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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가권력에 의한 언론탄압 실상 제대로 밝혀져야"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3/23]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양진 총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1975년 '백지광고 사태'를 맞아 동아일보에 격려광고를 냈던 시민들에게, 오는 4월 1일 동아일보사 앞마당에 모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격려광고를 보냈던 시민들은, 지금은 아마도 40대 후반에서 80대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데요, 과연 얼마나 많은 광고주들이 모일지.. 기대가 됩니다. 박정희 정권과 언론사 사주의 언론탄압에 맞서, 자유언론 수호를 외치다 강제해직 당했던 동아투위 멤버들.. 올해도 역시,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강제해직의 진상과, 배후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는데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동아투위 기자들의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과, 앞으로 밝혀져야 할 진상들은 무엇인가, 당시 해직된 기자 중에서, 동아투위, 조양진 총무와 함께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양진 총무입니다. 조양진 위원은,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후, 경향신문의 월간경향 부장, 〈뉴스메이커〉 부장, 경향신문 출판국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박인규 : 조양진 총무님, 안녕하십니까?

조양진 총무 :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인규 : 동아투위에 계신 분들이, 3월 17일이 31년 전에 동아일보에서 강제로 해직되신 날이죠?

조양진 총무 : 네. 맞습니다.

박인규 : 그날부터 지금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만 31년이 지난 사안인데 아직까지 농성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조양진 총무 : 동아투위 위원들 다수가 모여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진상규명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를 촉구하는.. 동아일보 사측과 정부 쪽에 우리가 요구하기 위해서 농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인규 : 대부분의 언론인들이나 원래 관심이 있던 분들은 동아투위가 무엇인지 잘 알지만 일반 청취자분들은 이미 30여년이 지난 일이기 때문에 동아투위가 무슨 일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우선 이 동아투위가 왜 생겨났는지 그것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마 계기가 74년도 10월 24일에 있었던 〈동아 자유언론 실천 선언〉이었던 것 같은데요. 10.24선언이 무엇이었는지도 설명해 주시죠?

조양진 총무 : 우리 동아투위는 1974년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소위 유신 독재를 펼쳤습니다. 그런 독재정치는 국민들의 뜻과 대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언론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그들의 입장에서..그래서 언론의 자유를 탄압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알 권리, 말할 권리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니까 결국엔 참다 못해 할 수 없이 기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1974년 10월 24일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채택하고 편집국에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모두 모여서 앞으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기자들은 최대한 노력한다..그런 의미입니다. 본질적으로 10.24의 중요한 내용은, 첫째, 어떠한 외부의 간섭도 배제한다. 둘째,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셋째, 사원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이런 내용인데요. 이것이 지금 말로 하니까 참 평안하게 들리는데 사실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래서 그런 것을 배제하고 기자들이 지면을 어제까지와는 달리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이야기를 신문 지면에 반영하자..

박인규 : 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시고 나서 동아일보의 보도가 그 전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조양진 총무 : 네. 그 당시에 5대 금기사항이라고 했는데..

박인규 : 금기사항이라는 것은 언론에 보도할 수 없는..?

조양진 총무 : 네. 보도할 수 없는 거죠. 보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중요한 다섯 가지가 있는데요. 청와대, 대통령과 그 비서진은 물론이고 그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적인 기사는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체제, 유신체제라는 것을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집권여당..당시의 공화당..민주공화당도 비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군부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언론과 언론끼리 비판하는 것도 자제토록 했고요. 가장 재미 있는 얘기는 연탄 값이 올라가면 '연탄 값 인상'이라는 것이 제목인데 그 인상을 쓰지 못하고 '연탄 값 현실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놨는데..

박인규 : 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이후에 가장 큰 변화가 학생시위를 보도했던 것이라고 들었는데요?

조양진 총무 : 학생시위를 보도한 것이 변화였었고 학생시위를 보도하고 목회자, 기도회 이런 것들을 사회적으로 문제로 자꾸 다루니까 그런 것도 우리가 기사화하니까 정부로서는 불안했던 거죠.

