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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은 죽이지 말라는 메시지를 북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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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람만은 죽이지 말라는 메시지를 북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3/16] 탈북자출신 영화감독 정성산씨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무대로 북한 인권문제를 이야기하는 뮤지컬, 〈요덕 스토리〉 가 어제부터 공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뮤지컬을 만든 사람은, 북한을 탈출한 영화감독이자, 본인 역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 탈출한 경험이 있는 영화감독 장성산 씨입니다.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이 연출했다 해서,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던 뮤지컬 〈요덕 스토리〉.. 집중인터뷰 오늘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정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뮤지컬 〈요덕 스토리〉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정성산 감독의 인생이야기 함께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정성산 씨입니다. 정성산 감독은 모스크바국립영화대학에 유학한 영화학도였습니다. 그러나, 남한 방송을 듣다가 발각돼 13년 형을 받고, 황해도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경험도 있습니다. 1995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온 이후 동국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한국영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를 각색했습니다. 정 감독이 각색, 연출한 뮤지컬 〈요덕 스토리〉는 어제부터 공연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정성산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정성산 감독 : 네. 반갑습니다.

박인규 : 그 〈요덕 스토리〉를 만드시느라고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선은 첫 공연이 끝나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어떠세요?

정성산 감독 : 일단은 2002년부터 한 것이 거의 3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제가 거의 1시간 이상을 울었던 것 같아요. '아~ 했구나' 하는 것과 또 그 동안의 힘든 것들이 생각나고 배우들에게 감사하고 그래서..관객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그것보다는 제 스스로가 너무 감격스럽고 저의 아버님 때문에 뮤지컬을 만들게 됐었는데요. 아버님께 '아버님, 저 드디어 올렸습니다..' 감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박인규 : 어제 관객들은 꽉 차셨나요?

정성산 감독 : 네. 어제 가득 채우셨고 정말 공연이 끝나고 기립박수를 쳐 주시는데 너무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또 이 뮤지컬이 그 동안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국민께서 성금을 보내주시지 않으셨으면 정말 힘들었거든요.

박인규 : 성금도 받으셨습니까?

정성산 감독 : 네. 천명이상 되시는 분들이 어떤 고등학생, 초등학생도 있었습니다. 천원, 2천원 보낸 학생들도 있었고 많게는 백만원을 보내신 분도 계셨고요 천명이상의 분들이 보내셨어요. 그것으로 제가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저의 뮤지컬 〈요덕 스토리〉 같은 경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만들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인규 : 제가 안내 책자를 봤더니 '후원-대한민국 국민'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일단 첫 공연 성공을 축하 드리고요. 정성산 감독께서는 〈요덕 스토리〉의 각본도 쓰시고 연출까지도 하셨는데 대략 요덕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요덕이라는 곳이 함경남도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라고 알고 있는데요. 〈요덕 스토리〉의 내용이라고 할까요, 대략 설명을 해 주시죠. 어떤 뮤지컬이라는 것을요.

정성산 감독 : 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10개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 략 20만에서 25만 많게는 30만까지 잡고 있습니다만 그런 20만 이상의 정치범들이 수용소 에 갇혀 있고 또 그 사람들의 죄를 보면 사실 한국 국민들에게 제가 납득시키기가 참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괘씸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집에 불이 나면 사람부터 살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김일성 초상화를 구해 와야 해요. 그런 것들이 죄가 되고 또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이성을 잃지 않습니까? 그러면 정부나 북한의 당국자에 대해서 비판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했다고 정치범이 되고..그런 사람들이 죄가 아닌 죄로 간다는 것이 저는 참 믿어지지도 않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사실은 제가 시작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저 때문에 이렇게 돌아가셨는데요. 제가 KBS에서 일을 하면서 '진달래꽃 필 때까지' 라는 드라마를 썼었어요. 그래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기쁨조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었는데 그 드라마가 나간 이후에 저의 아버님을 정치범 수용소에 가뒀다가 공개처형을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박인규 : 아들이 남한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로..?

정성산 감독 : 네. 그것은 북한에서는 문화예술인들..문화의 힘을 압니다. 다른 당 간부들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자아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예술인들은 이틀에 한 번씩 해요. 그 문화의 힘을 알아요. 그 사람들이..

박인규 : 이른바 사상무장을 시키는 거군요?

정성산 감독 : 그렇죠. 제가 한국에 와서 영화도 하고 드라마도 하니까 저를 알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한때 KBS를 폭파시킨다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창작가를 살해한다는 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수용소에서 공개처형으로..

