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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 스님과 고흥 천등산 금탑사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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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림 스님과 고흥 천등산 금탑사의 밤

김영옥의 '즈믄 江에 뜨는 달'…비구니 열전〈5〉

***일곱 오라기만 남아 있어도**

이 땅에 불연(佛緣)이 비롯된 때는 언제일까.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서 한 말씀 들은 바 있다. "너희 나라 황룡사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했던 곳으로서, (그 분들이 앉았던) 연좌대가 아직도 (남아) 있도다." 인도가 서축(西竺)이라면, 이 곳 신라국은 그에 견줄 만한 동쪽의 축국이라 여기던 신라인의 믿음이 그러했다. 그렇듯 옛사람들은 이 땅에 불연이 비롯된 때를 석존이 살아 계시던 당시로까지 거슬러 잡거나, 이후로 불상이나 탑을 돌로 된 배에 실어 띄워 보낸 아육왕의 손길이 와 닿은 인연지로 여기고는 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이와 뜻이 같아서, "세상 어느 곳이 진향(眞鄕)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이리", 하고 맞장구을 쳤던 것이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금탑사, 찻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는 절 초입에는 "천등산(天燈山) 금탑사"라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으니, 이곳에도 옛사람의 믿음이 그 이름으로 남아 있다. 역사에서 천등산은, '하늘 아래 등불 하나 켜 든 듯이 아리따운 산'이라는 뜻으로 하늘 '天'자를 쓰기도 했지만, 때로는 일천 '千'자를 써서, '석존의 제자 중에 두타(頭陀) 제일 가섭이 자신의 부모를 위해 등 일천 개를 밝혀 올린 산'이라는 뜻으로 적기도 했던 것이다. '금탑사'란, 아육왕이 띄워 보낸 탑을 모신 것을 기리어 지은 이름일 터이니, '천등산'은 일천 개의 등을 밝히었던 가섭의 행적을 기린 뜻으로 풀어야 짝이 맞게 된다. 그것은 이곳 금탑사에서 1992년부터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주지 소임을 보았던 서림(瑞林) 스님의 짐작이 아니라, 불사를 하면서 극락전 부처의 복장(腹藏)이나 뒷방 구석에서 찾아 낸 연기문 또는 사적기에 적혀 있는 사실이다.

다 저문 해거름에 이른 금탑사는 대중 스님이 살고 계신 곳이기는 한지, 따따그르르… 새 울음 소리뿐, 그저 적요했다. 이 산중에 이런 대찰이 숨어 있었나 싶게 두렷한 도량, 지붕 위로 따뜻이 피어오르는 연기조차 없었으면 발길을 되돌려 내려갈 뻔했다. 스님께 예 올리자마자, 가는 댓가지에 돌돌 말아서 화롯불에 구워 내는 고운 산포래(산파래)에 코를 박고 밥그릇부터 비워 냈다. 이 곳 살림이 어떠하신지는, 객을 위해 낮은 상 위에 차려낸 공양의 내용으로 바로 짐작이 되었다. 몇 번을 우려 끓인 것인지 알 수 없는 묵은 김치 찌개에 버섯 무침, 터밭에서 거둔 것으로 담근 맛 깊은 동치미, 그리고 생전 처음 맛 보는 '산포래 숯불구이'였다.

저녁 예불이 정갈하게 올려지는 도량, 가파른 산자락을 따라 지어진 당우들을 정성스레 괴고 있는 석축은 모두 자연석들로서, 그 장대함은 당우의 위엄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계단 초입을 쌍으로 지키고 있는 길 끝, 선방에는 열두 명의 수좌들이 한겨울 칼바람을 녹이고 있었다. '금당 선원,' 몇 해 전에 개원을 본 호남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다. 십 년 세월 계속되던 불사는 지난해 2005년 초가을, 그 노고를 치하하고자 폭풍우를 무릅쓰고 달려와 회향식에 참석한 하객들과 함께 그 장구한 세월의 끝을 보았다.