박인규 : 그러니까 동아일보 지면에 학생시위를 비롯해서 어떤 저항의 움직임이 보도가 되기 시작하니까 정부에서 그 광고를 내지 못하게 한 겁니까?

조양진 총무 : 그렇죠. 당연하죠. 정부 비판기사 또는 자기 체제가 불안해 지는 기사를 싣게 되니까 정부로서는 독재권력이라는 것이 사실은 무력적인 측면을 빼면 아주 취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독재정권인데 그야말로 신문 언론에 그런 기사들이 나가면 독재권력으로서는 불안하기 그지 없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꾀를 낸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신문에 광고를 못 주게 하자..광고주로부터..그러면 신문사로서는 광고가 끊어지면 수입이 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항복할 것이다..그렇게 해서 결국은 사주가 항복한 거죠.

박인규 : 광고가 끊긴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조양진 총무 : 12월 중순부터입니다. 16일부터인가 그래요. 그렇게 시작되다가 1월부터 본격적으로 광고가 사라졌습니다. 하얗게..처음에 몇 개씩 남아있다가 그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거죠.

박인규 : 그 다음부터는 또 시민들이 격려 광고를 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그 당시에?

조양진 총무 : 그러니까 이 백지광고라는 전대미문의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이런 희귀한 현실이 벌어지니까 국민들은 비록 신문에서 자세한 기사는 보지 못하지만 다 알고 있죠. 독재자의 한 짓거리를.. '백지광고가 박정희 짓이다.' 그러니까 동아일보가 이렇게 핍박을 받는데 가만 있을 수 있느냐하고 누군가 시작한 것이 나중에 얘기가 나옵니다만 김대중 선생께서 제일 먼저 1호였다고 하더군요 백지광고를.. 그래서 시작된 것이 열화와 같이 상당히 감동적이면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또 자기의 의견을 이름은 익명으로 하지만 내용은 쓸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것에 아주 심한 말은 하지 못해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또 울분을 달래는 그런 내용들로써 격려 광고를 보냈죠.

박인규 : 그 당시에 '동아, 너마저 배신하면 나 이민갈꺼야!' 이화여대생이 그런 얘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그때만 해도 사주와 기자와 한편이 되어서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선 것이 아니었습니까?

조양진 총무 : 맞습니다. 처음에는..

박인규 : 그런데 왜 3월 17일에 기자를 쫓아 내는 것으로 바뀌게 된 거죠?

조양진 총무 : 처음에는 사주가 솔직히 동아일보의 기자들, 사원들도 동아일보의 자산이나 마찬가지이거든요. 그 자산을 내쫓고 내 버리는 것을 어느 사주가 하고 싶겠어요? 그런데 광고가 들어오지 않으니까, 권력이 탄압을 하니까 '너희들 기자들 내쫓지 않으면 회사 망한다, 광고 계속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얘기가 있었겠죠. 우리가 현장에 있지 않아서 모르지만..명약관화한 일이니까..

박인규 : 그 당시에 3월 17일에 이른바 강제 해직 당하신 분이 대략 130여명이 맞습니까?

조양진 총무 : 처음에는 중요한 우리 실천운동에서 가장 앞장섰던 단원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세 명, 다섯 명, 일곱 명 이런 식으로 1, 2, 3차에 걸쳐서 해임을 시켰어요. 그때 나머지 한 100명, 200명이 회사에서 방은 붙었지만 같이 함께 농성을 시작했죠. 3월에 들어서자마자..회사에서 농성을 하다가 3월 12일경부터는 철야농성을 했고 그러니까 3월 17일에 결정적으로 우리를 내쫓은 겁니다 새벽에.. 폭도 깡패들을 술을 한 잔 먹여서 그야말로 우리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으니까 해머로 문을 쳐 부수고 각목으로 두들겨 패면서 일부 다친 사람들도 있지만 회사에서 쫓겨나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단식도 하고 있었으니까..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그래서 3월 17일이 저희들의 말하자면 비극이 생일이 된거죠.

