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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의 위력을 실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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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의 위력을 실감하다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36〉

  어설픈 에스페란토 "kafo(커피)"와 "kapo(머리)"
  
  두 나라가 공동으로 벌이는 탐사단에서 통역관이 차지하는 역할이 대단히 크다. 플루스닌 교수는 에스페란토 실력이 최상급은 아니지만 어려운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어려운 농담까지도 잘 소화해 낸다. 그런데 이 철학자 교수가 때때로 여행에 완전히 도취되거나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바람에 중요한 순간에 통역할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가끔 있다. 우리와 가장 밀접하게 행동하고,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꾸바레프 교수가 영어가 전혀 안 되기 때문에 통역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 앞좌석에서 둘이 신이 나서 이야기 하고 통역을 맡은 자신의 수첩에 기록까지 하면서도 통역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통역을 부탁하면 그 때야 자기 위치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유리 할아버지는 의사소통이 제법 된다. 아는 영어 단어가 몇 개 안 되지만 순간순간 정말 요긴하게 사용한다. 유리 할아버지의 희한하면서도 반복되는 영어는 탐사단 모두가 즐겁게 웃는 활력소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리나와의 대화에서는 아주 색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여행 도중 이리나가 직접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이다. 동생과 내가 수시로 단어를 일러주고, 그래도 모르는 것은 플루스닌 교수에게 물어서 놀랍게도 아주 기본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2차대전 때 포로수용소에 너무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다보니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통제가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용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가르쳐 어려움 없이 생활하도록 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이때는 두 가지 환경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는 에스페란토가 발음, 문법 모두 간단하고 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을 배우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절박성 때문이었다. 이런 환경을 재빨리 깨달은 이리나의 실력은 날로 늘어났다. 역시 러시아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최고의 연구소(러시아 지질연구소)에서 일한 엘리트답게 이리나의 에스페란토 습득 속도는 놀라웠다. 그러나 아직 이리나와의 대화는 문장보다는 주로 단어로 이루어진다.
  
  오늘 아침에도 이리나가 "kafo(커피)"라고 한다. 주어 동사 다 빼고 한 단어만 던진 것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그녀의 의도를 알고 행동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말에 비하면 우리나라 말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늘도 커피를 마시라고 하는 줄 알고 나는 홍차를 마신다고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커피"라는 단어를 불러대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플루스닌 교수를 불러 이 난국을 타개해 주도록 통역을 부탁했더니 "kafo(커피)"가 아니라 "kapo(머리)"라는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이리나가 특별히 물을 데워놓았으니 "kapo(머리)"를 감으라는 호의를 베푼 것인데 나는 계속 "홍차"만 되풀이 했던 것이다.
  
  스텝지역 답사와 러시아제 자동차의 위력
  
  이번에 우리가 타고 온 두 차는 알타이 탐사를 위해서는 정말 최상의 것이었다. 물론 알타이가 초원이 많고 산에 나무가 없어 그렇지만 어지간한 산은 어디나 올라 다니는 탱크 같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
  
  꾸바레프 교수의 승합차는 우리나라 12인용 승합차보다 많이 못생겼지만 비포장도로와 산간 지역을 달리는 실력은 우리나라 승합차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꾸바레프 교수의 승합차는 UAZ라는 회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자동차 회사는 1941년부터 자동차 및 항공기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울랴노브스끼 자동차공장(Ulyanovsky Avtomobilny Zavod, 약자 UAZ)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지프차를 생산하는 러시아 굴지의 업체다. 이 회사는 주로 러시아 및 구소련지역의 군용 지프차를 대부분 공급했기 때문에 옛 소련권에서는 "체로키"보다 더 유명한 상표다. 군용 지프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나온 승합차도 자연 지프차와 같은 성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가 5년 전 5000달러에 샀는데 지금 이런 헌차는 2000달러면 살 수 있다고 한다.
  
  유리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며 몰고 다니는 차는 트럭은 GAZ-66이다. 이 차는 러시아 제2의 자동차 생산업체인 고르끼 자동차공장(Gorky Avtomobilny Zavod, 약자 GAZ)에서 생산한 것인데 주된 차종이 승용차로는 유명한 '볼가(Volga)'이고, 짐차로는 지금 유리 할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소형 트럭 가젤(GAZelle)이다. 유리는 2002년 4000달러를 주고 사서 1년간 사용한 차라고 하는데 힘이 좋은 차지만 최고 속도는 시속 100㎞다. 러시아의 지방도로에서는 그 이상 속도도 사실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리의 나이 67세. 그래서 이 차도 이제 마지막이라고 한다. 지금 집을 짓고 있어 돈이 필요해 몇 년 더 벌려고 산 차라는데 매일 차를 모는 체력을 보면 아직도 몇 년 간은 끄떡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헌 차는 지금 얼마나 주면 살 수 있는가?"
  
  경제학자로서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나까지 끼워서 4000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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