박인규 : 그때가 언제 돌아가신 겁니까?

정성산 감독 : 2001년도 10월인데요. 그래서 그 사실을 중국에 있는 몇 분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도 있고요. 그래서 그 한을 풀어 드리려고 시작을 했는데 이 작품을 점점 쓰면서 보니까 이것이 한이 아니라 용서로 변하는 거에요. 그 내용은 잘 나가던 공훈 배우가 어느 날 아버지의 간첩죄 때문에 요덕 수용소에 수감이 되요. 제 스토리입니다. 뮤지컬에 대한.. 수감되고 수용 소장이 술에 취해서 그날 겁탈을 해 버려요. 임신이 된 겁니다. 두 사람 모두 아이가 있으면 안 되요. 수용 소장은 임신이 되면 죄가 되어 버리거든요. 여자는.. 악의 씨잖아요? 없애려고 하고.. 그러다가 서로가 용서가 되는 거에요. 결국은 수용 소장이 그 여자를 탈출을 시키려고 하다가 결국은 모두 죽게 되는 비극인데요.

박인규 : 그 아이까지도 죽습니까?

정성산 감독 : 아이는 삽니다. 아이만 삽니다.

박인규 : 그 아이의 이름이 요덕이라고..

정성산 감독 : 네. 리요덕이라고..

박인규 : 말하자면 용서를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삶을 나아간다..그런..?

정성산 감독 : 네. 제가 사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나 북한 당국자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저희가 한 5~6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인구가 2200백만, 2300백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구가 1800, 1900백만명이라고 해요. 모두 죽었거든요. 죽고, 떠나갔고, 인력은 국력이라고 하잖아요? 물론 그 속에 저의 아버님도 속하지만 더 이상은 죽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다 죽여서 뭐합니까? 그렇게 죽여서 북한의 체제 유지는 되겠지만 그 한은 어떻게 할 거에요? 우리 민족이 그 전에 슬픔이 참 많은 민족입니다. 일제치하의 그 여러 가지..6.25전쟁..그렇지만 이제 와서 21세기에 와서 이런 수용소에 있다는 것도 가슴이 아프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도 저는 가슴이 아파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 말고 용서 좀 해 주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 정성산 감독께서 말씀 하시면서 감정이 복받쳐 오르셔서 자꾸 울먹이시는데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한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하시고 싶었다는..

정성산 감독 : 네. 인간의 존엄성 앞에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앞설 수 없습니다.

박인규 : 인간이 중요하죠.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지금 말씀 하신 것 중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 북한의 어떤 지도층에 대해서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과 존엄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서울에서 남한 사람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시고 계시잖아요? 그러면 남한에 계신 분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라는 것이 있습니까?

정성산 감독 : 일단은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살면서 한국에 와서 참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사실은. 왜 왔을까? 제가 북한에서 아까도 잠깐 소개했습니다만 남한 방송을 듣다가 잡혔거든요. 왜 왔을까? 저희 집은 최고위층은 아니었어요. 그냥 평양에서 저의 아버님이 당 간부였고 먹고 사는 데는 전혀 걱정이 없었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많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혼자고 친척도 없고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더구나 한국에 산다는 것은 정말 몇 년 전만해도 핸드폰 요금도 낼 것이 없고, 집 월세 낼 돈이 없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왜 왔지? 내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더한 고통은 탈북자들에 대한 이중 잣대였습니다. 제가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했습니다만 제 영화가 조금 있으면 개봉이 됩니다. 영화 감독을 하는데 8번째 만에 데뷔를 한 거에요. 정성산 감독이면 투자를 하지 않는다, 정성산 감독이면 배우들이 출연 안 한다..이것은 한 마디로 편견입니다. 탈북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하는..

박인규 : 말하자면 예술가로서 실력이 없다고 보는 겁니까?

정성산 감독 : 그것도 있고요. 또 하나는 대부분 사람들이 북한이라고 하면 불쌍하고, 힘들고..이런 것만 생각하지..저는 북한에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보다 영화 공부는 더 많이 했거든요. 저는 북한에서 영화대학도 나왔고, 러시아영화대학에서 유학했고, 한국에서도 영화 대학을 나왔어요. 영화 공부만 10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런 기술적인,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 어려움이 많았어요.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요. 그것은 저희 뮤지컬 〈요덕 스토리〉도 사실 우리는 너무 북한에 대해서 권태적인 것이 있습니다.

박인규 : 권태적이라는 것은 그저 그렇지..관심이 없다..?