박인규 : 이번 4월 1일이 사실은 동아일보 창간기념일이고요. 당시에 격려 시민 광고주들이 다시 한 번 모여보자..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조양진 총무 : 우리 멤버 중에 한 분이 우리가 30년 동안 이 풀리지 않는 문제도 문제이고 이렇게 우리의 힘만으로 하니까 미진한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러면 당시의 격려광고를 냈던 분들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한 번 모셔서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낸 것은 동아일보가 배신하지 않고 독재권력과 기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싸워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격려광고를 냈던 것이니까 동아일보에서 기자를 내쫓고 격려 광고주를 배신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거든요. 그러니까 배신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도 반성하지 않고 어떤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을 우리가 비판하기 위해서 그러면 동아일보에 그때 격려 광고 성금을 다시 내 놓아라, 뱉어내라..그런 뜻이죠. 상징적인 얘기죠.

박인규 : 몇 분이나 모이실 것 같으십니까?

조양진 총무 : 숫자를 말씀 드리기는 좀 어렵고요. 워낙 세월이 흘러서..그때 동원된 인력은 몇 만명이었는데요. 광고 지면에 나타나신 분들은..

박인규 : 그 당시 시민광고를 내셨던 분들이 몇 만명이 되셨습니까?

조양진 총무 :
몇 만명 정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박인규 : 굉장히 많았군요?

조양진 총무 : 네. 많았죠. 우리가 처음 시작한 1월만 해도 2500명이 처음 시작됐는데 점점 많아졌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물론 모두 세상을 뜨신 분들도 많고 세월도 흐르고 또 그 당시의 열성과 분위기가 다르니까 관심이 없는 분들이 더 많으리라고 보는데 우리가 알음알이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생각입니다.

박인규 : 1975년 3월 17일에 동아일보에서 강제로 쫓겨 나시면서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직하지 못할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언젠가는 복직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 까?

조양진 총무 : 전혀 그런 생각은 안 해봤죠. 처음에 그것을 하면서 동아특위 위원들 거의 모두가 빠른 시간 내에 해결 될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 하면, 바로 1년 전에 동아일보에서 노조운동이 시작됐어요. 언론사에서 처음으로.. 1973년에 언론사 노조운동이 시작되어서 그때 노조원의 주체들을 한 10여명 해임을 시켰는데 그것이 3~4개월 만에 다시 복귀가 됐어요.

박인규 : 그런 사례가 있었군요?

조양진 총무 : 네. 사례가 있었어요. 그것에 믿는 것이 있었죠. 그러니까 1~2년 후면 복직될 것이다..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박인규 : 아직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았고 심지어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난 뒤에 동아투위에서도 상당히 복직을 위한 운동도 하셨고 그 당시에 사주도 만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왜 아직까지도 이 사건이 풀리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조양진 총무 : 사주를 공식적으로 만난 적은 없고요. 우리 문제가 풀리지 않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요. 사주의 인식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30년 동안 그 20~30년 동안 그 사주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동아투위 멤버들이 복직하게 되면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 안에 있던 기득권 중에 기자들, 간부들이..그러니까 사주들에게 동아투위를 좋게 얘기 하지 않죠.

박인규 : 문제 해결의 의지가 좀 없도록?

조양진 총무 : 네.

박인규 : 어떻습니까? 지금 연세들이 모두 60세가 넘으셔서 지금 동아투위에 계신 분들이 바라는 것이 복직인지, 어떤 진상규명인지, 아니면 배상인지 그런 것에 관해서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이런 궁금증도 있는 것 같아요?

조양진 총무 : 물론 우리가 혹자는 민주화 운동도 그렇고 우리 같이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배상이나, 보상을 바라고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나 민주화 운동을 하면 서 무슨 배상을 원하고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 지이고.. 배상문제는 2차적인 문제이고 실제로 진상규명이 가장 우리는 바라는 건데 진상규 명도 사실은 내용을 아시다시피 다 알 수 있는 거예요.

박인규 : 진상규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조양진 총무 : 진상규명의 핵심은 누가 백지광고를 만들었으며, 백지광고가 가능케 했으며..

박인규 :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한 주체가 누군지 밝혀달라?

