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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찰머스 존슨의 '미 제국주의 비판' 〈1〉

다음은 미국의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인 찰머스 존슨 교수가 그의 '미 제국주의 비판 3부작(Blowback Trirology)'의 마지막 책, 〈네메시스(Nemesis)〉의 발간을 앞두고 행한 인터뷰의 전문이다. 존슨 교수는 지난 2000년 〈블로우백〉, 2004년에는 〈제국의 슬픔들: 군사주의, 비밀주의, 그리고 공화국의 종말〉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헤치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의 미 제국주의 비판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의 독특한 전력 때문이다. 그는 학자로서는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통산성 연구'를 통해 2차대전 후 일본의 비약적 경제성장이 미국식 자유주의경제 모델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개발국가(Deveopmental State)' 모델 때문임을 처음으로 밝혀내 동아시아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시민으로서 그는 1950년대 초 미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67-1973년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베트남전쟁을 찬성했고, 냉전 당시 소련이 미국의 주적임을 굳게 믿었던 전형적 미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행로를 지켜보면서 미 제국의 통렬한 비판자가 된 것이다. 그의 논지의 핵심은 미국은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해 미국의 이익에 봉사토록 하고, 오로지 군수경제만으로 경제를 지탱해가는 과도한 군사주의의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00년 발간된 〈블로우백〉의 서문에서 자신의 70년대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나의 문제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반면, 미국의 국내정치와 펜타곤에 대해서는 너무도 순진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때 반전데모를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들의 모든 유치함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옳았고 미국의 정책은 틀렸다."

그는 또 74세의 나이에도 미 제국주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 제국주의는 아직도 학문적 주제로는 금기시되고 있다. 나는 이제 편안하게 은퇴한 노인이고, 학자로서도 성공적 경력을 쌓아 왔다. 오늘날 누군가가 앞장을 서지 않으면 젊은 연구자들이 미 제국주의 연구에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구자가 필요한 것이다. 내 밑에서 공부했던 몇몇 대학원생들이 내게 "교수님, 교수님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 나서지 않으면서 저희더러 '터키 미군기지 주변의 집창촌이 터키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같은 주제를 연구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희들 말은 한번 해보시라는 겁니다. 이거 아주 좋은 연구주제예요.'"

찰머스 존슨 교수는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 샌디에이고캠퍼스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일본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는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톰디스패치(Tomdispatch.com)〉의 운영자 톰 엔젤하트가 진행했다. 원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6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ItemID=9962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ItemID=9963 〈편집자〉

