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이른바 '미묘한 변화'다. 지난 16일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조찬 간담회에서 언급한 이 발언을 계기로 국내 언론들은 미국의 대북 압박과 체제변화 시도가 본격화되었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한국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과 북핵의 평화적 해결 목표에 난기류가 형성되었음을 전제한 뒤, 한편으로는 우려하고 한편으로는 고소해하는 눈치였다.
우연하게도 필자는 당시 이 장관의 발언 현장에 있었고, 실제 이 장관의 그 발언은 필자가 던진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발언의 전후 맥락을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할 가능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자신감(?)으로 해서 최근 한반도에 조성된 정세변화를 객관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최근 북핵문제가 심상치 않음은 누구나 걱정하는 바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가까운 시일 내에 재개될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가 설사 열린다 하더라도 과연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핵문제 해결의 전망이 어두운 것은 제4차 6자회담이 무기연기되던 지난 해 상반기 상황과 유사해 보이지만 지금의 국면은 핵문제말고도 이른바 '북한문제'를 놓고 북미간 구조적 대결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북한의 체제전환을 노리는 미국의 대북 압박 외교가 전면화되면서 북핵문제 이외에 위폐, 인권, 마약 등 다양한 북한 이슈들이 부각되고 있다. 부시 2기 행정부의 대외정책 목표인 '민주 확산'과 '폭정 종식'에 따라 북한의 체제변환을 시도하기 위해 핵을 넘어 이제 인권과 민주주의 및 불법행위 차단 등의 본격적인 대북 압박을 시도하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WMD)의 이전을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확산저지구상(PSI)과 경제적으로 돈줄을 끊는 금융제재는 북한에 대한 전면적 압박의 성격을 짙게 갖는 것이다. 결국 '북핵문제'와 '북한문제'가 동시 병행적으로 진행되면서 북미간 갈등이 보다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북핵문제는 9.19 공동성명으로 일단 상황 악화를 막고 현상을 유지하면서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이란 핵문제와 팔레스타인 하마스정권의 탄생 등으로 북핵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중동의 후순위로 자리매김된 분위기다. 다만 미국은 북핵을 9.19로 관리하되, 민주확산론에 따라 북한에 대한 압박외교를 동시병행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즉 북핵은 서두르지 않고 9.19의 틀대로 진행하면 그만이고 오히려 북한의 체제전환에 기여하는 대북 압박은 원칙에 따라 지속하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최근에 보여지는 위폐관련 대북 금융제재 확대는 북핵과 분리된 별도의 북한문제를 미국이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과거에도 미국은 북한의 근본적 체제변화를 위해 다양한 압박을 시도할 욕심이 있었지만 이를 실제 정책으로 집행하기에는 다소 부담이 존재했다. 북핵이슈라는 당면 현안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의 강경반발을 불러올 대북 압박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지난 해 9.19 공동성명으로 북핵해결의 총론이 합의된 이후에 미국으로서는 북핵을 관리하고 현상유지할 수 있는 '틀'이 생겼다. 그리고 지난 해 가을부터 집행되었던 대북 금융제재-그것도 간접적 방식에 불과한-가 예상 밖으로 큰 효과를 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미국은 이제 북핵문제와 별도로 북한의 근본적 체제전환을 위한 다양한 대북 압박 외교의 효과를 충분히 깨닫게 된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압박외교에 대응하여 일단 6자회담을 카드화하여 금융제재의 해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지난 1월 베이징에서의 김계관-힐 회동으로도, 최근 리근 국장의 방미로도 미국의 입장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연초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을 통해 미국과의 정치적 타협을 원했던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도 '북핵 따로, 북한문제 따로'라는 미국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다.