정성산 감독 : 무감각해진 거죠. 토픽 뉴스 같은 것만 관심을 가지려고 하고 실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는 무관심해요. 몇 시간만 가면 북한입니다. 그곳에서 지금 자행되고 있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말살과 유린과 또 나아가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이런 것들을 성토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한국 관객들에게..

박인규 : 본인의 어떤 예술적 역량도 보여 드리고, 북한의 어떤 실상도 남한에 계신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그런 의도도 있고요? 그런데 정감독께서는 요덕에 있어 보신 적은 없으신 거죠?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요덕을 특별히 작품의 무대로 삼으신 대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까?

정성산 감독 : 네. 일단 저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곳은 22호 회룡 수용소입니다. 회령스토리라고 하려고 했는데 저의 대부분 북한에 사는 사람들이 요덕이라고 하면 공포의 대상이에요. 요덕이라고 하면 다 알아요.

박인규 : 북한 사람들이 모두 아는..가장 말하자면 무시무시한 곳?

정성산 감독 : 네. 요덕 관리소라고 하면 모두 다 압니다. 공포의 대상입니다. "너, 요덕에 가지 않으려면 잘 해라." 이런 말들을 많이 해요.

박인규 : 예전에는 아오지 탄광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바뀌었군요?

정성산 감독 : 아오지 탄광은 이제는 많이 변했고요. 그래서 요덕은 상징입니다. 수용소 중에서 정치범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깁니다. 그리고 악명이 높은 곳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요덕은요. 그리고 요덕 수용소 안에 있는 특별독재대상 구역이 있습니다. 수용소 안에 또 감옥이 있는 그곳에 들어가면 나온 사람들이 없어요. 유일하게 그 곳에서 나오신 분이 탈북해서 오신 한 분이 계신데요. 이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와, 내가 북한에서 정말 어떻게 살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징성도 있고요. 그렇지만 저는 뮤지컬을 하면서 제 안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런 처절하고 어두운 것을 다 보여줄까..

박인규 :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이 보통 수용소의 이야기라고 하면 흑백의 다큐멘터리..이런 식으로 많이 생각 하는데 대개 뮤지컬이라고 하면 즐겁고, 쾌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수용소 얘기를 뮤지컬로 만드셨단 말이에요? 뮤지컬로 만드실 때는 나름대로의 예술적 계산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정성산 감독 : 네. 처음에는 영화로 만들려고 영화 시나리오로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영화를 데뷔하려고 준비했었는데요. 역시 이것도 투자자들이 칙칙하다, 이것이 되겠느냐?..이러기도 했고요. 그 다음에 이것을 무엇으로 할까? 악극으로 할까? 어떻게든 하기는 해야겠고..그래서 제가 마지막에는 좋아하는 것이 뮤지컬이고요. 뮤지컬을 하게 된 계기는 다른 것이 아니고 영화가 되지 않으니까..토탈엔터테인먼트..춤과, 노래와, 대사와, 연기들이 여러 가지가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사실 영화가 제일 좋은데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장르가 뮤지컬입니다. 그래서 제가 뮤지컬을 워낙 좋아하고 저의 공연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른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세요. '너무 어둡지 않느냐?' 라고 하시는데 저는 비극이 원래 아름다운 것이거든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대부분이 비극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레미제라블〉이나, 〈미스 사이공〉이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런 뮤지컬들이 모두 어두워요. 그렇지만 그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승화된 아름다움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요덕 수용소의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공화국 사람들의 이야기..그래서 저의 주제가 용서입니다.

박인규 : 한가지 궁금한 것은 정감독은 탈북자 출신이신데 혹시 배우라든가, 참여하신 분들 중에서 탈북자 분들이 계신가요?

정성산 감독 : 아닙니다. 저희는 100% 오디션을 통해서 뽑은 뮤지컬 전문 배우들이고요. 북한 안무를 맡아 주신 분이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셨다가 그곳에서 자녀도 잃고 예전에 최승희 선생님 제자였고요. 무용가였던..

박인규 : 성함이..?

정성산 감독 : 네. 김영순 어머님이시고요. 그 분이 북한 안무를 도와주셨고요. 그 분이 하면서 우리 배우들을 많이 울리셨습니다. 수용소 이야기를 하면서..

박인규 : 원래는 영화화를 하고 싶었는데 펀드라든가, 돈 문제 어려워서..그런데 일부에서 알려지기로는 정부에서도 안 했으면 좋겠다..그런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정성산 감독 : 네. 사실 그것이 와전된 부분도 있습니다. 제일 말단이신 거 같아요. 저에게 오신 분들이..말도 안 되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축을 해 버렸습니다.

