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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 사랑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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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 사랑의 기념비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8〉탑상편 '무장사 미타전'조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조는 한 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여러 가지 내용들이 뒤섞여 있어서, 내용을 새로이 차례지어 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글에는 무장사의 위치, 절의 설립자, 절이 자리잡은 곳의 지형, 미타전 건립 동기, 절터의 내력, 절 이름의 유래 등등 많은 것이 뒤섞여 있는데 군데군데 엇갈리는 대목들이 있다. 이 대목들을 순서대로 재구성해 보면 이렇게 된다.

우선, 투구 무(䥐), 감출 장(藏)으로 '투구를 감춘다'는 뜻의 '무장사' 이름의 내력이 '무장사 미타전'조의 제일 끝 부분에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했다고 한다"라고 간단히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서 태종(太宗)은 태종무열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문무왕을 잘못 가리킨 것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기사 첫머리에서는 "서울 동북쪽 20리쯤 되는 암곡촌의 북쪽"에 있었다고 절의 위치가 소개된 후, 절이 자리잡은 곳의 지형과 내력에 관해서, 본문 중 두 군데에서 묘사되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 세운 듯하며, 깊숙하고 침침한 그곳은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만하고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비교적 실경에 어울리게 묘사하고 있다. 또 기사의 뒷부분에서는 "이 절에 한 노승이 있었는데, 홀연히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의 동남쪽에 앉아서 서쪽을 향해 대중에게 설법하는 것을 보고, 이 곳은 반드시 불법(佛法)이 머무를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마음에 숨겨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바위가 우뚝 솟고 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장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모두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터를 개척하자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고 신령스러운 터전임이 완연했으므로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면서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절터를 잡기까지의 내력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제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대아간 효양(孝讓), 추봉된 명덕대왕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라고 하여 무장사의 창건자를 밝히고 있으나 여기에는 논란이 있다.

태종무열왕 시대보다 1백 여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절을 세우면서 절 이름에 백년 전의 일을 끌어들여 무장사라고 했다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장사가 세워지던 당시 신라의 정세를 살펴보면, 성덕왕, 경덕왕 대를 정점으로 신라 중대가 전성기를 지나면서, 혜공왕 4년 대공(大恭)의 반란으로 전국 96각간이 서로 얽혀 싸우는 대혼란이 야기된다. 반란이 3년 가량 지속된 끝에 혜공왕이 김양상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무열왕계가 지배하던 중대신라가 막을 내리고 김양상, 김경신이 차례로 왕위를 잇게 되어 내물왕의 원손들에 의해 신라 하대가 시작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물왕계인 원성왕 김경신의 아버지가 세운 절이, '무장사'라는 이름으로 무열왕과 연계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절에 다시 미타전이 세워진다는 것이 '무장사 미타전'조의 중심 내용이다. 본문 중 미타전 건립 부분을 옮겨본다.

"절의 윗쪽에 미타고전(彌陀古殿)이 있는데, 곧 소성대왕(昭聖大王)의 비 계화왕후(桂花王后)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근심스럽고, 창황하여 지극히 슬퍼하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상하였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일을 생각하였다. 서방에 아미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맞아준다는 말을 듣고, '이 말이 진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라고 하고 6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9부(九府)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들을 불러서 미타상 한 구(軀)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나는 이 대목을 『삼국유사』에서 드물게 보는, 애절한 사부곡(思夫曲)으로 본다. 이 대목이 진부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계화부인의 진정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사진 설명 1) 무장사 터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조각1의 비문(출처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글자 중 파란색으로 표시된 글자는 『삼국유사』'무장사 미타전'조에 인용된 부분이다.

일연은 '무장사 미타전'조의 기사 중 주요 부분을 무장사의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본문 중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계화부인이 죽은 소성왕을 생각하면서 "근심스럽고, 창황하여 지극히 슬퍼하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상하였다"고 표현한 귀절은 아미타불조상 사적비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인용되지 않았지만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본문에는 계화부인이 "남몰래 깊은 시름에 잠겨, 오매불망 효성왕을 그리워했다(密藏鬱陶硏精寤寐求之)"는 구절도 나온다. 여기에 더하여 막대한 비용을 들여 미타상과 미타전을 조성하고 아마도 3층 석탑까지 세우고 한 데에서, 우리는 사적비의 문구가 진부한 수사가 아니라 계화부인이 지극한 애통함으로 소성왕을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렸던 그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설명 2) 무장사 터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귀부와 이수(김대식 사진)

무장사 터에는 아미타불조상 사적비의 귀부(龜趺), 이수(螭首)와 함께 9세기 경, 그러니까 미타전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 1기가 남아 있다. 사적비 비신(碑身)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서 근처에 흩어지고 산 아래 쪽 민가 등에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몇 조각 수습되어 그중 세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 세 조각 중의 하나에 죽은 소성왕을 그리워하는 계화부인의 사부곡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거기 아미타불조상 사적비의 탁본과 판독문을 읽으면서 나는 그 동안 찾아갔던 나의 무장사 답사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무장사 터를 찾아가서는 거기 유물들에 몰두하기보다는 무장사 터로 가는 길목의 풍경들에 한눈을 팔았던 적이 많았음을 깨달았다. 어줍잖은 감상(感傷)이 본질 또는 핵심을 가렸던 셈이다.

'무장사'라면 먼저, 암곡동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아마도 십리 가까이 들어가는 그 구불구불한 계곡 길을 기억하고, 그 동안 무장사 터를 찾아갔던 계절을 떠올린다. 봄에는 신록이 좋고, 여름에는 하늘을 가린 녹음이 시원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좋고……. 그런 곳이 무장사 터인데…… 아직 겨울에 눈 내린 무장사 터의 모습을 못 본 것이 아쉽다고 할까? 그런 생각부터 드는 것이 나의 말하자면 '무장사 인상(印象)'이다.

사진 설명 3) 무장사 터 3층석탑(김대식 사진)

무장사터 유물을 말할 때에도 "3층 석탑과 아미타불조상 사적비의 귀부, 이수"라고 기계적으로 읊는 정도이다. 무장사 터 아미타불조상 사적비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3층 석탑이 계화부인이 단월이 되어 세운 것인지 하는 의문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찍어대는 사진들도 그렇다. 혹시 놓치는 것 있을까봐 이것저것, 이모저모 알뜰하게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는 잊어버린다. 이번에 무장사 터 이야기를 찾아 글을 읽고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무장사 터의 유적들을 두고 책에 적힌 대로, "사적비 귀부와 이수의 그 섬세한 조각 솜씨 운운……" 할 것이 아니라, 그 토막나 부서진 사적비가 계화부인의 피눈물 사랑을 기록한 기념비였으며, 3층 석탑 또한 소성왕에 대한 계화부인의 애끓는 사랑의 징표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한번 짚어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무장사 터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이제서야 계화부인의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되었다고나 할까?편집자 분께
사진을 파란색 글자의 설명과 함께 본문 중에 앉히면서 그 위치를 지정하였습니다.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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