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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해체'가 국립묘지 못갈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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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해체'가 국립묘지 못갈 죄냐"

[인터뷰] 강창성 씨 유족 "소송으로 빼앗긴 서훈 찾겠다"

최근 정부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관련자·각종 비리에 연루된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 등 176명에 대한 서훈(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주어지는 각종 훈장)을 무더기로 취소했다. '과거사 바로잡기'의 일환이었다.

무더기로 서훈이 박탈된 명단에는 지난 2월 별세한 고 강창성 장군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80년 외환관리법 위반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로 3년 형을 선고 받아 '비리 연루자'로 분류됐다. 같은 이유로 고 강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도 거부당했다.

유족들은 정부의 이같은 조치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유족들은 강 전 장군이 '3년 형을 받았다'는 물리적 기준 보다는 '왜 3년 형을 받았는지'에 주목해 줄 것을 요구한다. "하나회 해체에 앞장서고 신군부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3년 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이 유족 측의 주장이다.

고 강 장군의 유족 중 맏딸 정현 씨(51·예원학교 부장)는 기자와 만나 "율곡비리 연루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는데 5공에 맞섰던 선친이 거부당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족 측은 국립묘지 안장안을 재심의하고 서훈박탈을 취소하기 위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국립묘지 안장 때까지 화장한 유골을 자택 서재에 모실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3일 서울 시내에서 1시간 가량 진행된 강정현 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정현 씨는 이 자리에서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친과 하나회 간의 해묵은 악연이 결국 오늘날의 부당한 조치를 만들어낸 뿌리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전두환 제안 뿌리친 후, 며칠 만에 죄목도 없이 체포" **

프레시안: 고 강창성 장군은 16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현직으로 물러났다. 2월 14일 별세할 때까지 어떻게 지냈나.

강정현: 선친은 16대 국회 막바지부터 건강이 안 좋으셔서 투병생활을 하셨다. 16대를 끝으로 후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정계 은퇴를 하신 후 병원을 다니면서 조용히 사셨다. 5공 때 수감생활을 하시면서 2년 반 동안 몸무게가 20kg 정도 빠지셨는데 그때 얻은 급성 당뇨가 지병이 돼 돌아가셨다.

프레시안: 유족들은 고인을 국립묘지로 모시기를 원했으나 심의위원회에서 안장안을 부결시킨 것으로 안다.

강정현: 보훈처 심의위원회에서 안장안을 부결시켰다. 심의 당시 보훈처에서는 대부분 안장에 찬성했다고 들었는데 민간인 심의위원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선친이 5공 때 3년 형을 받고 징역을 살았다는 것이었다. 선친이 형을 살아야 했던 이유와 관계없이 3년 형이라는 물리적 잣대만 들이대 안장안을 부결시킨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고 강 전 장군이 3년 형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3년 형 이상을 받은 '비리 연루자'들은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원칙 아닌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강정현: 선친은 하나회를 해체하고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은 탓에 5공 세력에 괘씸죄를 사 징역을 살았다. 아버지가 보안사령관이던 1973년 일명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에 손을 대게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하나회의 관리를 윤필용 장군과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맡겼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알력이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윤 장군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대화를 하다가 말 실수로 "형님이 대통령 하고…" 하는 얘기를 했던 것을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박 실장에게 전했고, 그 얘기가 박 대통령 귀에까지 들어가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윤필용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고 수사를 시작했는데 파다 보니 하나회가 나왔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박 실장이 수사 중단 사인을 내렸는데도 아버지는 불응했고, 이 탓에 결국 옷을 벗게 되셨다.

***"장롱 안에 1300불 탓에 3년 형 선고 받아" **

그 뒤 1980년 신군부가 득세하던 무렵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선친을 불러들여 여러 가지 제안으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5·16으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끝내고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체포됐다. 죄목도 없이 우선 체포하고 나서 수사관들이 집에 들이 닥쳤다. 구둣발로 두 번이나 집을 뒤집고 다닌 끝에 그들이 찾아낸 것은 장롱 안에 있던 1300불 가량의 달러였다. 아버지가 당시 해운항만청장이셨는데 출장을 갔다가 남은 돈을 넣어 두신 것이었다. 당시 1불에 500원 하던 환율로 치면 60만 원 남짓하던 돈인데 이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걸고 넘어졌다.

두 번째로 끄집어 낸 것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이었다. 당시에는 청마다 로비 자금으로 쓰려고 마련한 비자금이 있었는데 그걸 찾아낸 것이다. 개인의 부정이 아니라 청에서 만들어 놓은 돈인데 개인의 비리인 양 뒤집어 씌워서 3년 형을 선고했다. 두 가지 모두 공정하게 판결을 받으면 집행유예 정도밖에 안 될 죄목을 갖고 과도한 형을 선고한, 명백한 정치 보복이었다.

