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가본 뉴욕 맨해튼은 시대정신이 살아 숨쉬는 활기찬 공간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뉴욕대학(NYU) 바로 곁에 붙은 '워싱턴 스퀘어' 광장에 모여선 젊은이들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추는 비보이 춤 때문이냐고? 아니면 소호(Soho) 거리에서 비틀즈 흉내를 내며 "I wanna hold your han~d~♪♬" 노래를 부르는 히피 풍의 4인조 청년들 때문이냐고? 딱히 그들 때문만은 아니다. 꼭 집어 말한다면, 맨해튼에서 만난 '젊은 노인들' 때문이다.
뉴욕대 부근에 사는 미리암 할머니(88세) 아파트에 들렀더니, 거실 한구석 테이블 위에 유화 물감들이 흩어져 있다. 3월 19일 맨해튼에서 열리는 이라크전쟁 반대집회에 들고나갈 피켓을 만드는 중이었다. 피켓은 한눈에도 익살맞아 보였다. "이라크에 폭탄 대신 부시를 떨어뜨리자"는 문구 아래로, 부시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그린 희화(戱畵)였다.
(사진설명)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해 반전집회에 참석한 한 미국인 노인부부. '정권 교체, 부시 축출' '거짓말은 희생을 낳는다'는 반전구호들을 모자에 붙였다.(사진 @김재명)
뉴욕대 교육학 박사 출신인 미리암은 이미 고인이 된 남편과 함께 참석했던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전집회를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말한다.
"그땐 참 대단했는데….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데에 관심이 없나봐. 반전집회에도 잘 안 나오고…."
***반전집회와 극장을 메우는 젊은 노인들**
맨해튼엔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노인들이 몰려 산다. 고구마처럼 길쭉한 모양을 지닌 맨해튼에는 월 스트리트를 비롯한 금융가, 타임 스퀘어 같은 상업지역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아파트다. 집을 나서면 음식점을 비롯한 바로 편의시설들이 많고 각종 전시회나 음악회 등 시간을 보낼 곳들이 널려 있기에 노인들에겐 살기 편하다.
뉴욕 맨해튼에서 8년을 지내면서 미국 노인들로부터 느낀 두 가지 인상적인 특이사항. 첫째, 대규모 반전집회가 열릴 때마다 매우 많은 70대, 80대 '젊은 노인' 참석자들을 만난다는 점. 미국의 이라크 침략 3년을 맞아 지난 3월 19일 서울역 앞에서 열렸던 이라크 파병철회 촉구집회 등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다.
노년층이 반전 집회장의 주요 구성원을 이룬다? 각종 여론조사를 들여다보면, 미국 노년층의 반전 의식이 20대나 30대보다 높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지금도 기억하는 세대다.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에 반대하며 격렬한 반전집회를 벌였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다. 민주당 지지세가 압도적인 뉴욕 맨해튼의 노인들은 집회장에서 저마다 반전 메시지가 적힌 작은 피켓을 들고 "No War!"를 외쳐댄다.
맨해튼에서 발견한 두 번째 인상적 특이사항은 극장이나 연주장의 주고객은 노년층이라는 점. 맨해튼을 비스듬히 남북으로 잇는 도로인 브로드웨이를 따라 걷다보면 많은 극장들이 눈에 띈다. 날마다 그곳들에선 뮤지컬이나 연주회 따위의 공연이 벌어진다. 그런데 극장을 꽉꽉 채우는 사람들은 뉴욕에 사는 젊은이들이 아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예술의 전당이나 남산 기슭에 자리한 국립극장을 가보면, 대부분의 관객이 데이트 하는 젊은 남녀들이다. 맨해튼의 극장에선 풍경부터가 다르다. 맨해튼의 극장주들이 고맙게 여기는 관객들은 두 부류다. 하나는 뉴욕을 즐기겠다고 마음먹고 온 관광객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뉴욕 일대의 노인들, 특히 맨해튼에 사는 노인들이다.
***자원봉사로 제2의 삶 즐긴다**
그렇다고 뉴욕 노인들이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들이라고 상상해선 곤란하다. 많은 노인들이 자원봉사로 나름의 의미 있는 노년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다. 자원봉사의 형태는 가지가지다. 몇 가지 보기를 든다면,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의 말동무를 하거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의 안내원 일을 맡거나, 맨해튼 곳곳에 자리 잡은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한다거나, 잠잘 곳이 마땅찮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룻밤 쉴 곳을 제공하는 '노숙자 쉼터(homeless shelter)'에서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의 인생상담을 해준다든가….