십오 년,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좋은 곳' 있다 하여 도반 따라 온 곳, 그러나, 정작 그를 이 곳으로 이끌었던 스님은 떠나 버리고 만 곳이다. 대중이 둘이기도 하고 네댓이 되기도 했던 곤고한 세월, "아홉 자 방 여섯 칸짜리 큰 방에서 / 늙은이 둘이 삼동 결제를 했네 / 장판 한 장으로 족한 分을 일 많은 산중살이 마다는 덕분으로 / 마음대로 늘어 놓고 살아 좋네 / (…) / 형님은 법당 소임, 나는 부엌 소임 / 크나큰 집에 늙은이 둘이 삼동 결제를"(서림, '일 많은 산중살이 마다는 덕분에' 중) 하기도 했었다.

하루밤을 자고 난 다음날부터 불사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절은 피폐해져 있었다. "궁금증 많은 어린 스님 / 망가진 부도탑 / 몰래 밀쳤는데 / 날벼락 피해 다니는 도둑이 / 진즉이 사리는 훔쳐 가고 / 낮눈 어둔 박쥐가 / 숨어 있"('도둑 맞은 부도탑' 중)던 곳, 비에 젖는 부처님과, 내리는 비를 견디지 못하고 한밤중에도 우르르 소리 내며 무너지는 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 새는 법당과 그 곳을 지키는 노전, 그리고 명부전 세 채만 있던 곳, 동짓달까지 한뎃잠을 자다시피하고 불사가 시작되었으니, 십 년 세월 동안 이 까풀막진 산 속에 그가 새로 지은 건물만 열 채 가까이 된다.

쳐다보면 2층이 되는 누각, 지장전, 나한전, 종각, 삼성각, 명부전, 팔각정, 선방 등이 새로 지어지거나 고쳐 지어졌다. 그뿐이랴, 불상을 개금하고 괘불도 보수하는 한 편으로, 대중 생활의 편의를 도울 후원채, 욕실, 돌창고 등도 마련했다. 낮은 땅은 돋워올리고 가파른 곳은 모를 깎아 도량을 안돈시키고, 당우를 위협하는 산자락을 쳐내어 비가 들이치지 않게 했다. 찻길에서 절로 이어지는 길은 포장하고, 소쿠리와도 같은 지형이라 비만 오면 도량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이 길을 잃지 않고 흐르도록 물길도 새로 냈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라 했다. 불사란 뜻을 세운다고 다 되는 일도, 뜻이 없었어도 피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단아한 몸 안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을까. 천등산을 떠받치듯 호쾌하게 쌓아 올린 석축을 보고, 어떤 비구 스님은 이 절 주지 스님이 비구인 줄로 알았더라 했다. 이즈음에 이런 식의 불사는 그리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곳이 다른 곳과 구별되는 점은, 어느 신심 깊은 불자의 뭉텅돈으로 단숨에 이루어진 불사가 아니라, 그의 호법 정신과, 엄정한 계행, 하루도 방일함이 없는 여법한 일상을 눈으로 본 가근방 부락민들의 마음이 모여 차근차근 이루어진 불사라는 점이다.

십 년 공부를 짓던 내원사는 까마득히 잊어 버린 채 새로 시작한 살림, 불사가 한창일 때에는 하루에 도량 안에서 걷는 걸음만 해도 일백 리는 좋이 되었던 고단한 나날이었다. 끼니도 놓쳐 버리곤 했던 나날, 조사 스님들도 일과 공부는 둘이 아닌 하나였다! 남자 일, 여자 일로 구분될 수 없는 일, 기와집에 살면 기와집 건사하는 일도 배워야 했다. 그저 새중 때에 배운 바대로, 스무 해 넘게 지켰던 선방에서도 공부하는 틈틈이 나무 해서 대중 목욕물 데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놓고 앉아서도 헝겊을 덧대어 해진 소쿠리를 기웠던 것처럼, 손발은 잠시도 놀려 두는 법이 없었다. 외진 곳에도 손님이 없지 않아, 주지 방이라고 마련된 뒤에도, 그의 방은 일쑤 접객실이 되곤 했다. 대여섯 대중이 해가 있는 낮에는 풀을 베면서도 입으로는 염불을 하고, 밤에는 행자나 사미니들과 함께 글을 읽었다.