당면 쟁점인 위폐 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일정한 양보 의사를 보이면서 체면치레용(face-saving) 접점 찾기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북한은 미국의 주장이 사실무근의 중상모략이자 날조라던 연초의 강경한 입장에서 바뀌어, 국제적인 반자금세탁 활동에 협력할 용의를 표명하고 현금거래 중에 위폐가 흘러들어 왔을 수 있다는 시인성 해명도 한 바 있다. 즉 북한은 위폐와 금융제재 문제에 대해 일정한 수준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을 인정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할 용의를 보이면서 북미 대화를 통해 미국이 금융제재를 품으로써 대북 적대정책의 철회를 실천하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체면치레용 절충 시도가 미국의 단호한 입장에 의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이제 북한은 전면적 대결까지 예상하는 '버티기' 전략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대미 대결의 장기화에 대비하는 이른바 '3년 버티기'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부시 행정부와는 북핵해결이나 북미관계 개선의 기대를 갖지 않고 임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전면적 대결 구도 하에서 체제유지를 꾀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인 것이다. 금년 신년공동사설에 대미관련 부분의 언급이 생략된 것이나 오랜만에 기간공업 및 농업부문 3개년 계획을 발표한 것 등은 이같은 버티기의 의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최근에 조성된 미묘한 정세 변화의 핵심에는 바로 이같은 북미 양자의 입장 변화가 놓여 있다. 미국의 '대북 체제전환용 압박 전면화'와 이에 맞서는 북한의 '대미 대결용 3년 버티기'가 맞부딪칠 경우 한반도에는 9.19 이후 오히려 더 심각한 구조적 대결 국면을 맞게 되는 셈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북미간 대결은 지난 해 상반기 6자회담 소강 상태에 비해 더 심각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해에는 북미간 직접 접촉이 국면 돌파의 계기가 되었던 반면 이번에는 고위급의 북미 회동이 있고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 구조적 교착이다. 체제전환을 목표로 한 미국의 대북압박 기조와 이에 맞선 북한의 3년 버티기 입장이 맞닥뜨림으로써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꽉 막힌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6자회담의 트랙 안에서 위폐를 논의할 수 있다는 최근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과 천영우 외교통상부 차관보의 한미협의 내용 등에서 드러난 새로운 상황도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즉 6자회담 내에서 위폐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한미가 의견접근을 보고 있다는 전언은 사실상 북한이 6자회담에 참가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되는 측면도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회담 재개가 성사된다 하더라도 회담의 난항 가능성이 더욱 커지면서 오히려 6자회담 자체에 대한 비관론이 대두될 우려도 존재한다.
그렇잖아도 북핵폐기 절차만 가지고도 북미가 머리를 싸매고 실천합의를 도출하기 힘든 형편인데, 여기에 양측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위폐와 인권 등의 양자 이슈를 6자회담 테이블에 올려놓고 '한 바구니'에 넣으려고 한다면 이는 사실상 합의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비핵화와 국교정상화, 평화체제와 대북 경제협력 등 모든 아젠다를 한 바구니에 넣어 한꺼번에 완전히 해결되어야만 문제가 풀린다는 이 방식은 부시 행정부가 좋아하는 이른바 'Bold Approach'로서 북한이 즐겨 쓰는 '일괄타결'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미국식 일괄타결'이다. 이는 오히려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이럴 경우 6자회담이 열린다 해도 사실상 그것은 회담의 무용성을 확인하는 것에 그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국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전에 북핵문제가 장기 정체되고 북미간 대결이 구조화되는 지금의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북한이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북 압박 정책이 지속될 것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미국더러 북한의 체제전환 시도를 포기하라고 한국이 설득하기는 해야 하지만 여전히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문제해결을 위한 더 빠른 길은 북한에게 미국에 먼저 양보하라고 설득하는 길일 것이다. 미국의 입장이 단호한 상황에서 북한이 핵문제 등에 분명한 성의를 보이거나 미국의 체제전환용 압박을 무력화시킬 만한 전면적인 개혁개방 의지 표명 등을 실제 행동으로 보이는 길이 오히려 미국의 대북 압박을 완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 방도임을 설명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북한에게도 유리한 것임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대미 대결의 장기화를 겨냥해 남북관계의 유지가 필요한 북한에게 우리의 요구는 나름대로 힘을 가질 수 있다. 무모한 '3년 버티기' 대신 미국의 변화를 유도할 만한 북한의 선(先)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한국 정부는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이종석 장관이 밝힌 '미묘한 변화'의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미국의 대북 압박 전면화'와 '북한의 대미 버티기'다. 그러나 이 미묘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제 한반도의 앞날에 '북한의 장래'가 구체적인 주요 변수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북한의 장래 모습 여하에 따라 미래 한반도 전략지도의 변화가 그려지며 그에 기초해서 각국은 자신의 국가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이해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실로 다양한 행위자들의 복잡한 계산이 시작된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집필 차례에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
중국은 대미전략 구도 하에서 북한의 자리매김에 대해 복잡한 타산을 요구받게 되고, 한국도 미래 한반도의 통일을 감안해서 북한의 장래 모습에 대한 현실적 고민을 시작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미국도 동북아에서 한반도 북부가 누구의 영향력 하에 있어야 하는지를 다각도로 계산해봐야 한다.
이래저래 지금의 한반도는 많은 고민거리와 복잡한 방정식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해가 되고 어려움만 가중시킬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정확한 정세분석에 기초한다면 오히려 우리의 주체적 대응 여하에 따라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묘함'은 도전이자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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