조양진 총무 : 네. 그리고 회사는 과연 독재권력에 어떤 형태로 협력을 하기 시작했느냐, 굴복을 하고..그것이 진상규명의 핵심인데요. 우리가 짐작은 하죠. 공식적으로 정부에서 제대로 한 번 해라..

박인규 : 국가권력에 의한 언론탄압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됐으면 좋겠다?

조양진 총무 : 그렇죠.

박인규 : 최근에 동아투위 대변인을 지내셨죠? 이부영 위원께서 그 당시에 중앙정보부에서 대기업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내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이런 말씀을 하셨다는데요. 어떻습니까? 국정원에서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이 문제를 조사하거나 그런 계획은 없습니까?

조양진 총무 : 국정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저희가 오충일 목사도 그 진상위원회가 발족될 당시에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오목사님께서 우리 문제를 적극적으로 규명할 수 있도록 하겠다..그런 말씀을..확언을 하셨어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음 언론에 보도된 진상규명을 위한 사례들에서 우리 문제가 빠져 있었어요.

박인규 : 첫 번째 규명과제에서 빠졌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양진 총무 : 네. KAL기 문제라든가, 김형욱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은 들어가 있으면서 언론문제는 빠져있어서 우리가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언론 권력이 과연 무섭구나..그런 오해를 하기도 했었는데 최근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아직 공식적으로 지면에 밝혀진 것은 아닌데 언론 문제를 이번에 다루겠다..언론문제라고 하면 1960년대 초에 민족일보사건, 그 다음에 60년대 중반에 경향신문 사건, 그 다음에 저희 동아투위 사건이 아마 가장 큰 언론계의 문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문제를 국정원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를 하겠다고 공식확인을 했습니다.

박인규 : 사실은 백지광고 사태까지만 보면 동아투위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사주, 동아일보 자체도 어떻게 보면 권력에 의한 희생자였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조양진 총무 : 네.

박인규 : 지금부터는 지난 31년간 조양진 총무를 비롯해서 동아투위에 계신 분들은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여쭤볼까 합니다. 75년 3월에 해직 되시고 나서 해직기자로서 대체로 취직을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양진 총무 : 그 상당한 사람들이, 저희 멤버들이 그야말로 100명이 넘어가니까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소위 독재권력이 점 찍은 사람들..한 2~30명이 되는 사람들은 도저히 취직이 되지 않았어요.

박인규 :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오른..?

조양진 총무 : 네. 맞아요. 우리도 모두 올라가 있는데..그 사람들에 의하면 급수가 있죠. 상당한 사람들이 전혀 취직이 안 되고 그야말로 부인들이 나가서 상당히 고생을 하고 이런저런 그야말로 막일도 해 가면서 살았는데요. 심지어는 우리가 하도 안 되니까 같이 바자회도 열고, 민주인사들을 모아서 성금도 받고 또 처음 쫓겨나서는 석 달 정도를 각계 성금에서 격려금으로 대신 들어온 돈으로..그 성금이 모두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동아일보에서 받던 봉급의 50% 정도를 한 몇 개월 우리가 쓰고..그러고 나서는 각자 그렇게 결국은 자기 생활을 스스로 개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려웠죠. 다들 취직이 안되니까 우선은..

박인규 : 113명의 동아투위 멤버 중에서 지금 12명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양진 총무 : 네. 맞습니다.

박인규 : 조양진 위원께서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해직 이후에..

조양진 총무 : 저는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그쪽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앞 쪽에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박인규 : 주동자급은 아니셨나 보군요?

조양진 총무 : 네. 그래서 그때 제가 흔히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부화뇌동파'라고 얘기를 하는데요.(웃음) 저는 처음에 나와서 조금만 가게도 해 보고 또 조그만 회사에 한, 두번 들락날락 하고 했어요. 그러다가 1982년에 경향신문에 가게 됐어요. 거기서 잡지 파트에서 오라고 하니까 고민은 많았어요. 우리 투위 멤버들 중에서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뉘더라고요. 가라는 쪽과, 가지 말라는 쪽으로.. 그래서 가라는 쪽으로 결정해서 입사해서 잘 지냈죠.