***"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냉전은 영원히 지속될 것"**

톰 엔젤하트(이하 '톰'): 선생의 인생에서 '진실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 즉 냉전의 종식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 보죠. 냉전의 종식은 선생에게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찰머스 존슨(이하 '찰머스'): 나는 '냉전의 전사(cold warrior)'였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나는 소련이 진짜 위협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소련이 이상주의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중에는 지금도 '인터내셔널가'만 울려 퍼지면 벌떡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수 십 년 전에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소련공산당의 만행에 실망한 나머지 현실사회주의와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나는 소비에트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저 무시무시한 군사기구들, 그 규모와 거기에 투입되는 엄청난 자금,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지적했던 군산복합체의 등장 및 성장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소련의 존재, 나아가 미국에 대적하려는 소련의 의지 외에는 없습니다. 소련이 전세계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대단히 강력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소련의 약점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전성기였던 1978년에 모스크바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라도 '소련에는 소비자경제란 게 없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부 연구기관인) '미·캐나다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더군요. 값비싼 그루지야산 백포도주에 쿠바산 시가까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일반가게에선 보드카 외에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정말 험한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네들도 아주 잘 하는 일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미국의 미사일방어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어떤 미사일방어망도 깰 수 있는 무기를 나라를 가진 나라는 현재까지 러시아, 단 한 나라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직도 토폴-엠(Topol-M), 미국에서는 SS-27이라고 부르죠, 이 미사일에 필적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스타워즈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자 소련의 매우 영리한 무기제작자들은 '그래, 우리가 못하게 해줄게'라고 말했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모이니한 상원의원이 말했던 것처럼 1980년대에 소련경제가 엉망이 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낌새도 채지 못한 중앙정보국(CIA)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1년에 320억 달러나 되는 예산을 쓰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소련경제가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말이 되는 겁니까?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결단을 내립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았던 거죠. 고르바초프로서는 러시아의 장래를 위해서는 스탈린이 만들어놓은 동유럽의 가난한 위성국가들보다는 독일, 프랑스와의 우호관계가 훨씬 중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그 결과 소비에트제국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면 이와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질지 모릅니다. 미 제국도 일단 붕괴가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붕괴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소련은 내부적으로 붕괴했습니다(imploded). 나는 소련의 사례가 미국의 장래를 보여주는 예언적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냉전이 끝났죠. 승리배당금, 즉 진정한 평화배당금을 챙겨야 할 순간이 온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미국은 예전에 큰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우리는 매우 신속하게 군비를 감축했습니다. 물론 1947년 이후 훨씬 더 신속하게 군비증강에 나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우리 군부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9년이 되면서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상으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군산복합체의 존재이유, 즉 펜타곤의 거대한 관료기구와 전세계 바다를 떠다니는 우리 군함들, 그리고 수많은 미군기지들이 계속 있어야 할 모든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즉각, 조건반사적으로 또 다른 적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지도자들로서는 냉전시기의 군사기구들을 철폐한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건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 국민들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한마디로 재앙이었습니다. 당시엔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었죠. 그는 즉각 아프가니스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끝났다', 이런 얘기였죠.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비밀공작, 그리고 이를 위해 투입된 그 엄청난 비용과 희생을 뒤로 한 채 그냥 손을 떼어버린 겁니다. 그러자 1980년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우리가 발굴하고 지원했던 아프간인들은 즉각 우리를 적으로 간주했고, 우리에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습니다. 최대의 블로우백(blowback: 미 정보기관이 사용하는 용어로 미국의 비밀공작이 초래한, 예기치 못한 역작용을 지칭함)은 물론 9.11이었습니다만, 그 이전에도 크고 작은 블로우백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냉전은 끝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 즉 냉전 때와 똑같은 구조, 똑같은 군사케인즈주의, 그리고 무기제조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가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가장 중심적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냉전은 실제로는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허울에 불과했단 말인가? 어떤 다른 목적이란 2차대전 기간 동안 대영제국의 후계자로서 의도적으로 미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냉전은 우리가 늘 주장해 왔던 것처럼 전체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경계선이 분명한 대결이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 어느 시점의 서유럽에서라면 이러한 주장, 즉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세계적 맥락에서 관찰한다면, 중국, 그리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치렀던 2번의 전쟁,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고려에 넣는다면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로서는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똑똑한 학부생들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아주 여러 번 말입니다. "교수님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때마다 케인즈 경의 유명한 말로 대꾸를 했습니다. 자신의 입장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질문을 받은 이 영국의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저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저의 입장을 재고해 봅니다. 귀하께서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뭘 하십니까?'

국제관계를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검토해 보자는 결심을 굳히게 된 데는 소련이 붕괴되고 5년 후 제가 겪은 개인적 경험도 한몫을 했습니다. 1995년 가을에 오키나와 현지사의 초청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했는데 당시 그 섬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995년 9월 4일, 미 해병 2명과 해군 병사 1명이 12살 난 오키나와 어린이를 강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일본에서,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이후 최대의 반미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저는 일생의 대부분을 일본 연구에 바쳐 왔지만 오키나와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와이 군도의 카우아이 섬보다도 작은 그곳에 32개의 미 군사기지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 미군의 존재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압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선량한 냉전의 전사로서 저의 첫 반응은 '오키나와의 사례는 분명 예외적인 경우일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언론도 오키나와 사태를 보도하지 않았고, 오키나와가 미국의 군사식민지임이 분명하며, 게다가 1945년 오키나와전투 이래 미군이 계속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라지(Raj: 영국의 인도 식민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키나와의 사례는 충격적이고 불행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거대한 군사기구 중에 아주 예외적인 사례라고 치부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 뒤 공부를 해나가면서 저는 오키나와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미 해외 군사기지의)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의 군사기지에서는 오키나와와 같은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톰: 미국이 지구상에 군사력을 배치하고 있는 방식, 이것이 선생께서 미국의 세계적 위상을 재고하는 데 핵심적 요소가 되었군요. 사실 선생의 최근 저서 〈제국의 슬픔들〉에서도 펜타곤의 미군 주둔 방침에 관한 부분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미 군사기지에 대한 선생의 지적에 그다지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찰머스: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이 미국 안에 있는 거대한 군사보호구역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원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기 마련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전혀 자연스럽지가 못하거든요. 이들 군사시설은 인위적인 데다가 비용도 엄청나게 잡아먹고 있습니다. 최근의 현상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군사기지 폐쇄발표에 대한 시끌벅적한 논란들입니다. 쓸모가 없어진 군사시설을 폐쇄하는 것은 펜타곤으로서는 지극히 논리적인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군산복합체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양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는 '공급 중심의 경제학'이라든가 '래퍼 커브' 등과 같은 그럴 듯한 말로 현실을 은폐하려 합니다.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한다'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대공황시대의 고용증진국(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은 때때로 '땅 파고 다시 메우는 일 시키고 돈 주는 곳'이란 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폭탄 만들어 팔아먹는 일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무기들과 비교해보면 미제 무기가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대단히 많은 무기를 매우 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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