당시에는 신군부 쪽에서 아버지를 체포하고 나서도 정보를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1년 쯤 후에 소문이 이상하게 나니깐 공개를 해 '이 사람들이 잡아가고도 켕겼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2년 반 후에 가석방으로 옥에서 나오시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실 때 몸무게가 76kg였는데 55kg 이하로 살이 빠지셨고 급성 당뇨가 와서 대단히 위독한 상황이 있었다. 서울대 교수가 영등포 교도소에 검진을 와서 너무 위독하니 병보석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 때 아마 유학성 안기부장이 병보석 하자고 했는데 신군부 핵심 쪽에서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프레시안: 항소를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안 했던 건가.

강정현: 아버지는 정치보복이 뻔한데 항소는 해서 뭐 하냐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90년 출간된 아버지의 저서 〈일본 및 한국의 군벌정치〉 머리말을 보면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담당 변호인이 상고를 주장했지만 권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던 그 시절의 재판에서 사법부인들 소신을 지켜나갈 수 있겠냐는 생각에 반대했다"고 쓰셨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때 항소를 해서 몇 달이라도 형을 줄였으면 3년 형에 딱 걸려서 서훈이 박탈되고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는 상황에 오지는 않았을 텐데 싶어 안타까움이 크다.

***"감시 못 견뎌 일본행…16대 신한국당 행은 '합당' 때문" **

프레시안: 징역을 살고 14대 국회의원으로 공직에 복귀할 때까지 생활은 어땠나.

강정현: 아버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을 떠나셨다. 일단은 아버지 당신이 국내에 있기 굉장히 불편해 하셨고,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 한국을 떠나 있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도청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집 앞에 감시원이 24시간 상주했다. 어머니가 병원을 가도 쫒아오고 시장을 가도 쫒아 와서 남들 보기 창피할 정도였다. 우리 집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다 체크하고 들여보냈으니 그 생활을 견딜 수 있었겠나.

84년 초에 동경대학에 자리가 나서 가셨는데 당시 안기부장이 아버지를 보자고 해서 전두환 대통령 명의로 두툼한 봉투를 줬다고 한다. 전두환, 허화평 입장에서는 물론 홀가분한 일이었겠지만 한 편으로 미안한 게 있지 않았겠냐. 아버지는 거절하셨다. "받진 않겠는데 혹시 내가 안 받아 안기부장이 난처한 처지가 되면 당신이 알아서 쓰시라"고 말씀하신 걸로 안다.

일본에 가셔선 한국과 일본의 군벌 정치사를 연구하셨다. 그 기간이 아버지로서는 생을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일본으로 찾아가 뵌 적이 있는데 운동화 신고 지하철 타고 우동 사 드시면서도 너무 열심히, 즐겁게 생활하셨다.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국에서 노태우, 전두환, 허화평 얼굴 보는 것보다는 낫겠구나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연구하신 것으로 책을 내시려는데 유수한 출판사에서 계약을 하자고 하다가 막상 계약할 때가 되니 슬금슬금 피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 책을 출판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할 수 없이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책이 잘 팔려서 그 출판사가 사무실을 넓혀서 옮겨 갔다고 들었다.

프레시안: 14대에 복귀해서 16대에는 신한국당으로 갔다. 5공과 악연을 생각하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다.

강정현: 14대 정계 복귀를 할 때 김대중 당시 총재가 비례대표를 줘서 민주당으로 당선이 됐다. 15대 때도 민주당으로 출마하셨으나 낙선하셨는데 그때 김 총재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차려 나갔고 이기택, 조순 씨가 공동 대표인가 그랬다. 그러다가 신한국당과 합당이 돼서 옮겨간 것이다. 당시에 갈등이야 조금 하셨겠지만 혼자 옮긴 게 아니라 당 대 당 통합이 됐는데 총재 권한대행까지 지낸 사람이 당의 결정에 불복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또 당시 신한국당 총재는 이회창 씨였는데 군사정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닌가. 이 총재와는 마음도 잘 맞는 편이고 하셔서 큰 부담없이 가신 걸로 안다.

***'괘심죄 3년형'으로 서훈 박탈? 오히려 훈장 더 줄 일**

프레시안: 국립묘지 안장이 부결되는 과정에서 징역을 살았던 배경은 참작되지 않았나.