그가 입고 있는 누비 동방아, 잿빛마저 무너져 탈색이 다 된 것, 그것은 삽십 년 동안 그와 함께 해 온 것이었더라 했다! 옛사람은 "일곱 오라기만 남아 있어도 버릴 수 없는 옷"이라 하셨거니와, 그 세월 지나는 동안에 본디 천은 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고, 해진 데 누비고 호고 덧대었던 천과 실만 남았을 터였다. 내원사에서 공부를 할 적에 창고에서 주운, 기계를 닦고 버린 더러운 무명 천조각은, 이후로 오늘에까지 그가 스무 해 가까이 목수건으로 쓰고 있다.

***'千燈'의 뜻을 푸니**

남쪽 바닷가 지방에는 남방 전래의 설화가 깃든 불적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돌 속의 화석처럼 그저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전남 하고도 땅끝, 바다가 멀지 않은 이곳 고흥은 불심이 척박한 곳이었다. 척지, 금사, 신기 사람들에게 금탑사란, 통행 수단이 여의치 않은 형편으로 손쉽게 가 볼 만한 퇴락한 동네 절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에, 이 낡은 도량에 살게 된 스님들은 목청을 크게 돋구는 바 없이, 사는 바 눈여겨보니 기특하고나 싶어졌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사중에 세탁기 한 대 없이 지내다가 후원 보살이 어느날에 중고 세탁기를 하나 시주 받았던 일로 보아도 그렇다. 그는 그것을 거절의 예를 갖추어 새 세탁기 값을 치르고 되돌려 보냈다. 중이 빨래를 무서워하다니! 전기세나 물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 혼자 돌아가는 기계에 빨래를 맡기면서 나태해질 정신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뒤로 '짤순이' 한 대를 들여 놓았더라 했다. 그것이 짜낸 빨래가 겨울 햇볕에 얼다가 녹으면서 마르는 동안, 그 곁에서 바스락거리며 비닐 봉지도 마르고 있었다. 절집에 전해지는, "참기름을 헤피 쓰다가는 달팽이 몸을 받게 된다"는 말씀도 있거니와, 참기름 병 속에 젓가락을 찔러 넣었다 빼내어 나물을 무치는 살림, 버려서도 안 되겠지만, 버릴 것도 없었다.

한때는 나라 안에서 교통 사고율이 가장 높기도 했던 신양 고개에서 수륙재를 한번 올려 주신 뒤로는 몇 년째 사고 한번 나지 않고 있으니,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있나. 나무라도 몇 그루 찍어 불사에 보태야 되지 않겠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도 선뜻 베어 쓸 수 없었던 나무를 서까래감으로 또는 기둥감으로 시주를 해 왔다. 찍어넘기는 나무가 어디로 넘어갈지 알 수 없었으나 안타까운 마음뿐, 그는 대다라니만 대고 외어 불안한 마음을 눌렀을 따름이다. 그 나무 들여 놓고도 재목으로 다듬어 낼 형편이 못 되었다. 손을 묶고 지낼 적에, 비라도 내려 농사일이 억지로 한가해진 틈을 여투어 그들은 또 비옷을 입고 달려와서 손을 모아 껍질을 벗겨 냈다. 따지고 보자면 산 나무를 시주 받으면 그것을 목재로 다듬는 비용이 더 들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시주 받은 것은 '나무'가 아니라, 부락민들의 '순정하고도 따뜻한 마음'이었을 터였다.