박인규 : 왜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던가요?

정성산 감독 : 안 했으면 좋겠다..라기 보다 겁을 준거죠. 저에게..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면서..

박인규 : 남북 화해의 무드에 찬물을 끼 얹는다.. 이런 건가요?

정성산 감독 : 네. 그런 이야기도 있고요.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그렇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 때문에 어려워 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사실은..그런데 제가 언론에 나가고 나서 일반 개인 투자자들의 투자가 취소가 된 것이 제일 컸습니다.

박인규 : 정부에서 싫어하니까..우리도 하지 말아야겠다..?

정성산 감독 : 네. 그렇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약에 투자했다가 정부나 다른 곳에서.. 맞는 이야기 입니다. 기업이기 때문에.. 그 투자가 어려워서 정말 그때 제가 미쳤었습니다. 돈을 만들기 위해서..집에 있는 노트북이며 하물며 냉장고며..돈이 되는 것은 모두 다 팔았어요. 그렇게 급했었어요. 제가..배우들 밥값이 없으니까..밥 값이 없으니까 식당에서 밥을 주지 않는 거에요. 그때도 배우들이 돈을 모아서 주더라고요.. 어쨌든 힘들었습니다.

박인규 : 또 한번 복받쳐 오르시는데요. 그러면 제가 이런 질문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요. 아까도 1천명 이상이 성금을 보내셨다고 하는데 전체 제작비 중에서 성금의 액수가..? 물론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성산 감독 : 저희가 전체 7억 정도 되는 규모의 뮤지컬입니다. 뮤지컬 시장에서 작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 규모에서 보면 정말 거품이 빠진 제작비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절반 정도가 되지 않았으니까..저희에게 성금을 모아 주신 액수가 거의 6천만원 이상이 되세요. 그런데 그것은, 그 성금이 저에게는 6천만원이지만..정말 정말 중요할 때 들어왔거든요.

박인규 : 작년에 서울에서 북한 인권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연 미국의 인권단체 〈디펜스 포럼〉에서 후원금을 보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정성산 감독 : 네. 그 쪽에서 수잔 숄티 회장께서 저희 소식을 듣고 2천불을 보내 주셨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분들이 보내주셨어요.

박인규 : 그런데 일부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좀 대등한 협상보다는 무언가 자꾸만 압박을 가하고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것 같다? 이런 현상들을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한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남북화해를 위해서는 우리가 조금 알아도 모른 척, 아니면 알아도 공개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 이런 말들도 있던데요?

정성산 감독 : 일단 저는 현 정부나 혹은 미국이 북한에 관련된 정책이나 여러 가지들..사실 저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우선 섭섭한 것은 말입니다. 물론 점진적인 남북관계를 위한 점진적인 화해와 협상은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분단의 시기가 오래 됐고, 남과 북의 이런 GNP나 여러 가지 경제적인 차이가 나고 인정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북한에 대동소이한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려놓은 상태에서 통일도 좋고 그런 단체가 인정도 되고 합니다만, 단 한가지 입니다. 우리가 국제인권결의안을 3번이나 기권했다는 것은 탈북자로서 섭섭합니다. 한 번쯤은 찬성해 주고, 한 번쯤은 북한 당국자들에게 한 번쯤은 우리가 이야기 하고 제가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그 이야기는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이 공연은 언제까지 어디서 하죠?

정성산 감독 : 저희가 어제부터 시작을 했으니까요. 3월 15일부터 4월 2일까지 양재 교육문화회관에서 하고요. 아마 끝나면 외국에 가지 않을까..합니다.

박인규 : 좋은 뮤지컬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지금부터는 정성산 감독의 파란 만장한 인생 이야기..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감독께서는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했고, 또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영화대학까지..말하자면 북한에서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상당히 집안이 잘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

정성산 감독 : 네. 저희 할아버지께서 워낙 투철한 공산주의자이셨고요.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 쪽이 독립군들 있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우리가 유공자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독립유공자..그런 계열이셨어요. 그래서 혜택을 많이 받았죠.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평양에서 태어났고요.

박인규 : 할아버님이 교육부장관까지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성산 감독 : 네. 70년대 초까지였습니다.

박인규 : 아버님은 중앙당 간부이셨고요?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원래 그런 분들이면 정치나 경제 쪽을 하시는데 어떻게 연극영화 쪽을 전공하셨습니까?