강정현: 3년 형 이상을 선고받은 자는 안장될 수 없다는 임의 규정이 얼마 전에 생겼는데 단순히 그 잣대 하나 때문에 국립묘지 안장이 거부됐다.

프레시안: 최근 서훈 박탈자 명단에도 포함됐다.

강정현: 전두환, 노태우, 허화평에게 준 서훈을 박탈한 것은 당연한 조치다. 12·12, 5·17, 5·18을 저지른 공로로 받은 훈장 아니냐.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6·25 전쟁에서 받은 훈장이다. 본인으로서는 가장 명예로워 하셨던 화랑 무공훈장, 충무 무공훈장을 다 받으셨는데 이 역시 3년 형을 받았었다는 이유로 취소됐다. 당시 전쟁에서 아버지 동기생의 반 이상이 전사하셨고 아버지도 허벅지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으셨다. 목숨을 걸고 나가 싸워 받은 훈장인데 신군부 서훈을 취소할 때 도매급으로 취소됐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책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신군부에 반대만 안하고 가만히만 계셨어도 3년 형 사셨겠냐. 신군부에 동조하지 않은 것이 괘씸죄로 걸려 3년 형을 받은 것인데 이걸 문제 삼아 서훈을 박탈한 것은 언어도단이다. 오히려 훈장 하나 더 줘야 할 일 아니냐.

프레시안: 유족들이 따로 대응할 생각인가.

강정현: 부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서 서훈 박탈 취소와 국립묘지 안장을 위한 탄원과 행정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변호사를 통해 준비 중이다. 80년 당시 수사관들의 명단도 입수했다. 전해들은 바로는 수사관들은 정당하게 수사하려고 했는데 상부 압력이 내려왔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 분들을 통해 당시 수사가 보복성의 무리한 수사였다는 것을 밝히고 선친의 명예회복을 해 드리려고 한다.

***"〈중앙일보〉 부음기사, 가해자 증언만으로 망자 명예 훼손" **

프레시안: 〈중앙일보〉에 실린 강 장군 부음 기사는 "우리는 강씨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교도소에서 강씨가 주장하는 그런 교육은 없었다"는 허화평 씨의 말을 인용했던데 지금 얘기하는 것과는 맥락이 많이 다르다.

강정현: 〈중앙일보〉 부음 기사 중 수정을 요청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버지가 '이북파의 리더'라 하나회를 친 것이라는 설명인데, 아버지의 고향은 포천으로 38선 위로 편입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하나회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논리다. 선친은 이북출신 장교들이 부당하게 하나회 중심의 영남군벌에 의해 차별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북 출신들을 보호한 것이지 이북출신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회 쪽의 일방적 주장을 사실 확인 없이 보도한 것으로 재경 포천군민회가 <중앙일보>에 항의해 '포천이 이북이었다는 것은 오기'라는 정정보도가 나간 것으로 안다.

허화평씨의 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영등포 교도소에 계시면서 삼청교육과 같은 순화교육을 받으셨는데 〈중앙일보〉는 이를 허화평씨 말 하나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가혹한 훈련을 받은 것은 한완상 전 부총리가 목격하셨고, 이신범 전 의원도 관련 증언을 해 주셨다. 목격자들이 있는데 가해자인 허화평씨의 말만으로 없던 일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는 돌아가신 망자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더러 인간적인 도의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박스 시작〉

***"강 장군이 혹독하게 훈련받는 장면 비디오로 찍기까지 했다"**

강 장군이 1980년 수감되어 있던 시절 교도소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유족들과 허화평씨 주장이 엇갈려 유족들이 목격자 중 한 사람으로 꼽은 이신범 전 의원을 통해 확인을 시도했다. 다음은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밝힌 이 전 의원의 증언이다.

82년 10월로 기억한다. 시국 사범으로 진주 교도소에 있다가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됐는데 비어 있던 큰 사동을 반으로 나눠 큰 방 쪽에는 나를, 작은 방 쪽에는 강 장군을 수용했다. 마주칠 기회가 많았고 만나서 얘기도 곧잘 했는데 강 장군이 자기가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친한 교도관들에게 "나이 많은 분을 저렇게 하는 게 맞냐"고 물었더니 교도관들이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위에서 시킨 게 있어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강 장군을 별도의 줄에다가 세워놓고 기합 같은 것을 따로 줬는데, 눈 위에서 사람을 막 굴리기도 하고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통나무 들기를 시키기도 했다. "나이 많은 분을 빼드릴 수 없냐"고 다시 한번 물었더니 교도관들도 "위에서 강 장군이 훈련 받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보내라고 한다"며 난감해 했다.

〈박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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