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3선에 성공한 후안 도밍고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치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페론당)을 구축하고 국내 학자, 노동자, 정당지도자들을 총망라한 싱크탱크를 발족시켜 아르헨티나를 세계적인 복지국가의 모델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페론당 집권기간 중 사회민주주의를 완성하고 빈부 상호 간의 공정한 분배를 통해 모든 아르헨티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전국민이 일정부분의 개인 재산을 소유하며 누구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페론의 정치적인 업적에 대해서는 2004년 7월 2일 〈남미 리포트〉'페론이즘 의 실체와 포퓰리즘'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아르헨 학자들은 페론의 3선 기간을 '국가산업의 재건과 빈곤층의 해방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아무도 페론만큼 아르헨티나 경제부흥과 부의 공평분배를 이룬 지도자는 없었다는 평가인 것이다.
노조를 장악한 페론 정부는 임금이나 공산품 가격 인상 없이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으며 세계최고의 복지국가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꿈이자 아르헨 서민들의 희망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임기 도중인 1974년 7월 1일 78세의 나이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하직했다.
페론 사후 정권을 물려받은 이사벨 페론 역시 당정이 혼연일체가 돼 '페론이즘'의 완성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게 이곳 학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무력으로 정권을 움켜쥔 군부는 "우리 임기 중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 페론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잊게 해 주겠다"며 야심찬 신경제계획을 추진했다.
페론 시절보다 훨씬 잘 사는 아르헨티나를 건설하겠다는 게 쿠데타를 주도했던 군 수뇌부의 반란 명분이었다. "군부의 이런 당찬 야심 뒤에는 외국의 'plata dulce(달콤한 자금: 단기외자를 지칭하는 말)'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이곳 언론들은 분석하고 있다.
1976년 정권을 잡은 군부는 당ㆍ정은 물론 노조지도자, 민간기업 대표들을 장악하고 언론을 통제한 다음, 페론의 경제지표를 분석하고 충격요법으로 단시일 내에 경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다분히 페론을 의식해 실적 위주의 무리한 정책을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기응변 식의 경제처방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외국자본에 의지한 수입위주의 경제처방을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밀어 부친 경제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게 이곳 학자들의 평가다.
군정 당시 실종된 인사들의 자녀들 모임인 HIJOS의 한 간부는 "당시 미국은 달러 가치의 하락과 함께 석유파동으로 경제적인 돌파구를 찾고 있었으며 영국 또한 전국적인 파업과 불황 등으로 해외에서 금융자본을 통한 돈 장사로 수익 증대를 노리며 신자유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미국가들을 그들의 영업 타깃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남미를 주 금융시장으로 선택한 영ㆍ미의 금융지원은 아르헨 군부에게 달콤한 자금이 되어 처음에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으나 나중에는 원금상환과 과중한 이자부담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멍에가 되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의 금융기관도 남미 국가의 군사정부들을 향해 비교적 쉽게 영업의 영역을 넓히고 금융수익을 챙겨갔다는 게 관련전문가들의 증언이다.
아르헨 군부는 지나치게 해외자본에 얽매인 경제구조가 페론이즘의 소득 재분배 정책에 역행하는 것은 물론 경제파탄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또 사회조직과 정치, 노조 단체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해 일상적인 생산활동을 할 수 없게 했으며 생산구조는 물론 교육과 문화활동을 위축시키기도 했다.
이곳 학계와 경제계는 "군부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외국자본을 주체하지 못해 생산활동보다는 금융시장만 활성화시키고 은행조직과 증시만 인위적으로 키웠다" 면서 "군정 초기 연 6%이던 국제금리가 군정 말기인 82년에는 14%로 급상승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야말로 빌려줄 때는 달콤한 해외자본이었으나 갚을 때는 쓴 잔이었던 것이다.
또한 밀물처럼 밀려든 외국자본들은 국내은행권과 증시를 장악하고 그들 마음대로 금융시장을 주물렀으며 국내이자율을 연 135%까지 높여 돈장사가 최고의 산업이 될 정도였다고 이곳 언론들은 당시의 자료를 인용했다.
이와 함께 페론 집권 당시 80억 달러였던 외채가 군정 말기에는 450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군부는 이의 이자상환을 위해 액면가의 20~30%도 안 되는 국채(액면가 100달러짜리 아르헨 국채가 뉴욕증시에서 25달러에 거래되기도 했다)를 남발해 상환불능의'천문학적인 외채 국가'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군부는 가중되는 국제금융기관들의 원금상환 압력에 떠밀려 긴축정책을 단행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40%나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미 빠져나가기 시작한 해외자본으로 달러파동이 일어났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 와중에 자신들의 정치적인 성과 과시용으로 5억 달러 이상을 들여 월드컵을 유치하기도 했다. 이들은 월드컵 우승이라는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 분위기 반전을 노렸지만 이미 골병이 들기 시작한 경제를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영국과의 전쟁이라는 마지막 악수를 두어 몰락을 자초했다.
군정 말기였던 지난 80년대 초 아르헨 경제상황은 시간 별로 가격이 달라지는 초(超)인플레 현상을 기록했다. 심지어는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요금이 달라지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달콤했던 외국자본이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일시에 빠져나간 후 100만 아르헨티나 페소는 1달러 정도의 가치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화폐가치가 떨어져 '거지가 된 백만장자'라는 말이 시중에 회자됐다.
군부가 저지른 경제 실정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뼈를 깎는 고통을 맛보았다. 나아가 세계적으로는 경제가 파탄 난 국가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를 지금까지도 받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들의 힘겨운 노력으로 지난 91년부터 환율이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 기조로 돌아서 이제는 연 10% 안팎의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지만 7년 동안의 군사정치는 경제는 물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수만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또한 군부의 무자비한 철권통치는 아르헨 국민 모두에게 치유하기 힘든 커다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으며 공권력이 저지른 잔인한 범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5월의 광장 어머니회'의 보나피니 회장은 "역사는 늘 반복된다"면서 "우리는 역사의 실패와 성공을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가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군사정권시절의 과거청산에 매달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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