무자(戊子)월이니 중국과 같은 동기(同氣)로서 중공군의 맹위가 천하 만방에 떨친 달이었고 미군으로서는 창군 이래 세 불리로 후퇴한 거리 면에서 신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지리멸렬하게 패주했다.
 
  미군의 사기는 패닉(panic)상태였고 전쟁 영웅 맥아더 원수는 졸지에 패군지장이 되었다. 처음에 평양-원산 선을 지키려던 UN군의 결의는 보름도 되기 전에 포기해야 했고 12월 중에는 서울 방어도 무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급기야 서울을 목표로 하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12월 23일에는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서울의 워커힐 호텔은 이 양반의 이름을 딴 것이다-마저 자동차 사고로 잃는 불운이 겹쳤다.
 
  상황은 실로 긴박했다. 미국은 급히 후임으로 릿지웨이(Ridgway)장군을 발령했는데 결국 이 양반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은인이 된다.
 
  릿지웨이는 제2차 대전 당시 미군의 공수부대인 82 공수사단을 지휘하여 미군 역사상 최초로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에 있는 시실리 섬에 공수작전을 감행했으며, 노르망디 상륙 시에는 본인 스스로 직접 낙하산을 타고 부대원들과 함께 낙하를 한 경험도 있는 맹장이었다.
 
  참고로 82 공수사단은 101 공수사단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미 육군의 최정예 부대로서, 걸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도 가장 앞서 진주한 부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막강 부대이다.
 
  릿지웨이 장군은 한국에 오기 전 일본 도쿄에 들러 맥아더와 면담한 후 일체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 때 맥아더는 어차피 전쟁이 어렵다고 보고 일체의 책임질 행동을 삼가기로 했던 것 같다. 맥아더 역시 정치성이 대단히 강한 군인이라 인기 관리에 들어갔다는 얘기이다.
 
  당시 미국은 대패를 거듭하자 12월 4일 경부터 한반도에서 전면 철수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놓고 숙고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12월 4일은 계유(癸酉)일이라 계수(癸水)인 미국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황을 판단하는 기운이다.
 
  맥아더 원수는 확전책을 주장했지만, 이는 고위 당국에 의해 수용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 던져본 제안에 지나지 않았기에 자신의 패배 책임을 희석해보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워싱턴은 중공의 한국 개입이 소련이 세계 대전으로 전체 상황을 이끌어가려는 일관된 계획의 중간 단계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12월 16일 을유(乙酉)일, 목(木)의 날이니 미국이 뭔가 힘을 쓰는 날인데 이 날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공식 선포하였다. 전면적인 동원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모든 방면에서 군사력 증가와 동원태세를 제고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2월 30일, 기해(己亥)일인데 이 날의 운기(運氣)는 미국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는 날이다. 이 날 합참본부는 맥아더에게 한국은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경우 주전장(main battle field)으로 삼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통보를 내렸다.
 
  이 말은 상황이 어려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맥아더는 중공군이 서울과 부산의 중간인 금강(錦江)선까지 진출해서 병력을 집결시키게 된다면 철수를 단행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풀이 죽은 상황에서 지휘를 맡은 릿지웨이는 병사들의 사기저하에 철수풍문까지 겹쳐 지휘에 대단한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전의가 없는 병사는 아무리 많아도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은 고금에 통하는 이치라 하겠다.
 
  이에 미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의 철수 문제는 일단 한반도를 직접 방문해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 참모총장은 도쿄에 들러 맥아더의 비관적인 보고를 들은 후, 1951년 1월 15일에 한국으로 날아와 릿지웨이 사령관을 만나게 된다.
 
  이 날은 을묘(乙卯)일로서 미국이 힘을 쓰는 날이다. 앞서 미국의 비상사태 선포가 을유(乙酉)일이었을 상기해보면 을목(乙木)의 날에 미국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해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한편 위력정찰을 통해 소규모 전투를 이어가던 릿지웨이는 이 날 면담에서 대한민국의 장래를 놓고 대단히 중요한 보고를 했다.
 
  중공군이 한강 이남으로 섣불리 진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과 보급과 사기 면에서 중공군 역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 강원도 방면에서 북한군의 침투 시도 역시 반격을 받아 격퇴되었다는 상황을 보고했다.
 
  콜린스와 반덴버그는 도쿄에서 들은 맥아더의 보고 내용보다 상황이 훨씬 낙관적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어 두 고위 참모들은 전선을 직접 시찰하면서 릿지웨이의 지도력이 서서히 먹혀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미국은 철수하지 않는 쪽으로 정책 결정을 보게 되었으니, 당시 릿지웨이의 말 한 마디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릿지웨이 장군의 사주를 보면 기유(己酉)일 생인데, 기유일에 태어난 사람으로 현 축구 대표팀을 맡은 아드보카드 감독이 얼핏 떠오른다.
 
  아드보카드 감독 역시 용감한 장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듯이 릿지웨이 장군 역시 대단히 의지가 강하고 역전형의 장군이었다. 다만 릿지웨이 장군은 봄에 태어난 기토(己土)이기에 자제력과 충성심이 강해서 직업장교로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하겠다.
 
  이후 릿지웨이의 열성과 투지는 1951년 2월 준순에 있었던 양평과 횡성 중간에 위치한 지평리 전투에서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다. 전투는 2월 14일부터 시작되어 다음 날은 실로 양쪽이 총력을 다 했고, 16일에는 수 천 명의 시신을 남긴 채 중공군이 후퇴함으로써 전환의 계기를 맞이했다.
 
  이 날을 음양오행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신묘(辛卯)년
경인(庚寅)월
을유(乙酉)일
 
  금 기운 3개와 목 기운 3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금의 기운은 중국의 힘이고 목은 미국의 힘이다. 최선을 다한 공격이고 방어였지만, 16일 병술(丙戌)일이 되자 병화(丙火)가 들어와 중국의 힘인 금 기운을 제압하니 미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지평리 전투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서 충분히 전쟁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UN군의 사기도 크게 고무되면서 균형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나의 극적인 전환점이었음을 말해준다.
 
  필자는 3년 전 지평리 지역을 지나가다가 문득 이곳이 그 옛날 그곳이구나 싶어 술 한 병을 사서 들판에 뿌려주고 국적에 관계없이 꽃다운 청춘에 세상을 버려야 했던 이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 필자는 다음 주 월요일에 중국으로 놀러갔다가 토요일에 돌아옵니다. 따라서 글은 한 주 쉬기로 했습니다. 독자 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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