정성산 감독 : 저는 어릴 때부터 이런 문화 쪽을 좋아했고요. 그리고 고등학교 자체를 예능고등학교를 나왔고 또 군대에 가서 바로 당의 추천을 받아서 영화대학에 가게 됐고요. 원래 시나리오를 전공했었습니다. 제가..영화 시나리오를 전공했는데 당에서 연출이 낫다고 해서 연출을 전공했습니다.

박인규 : 정감독 나이가 올해 37세가 맞죠?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상당히 37세로 겪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을 겪으셨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말하자면 속칭 잘나가시는 집안에 계시던 분이 어떻게 수용소로 가시게 됐는지요?

정성산 감독 : 일단 제가 제 운명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94년도였습니다. 94년도에 김일성 주석의 사망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가 남한방송을 듣다가 잡혔어요.

박인규 : 그때는 모스크바를 다녀오신 다음이었습니까?

정성산 감독 : 다녀온 후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그 당시에 사망사건이 있어서 전방으로 모두 군인으로 내려 보냈어요. 그때 제가 남한방송을 듣다가 잡혔습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박인규 : 그러면 그것이 어쩌다가 한 번 들었는데 걸린 겁니까? 아니면 계속 들으시다가..

정성산 감독 : 저희는 평양에서도 남한방송을 들었었어요. 비디오도 봤었고요. 그것이 다 인정이 됐었는데 그 당시에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굉장히 컸어요. 그래서 하나의 타깃으로 제가 걸린 것이 거든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제가 사리원에 있는 군 출신들만 가는 수용소입니다. 그곳은..3개월 정도 취조를 받고 그 다음에 10월 초쯤에 개성에 있는 군사재판소에서 13년을 받고 호송되어 가다가 차가 굴러서 탈출해서 중국으로 가게 된 거죠.

박인규 : 워낙에 시나리오를 좋아하셨다고 하는데 그 한국에 오셔서 〈쉬리〉라든가, 〈공동경비구역 JSA〉 각색에 참여하신 거죠?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우선은 이것을 여쭤보고 싶은데요. 어떻습니까?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에 나오는 북한관..남한사람들이 북한을 보는 그것이 실제로 사시던 경험과 같습니까? 다른 것이 있습니까?

정성산 감독 : 많이 다르죠. 일단은..

박인규 : 예를 들면 어떤 것이 다릅니까?

정성산 감독 : 예를 들면 제가 JSA 작업을 할 때 박찬욱 감독 아닙니까? 그 감독과 많이 느낀 차이점은 무조건 북한이라고 하면 경직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박인규 : 딱딱하다?

정성산 감독 : 네. "와 그럽니까?, 거저 이 동무 아새끼래.." 이렇게 다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바꾸는데 엄청 힘들었어요.

박인규 :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농담도 하고 그렇다..?

정성산 감독 : 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가 작품의 인간적인 것들을 다 배열하고 그것에 그러면 그 자들이 그런 사람들이 왜 이데올로기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북한의 당국자 때문이거든요. 근데 그건 피해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이후로 실미도까지도 제가 각색을 했습니다만 그 이후로 제가 조만간에 안 합니다. 각색을요. 이용당하는 것 같고 제가 철학적인 것까지 이야기하면..

박인규 : 본인이 알고 있는 실제 북한의 모습보다는 역시 남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선입견들이 자꾸 영화에 수용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그런데 이런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쉬리〉도 나왔고,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최근에 〈웰컴 투 동막골〉까지 우리나라에서 1천만명 가까이 동원한 영화들이 모두 남북관계에 관련한 것들이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정성산 감독 : 저는 개인적으로는 내가 저 작품으로 데뷔를 했었어야 하는데..그런 아쉬운 것들도 있고요. 그냥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민족 우리 남과 북의 소재이기 전에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비극이기 때문에..

박인규 : 남과 북 모두의 고통이다?

정성산 감독 : 고통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많이 성공하지 않나..생각합니다.

박인규 : 마지막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정말 꼭 여건도 되고, 제작비도 된다고 하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십니까?

정성산 감독 : 저희는 뮤지컬 〈요덕 스토리〉 다음에 바로 영화로 만들 겁니다. 3년 전부터 계속 미국으로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번 공연에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와요. 뮤지컬을 보기 위해..제 영화 〈요덕 스토리〉를 가지고 미국의 할리우드와 같이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인규 : 〈요덕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정성산 감독 : 네.

박인규 : 〈요덕 스토리〉의 성공을 빌고요. 무엇보다도 북한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또 남북한이 화해하도록 많은 힘을 써주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정성산 감독 : 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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