박인규 : 동아일보 해직 경험이 그 뒤에 〈월간경향〉이라든가, 〈뉴스메이커〉를 만드실 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양진 총무 : 글쎄요. 제가 제 스스로 말씀 드리기가 쑥스럽지만 저는 경향신문에 가서도 제가 제 입으로 제가 동아투위라는 말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동아투위 멤버라고 하니까 후배기자들이 여러 가지로 도와주더라고요. 그래서 '참 좋은 일을 내가 하기는 했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죠.

박인규 : 동아투위가 나오셔서도 사실은 재야에서 언론 활동을 하셨습니다. 월간 〈말〉지를 창간하시기도 했고, 사실은 한겨레 신문을 만드신 분들도 동아투위 분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드셨는데요. 지금 동아투위에..물론 이부영, 임채정 위원 같이 속된 말로 출세하신 분도 계시고 어떤 분들이 언론인 중에 계신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조양진 총무 : 주로 한겨레 신문에 제가 명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데요. 한겨레 신문에 한 20여명 이상이 참여를 해서 사장부터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사장은 권근술씨, 최학래씨, 김명걸씨, 김두식씨..이런 분들이 사장을 역임했고요. 그 다음에 편집국장은 장윤환씨라든가, 또 성유보씨라든가..이런 분들도 편집국장을 하면서 한겨레 신문을 운영을 잘 했는데 그 한겨레 신문이 지금 참 보면..메이저신문 소위 조중동에게 그 세에 눌려서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박인규 : 물론 동아투위가 나오셔서 한겨레 신문도 만드시고 했지만 그 100명 이상의 언론인들이 강제 해직이 되어서 나온 것이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언론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십니까? 동아투위사건이라는 것이요?

조양진 총무 : 우리 문제를 자꾸 우리 때문에 회사가 손실을 봤다는 것은 우리 자랑이 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실제로 다들 쫓겨난 기자들이 다재다능한 분들이고..그런데 그 사람들이 회사에서 제 역할을 했다면 동아일보는 훨씬 더 좋은 지금보다 나은 위치에 있었다고 확신하고 지금 언론의 역시 상황도 그래요. 지금 언론사에 왜 지금 조중동이 저렇게 헤매는가..여러 가지 그것을 밝히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하지만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재 기자들이 언론의 자유화가 와서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하는데 글을 쓰는데 사주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상황은..사주가 '너, 좀 삐딱해..'라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거나 그야말로 속된 말로 물을 먹여 버리면 그 기자가 잘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거든요. 그러니까 정치권력이 사라진 자리에 경제권력이 서서 좌지우지 하는데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언론을 가지려면 하루빨리 그 편집권..이런 일들이 정리가 되어야 해요. 그것이 없으니까..지금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싸우는데 그 문제는 우리도 이제 나이가 차서 힘이 좀 부족하죠. 솔직한 얘기로..

박인규 :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동아투위 문제가 마무리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정부나 동아일보 사주나 이런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마무리 말씀으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조양진 총무 : 네. 이것은 과거 독재권력이 저지른 짓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지난번에 제가 노무현 대통령께서 제주도 4.3사건에 대해서 사과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 문제도 정부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마땅히 생각을 하고요. 또 회사로서도 당시 독재권력에게 탄압에 의해서 자기네들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 그리고 지금 언론을 제대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언론을 제대로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반 독자들은 잘 몰라요. 그러면 언론이 사실 많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정치하시는 분들, 언론을 하시는 분들조차도 언론이 왜 존재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저는 외람되게 말씀 드리면 한 30여년 동안 길거리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귀 동냥을 해보니까..그러면서 깨달은 것인데 실제로 언론이라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옳바른 길로 가는 하나의 도구에요. 옳바른 길로..그런데 이 옳바르다는 평가는 상당히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것인데 그것을 지금 잘 못하고 있는 거예요. 조중동이라는 신문이..

박인규 : 요즘 과거사 청산이 어떤 시대적 과제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국가권력에 의한 언론탄압도 과거사 청산에 중요한 항목이 아닐까 싶고요. 동아투위 문제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져서 이 문제가 잘 마무리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조양진 총무 : 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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