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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름들의 곱고 아름다운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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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름들의 곱고 아름다운 울림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7〉탑상편 '남월산'조

『삼국유사』 중에서도 탑상편은 우리나라의 탑과 불상에 관한 '족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전편이 전국 곳곳에 산재한 탑과 불상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만일 『삼국유사』 탑상편의 기록 내지는 언급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탑들과 불상들이 그 유래를 찾지 못하여 학술적으로 고아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그만큼 현존하는 많은 유적들이 『삼국유사』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단연코 일연의 현장 답사가 한몫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현장들 중 많은 부분을 직접 답사하여 확인함으로써 『삼국유사』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연은 탑상편 '남월산(南月山)'조의 현장도 답사했던 것 같다. 남월산이라는 이름은, 경주 동쪽 기림사가 자리하고 있는 함월산을 북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북월산의 남쪽 방향에 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중 '월산(月山)'이 우리말로 '달뫼'가 되었다가, 다시 '달다'는 뜻의 감(甘)으로 바뀌어 감산(甘山)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삼국유사』는 '남월산'조 제목 바로 뒤에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지 답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런 설명을 붙일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일연이 이 곳을 답사했다고 믿을 수 있다.

감산사 터는 불국사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다. 불국사 역에서 울산 쪽으로 가다가 괘릉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어서, 2km 남짓 길을 가다가 토함산 산자락이 시작되는 바로 그 언저리에 감산사 터가 자리하고 있다. 감산사 터에는 새로 커다랗게 지은 대적광전과 요사채가 덩그러니 앉아 있고, 그 뒷편 넓은 잔디밭에 옛 감산사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다. 잔디밭 가운데에 3층 석탑이 서 있고 연화대석을 비롯한 석재들이 드문드문 널려 있으며, 그리고 잔디밭 한 켠에 자그마한 석불이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들 3층 석탑이나 석불 등은 옛 감산사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들보다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감산사 출토 석조미륵보살상과 석조아미타여래상이 감산사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불상의 광배 뒷면 명문(銘文)에는 각각 그 불상의 조성 연대와 그 조성 경과가 적혀 있어, 감산사라는 절 자체가 석조미륵보살상과 동시에 조성되었고 그보다 몇 년 뒤늦게 석조아미타여래상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들 불상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조상기(造像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그 조상기 내용 중에 두 불상의 조성과 관련된 인물들의 직위나 집안 내력 같은 것이 명기되어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 '남월산'조는 두 단락의 간단한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기사는 감산사의 두 불상 광배 뒷면 명문(銘文)들을 각각 요약한 것으로, 두 기록에는 겹치는 내용이 많다. 그중 석조미륵보살상 부분의 기록을 옮기면 이렇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이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를 세우고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와,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 일당(一幢) 살찬, 총민(聰敏) 대사와 누이동생 수힐매리(首肹買里)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변 흔지(欣支)에 뿌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감산사의 석조미륵보살상과 석조아미타여래상은 일찍이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경주 일대 고적을 조사하던 중에 발견되어 서울로 옮겨져 있던 것들이다. 일제는, 1915년 경복궁에서 합방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할 때에 이 두 불상을 경복궁에 새로 지은 특설 미술관에 전시하였다가 공진회가 끝난 후 특설미술관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바뀐 후에도 그대로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 후 국보 81호, 82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게 된 것이다.

이들 두 불상은 미술사적 관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석조미륵보살상에 미술사학자들의 찬사가 모아지고 있는데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존용(尊容)은 갸름하면서도 풍려하고, 감각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서 석굴암 관음보살 얼굴의 선구(先驅)가 됨직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깨와 슬며시 드러낸 앞가슴하며 살짝 뒤튼 허리에서 여성미를 풍겨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관능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한 눈으로 보아 관능성과 비만성이 모두 나타나 있다. 터질 듯이 팽팽한 살집에서 육감적인 관능미를 느낄 수 있는데, 가슴을 가로지르는 천의(天衣)도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비사실적인 기이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자못 고혹적이다."

나는 그러나 '남월산'조 기사를 몇 번 연거푸 읽던 중에 기사의 핵심이 되고 있는 불상이 아닌, 전혀 다른 데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했다. 다름아니라, 명문에서 열거되고 있는 옛이름,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발원자 김지성은 명문에서 자기 부모와 형제, 누이, 아내 그리고 서형(庶兄)의 이름을 들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관초리, 고파리, 고로리, 아호리 그리고 수힐매리 같은 예쁜 이름들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우리 옛조상들이 한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고유의 이름들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남자들 이름 중에 이사부, 거칠부 같은 고유의 이름이 그 한역(漢譯) 이름인 태종(苔宗), 황종(荒宗)과 뒤섞여 쓰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름들이 점차 한역으로 쓰이게 된 것인지, 감산사 불상들의 명문에서 남자들의 이름은 김지성, 인장, 개원, 간성, 현도 등 모두 한자 식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와중에도 여성들의 이름은 우리식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 예쁘고 또 고맙기도 하다. 관초리, 고파리, 고로리, 아호리, 수힐매리…… 이 이름들이 천년 잠에서 깨어난 구슬인 양, 새삼 영롱한 울림을 내고 있는 것이다.

사진설명입니다.

사진 1, 2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및 수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사진 3 감산사 터 3층 석탑

사진 4 감산사 터 석불좌상

사진 5 감산사 터 연화문 석등 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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