우리 한국은 아직 자원봉사 개념이 약하지만, 미국은 자원봉사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자원봉사는 사회생활의 일부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연방정부나 주정부에서는 자원봉사 경축주간을 두고 있을 정도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절반이 1년에 100시간 이상을 자원봉사로 보낸다. 자원봉사자들의 사회적 기여도를 돈으로 치면 무려 16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지난해 여름 카트리나 태풍이 미국 남부를 몰아쳤을 때는 7만4000명의 자원봉사자가 나섰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이 들어 은퇴한 노인들이다.
맨해튼 23가 웨스트 50번지에 자리 잡은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도 맨해튼의 '젊은 노인'들이 자원봉사를 하겠다며 즐겨 찾는 곳이다. 국제센터는 뉴욕으로 몰려드는 외국인들이 언어장벽 탓에 낯선 미국생활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덜어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다. 그곳에는 노인 봉사자들이 '생존을 위한 영어(survival English)'를 배우겠다는 외국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1대1 파트너로 1주일에 한번씩 만나 말벗을 해준다. 봉사자들 가운데는 대학교수 출신도 있고, 교사 경력을 지닌 이들도 많다. 몇몇 노인들은 제법 짜임새 있는 영어교실들을 열고 수강생들을 맞이한다. 이 글 앞에 나오는 미리암도 필자가 국제센터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파트너였다.
***한국 노년세대의 한 모델 될 수도**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퇴직한 뒤 국제센터에서 15년째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왔던 산드라(76세). 그녀도 필자의 파트너였다. 이번 여행길에 그를 뉴욕이 아닌, 멕시코의 한 작은 도시에서 다시 만났다. 도시 이름은 샌 미구엘 드 아옌데. 멕시코 시티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쯤 달리면 갈 수 있는 곳이다.
16세기에 스페인 식민자들이 세운 이 도시는 고풍스런 성당들, 그 앞의 작은 광장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곳이다. 인구 8만의 이 작은 도시에는 해마다 겨울철(11월-3월)이면 수천 명의 미국인 노인들이 머문다. 햇살이 따스하고 공기가 맑아 1940년대부터 미국인들이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 언론에서 '은퇴 뒤 살기 좋은 곳' 베스트 1, 2위로 꼽혀 부동산 값이 치솟은 곳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세운 신문사(주간지), 도서관과 공회당, 교회들이 있고, 병원들도 종류별로 있다.
산드라의 그곳 하루들도 자원봉사로 채워진다. 그녀는 '무헤레스 깜비오'(우리말로는 '바뀌는 여성들')의 간부로서, 회장인 마지(83세, 유엔 관리 출신)를 도와 아침부터 바삐 움직인다. 10년 역사를 지닌 무헤레스 깜비오는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장학단체다. 멕시코 농촌 여성들은 14-15살쯤 되면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남자들과 결혼, 18살이면 벌써 2-3명의 아이를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 현상을 바꿔보려는 것이 무헤레스 깜비오의 목표다. 현재 135명의 농촌 여학생들에게 한달에 20달러씩의 장학금을 주며, 올해 새로 대학에 들어간 23명의 여학생들에게도 등록금을 대준다.
산드라와 마지는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미국의 후원자들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내거나, 예비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낮에는 멕시코 학교들을 돌아다니며 현지 선생들로부터 장학생 추천을 받거나 새 장학생에 뽑힌 여학생들을 만나보기도 한다. 마지는 이 일에 전념하려고 미국 집을 팔고 샌 미구엘 드 아옌데로 아예 옮겨왔다.
산드라와 마지도 앞의 미리암처럼 반전주의자들이다. 예전에 뉴욕에서 열리던 이런저런 반전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해 왔다. 그들은 무헤레스 깜비오 일이 지구촌 평화운동의 하나라고 믿는다. 자원 봉사에 참여하는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 노인들보다 삶에 더 큰 활력을 느끼기 마련이다. 산드라와 마지야말로 글로벌 시대 우리 한국 노년세대의 한 모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위의 글은 〈한겨레신문〉 4월 7일자에 실린 필자의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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