1993년 겨울, 텅빈 도량을 함께 지키던 '형님' 한 분이 입적하시던 날, 무릎까지 눈이 내려 쌓여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인근의 네 개 부락민이 몰려와 하루 종일 눈을 치워 길을 내 주었다. 그러고도 감사 인사로 건넨 봉투조차 손사레를 치면서 마닸던 부락민들을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상을 당한 집에는 열 일 젖혀 놓고 달려가 염불을 해올려 드릴 따름이었더라 했다. 그들은 세밑 한추위에 법당의 유기물들을 닦으러 오면서 찹쌀, 깨, 찐쌀, 메밀 또는 들깨 가루, 니스칠을 한 조롱박 따위를 들고 와 공양간 구석에 슬며시 부려 놓는다. 메주 한 덩이, 하다못해 들에서 뜯은 나물까지 들고 오는 그들이다. 고흥 읍내로 일 나간 뒤 남의 손에 맡겨지는 젖먹이가 눈에 밟히어 무우 고은 물에다 흰죽을 끓여 들여다 주고 마는 그로서는, 해마다 떠나고만 싶었던 마음이 그 분들과 정이 들어서도 이젠 못 떠나겠노라 한다..

"내 꼬마 친구 훈이가 / 가을에 갈치 넣은 무왁자지를 먹으며 / 엄마! 너무 맛있다 / 우리 스님도 좀 갖다 주자 하며 / 그 작은 눈을 별처럼 초롱거리며 / 올려다보더라는 작은 눈빛을 생각할 때 // (…) // 정월 초하룻날 / 말도 겨우 하는 아기 친구 경식이가 / 엄마! 스님이 부르는 것처럼 불러 봐 / 경식아! 잘 있니? / 아니 말고 스님같이 불러 봐 / 경식아 잘 있냐 / 좋아라며 또 그렇게 또 해 봐 / 자꾸 조르더란 넙죽한 입을 떠올릴 때"('나는 가끔 사랑스런 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중)

이렇듯 오고감과 주고받음이 어여쁘니, 그렇다면 그가 이 곳에서 이루어 낸 두렷한 불사는 건물 불사가 아니라, 어쩌면 그의 대에서 끝나고 말지도 모를, 승속을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근원적인 관계 회복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승과 속이 함께 짜낸 베, 오늘의 금탑사를 품고 있는 산, '천등'을 어찌 적어야 할까 싶었더니, '천 명의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불 밝히어 든 등'으로 새기어야 옳을 듯하다.

병술생이니 올로써 세는 나이로 예순하나, 스무 살도 못 되어 시작한 산문 안 나날이다. 동학사 강원에 이어, 명봉 비구 스님에게서 두어 해 동안 〈금강경〉, 〈원각경〉 따위를 배웠다. 책도 안 보고 강을 해도 토 하나 틀림이 없던 분이다. 칠십 년대 초 전주 팔복동, 외길로 된 철길 건너 자리한 그 곳 감천사, 탁발과 간경을 함께 하며 애썼던 그 곤고한 세월 뒤로, 해인사 약수암과 보현암, 내원사 등에서 지은 좌복 위 정진은 모질기조차 한 것이었다.

"공부란 세 철 안에 가닥이 잡혀야 한다", "콩나물도 사흘 안에 싹이 트느니, (장판에 맹문이로 앉아 기름 때나 묻히는) 기름 수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싸움은 시작했으면 이겨 버려야 했다. 이미 '땡삐'니 '호랑이'니 하는 별호까지 얻어 둔 뒤였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 법이 없는 장좌불와 9년, 내원사에서 삼 년 결사를 세 번 해마쳤더니 십 년 세월이 흘러 있었다. 일주문 밖을 나오는 일도 없이 천성산만 오르내리며 몰두했던 때였다. 묵언 정진, 야채식 따위,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이라면 안 써 본 것이 없었다. 누가 시킨다고 그랬으랴.

스스로 좌복 위에 붙박아 버린 삶, 한 생각 뒤집어진 뒤에 누린 삶, 그러나 그것은 강제된 삶이 아니라, 어떤 시인이 읊은 것처럼, 소풍이라도 온 듯 법락(法樂)으로 가득했던 즐겁고 신바람 나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해인사 약수암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세 그루 노송 아래를 지나갈 때였다. 깃쳐 오르던 새 한 마리가 떨구고 간 것, 갈 '之'자로 한가하게 떨어져 내리는 하얀 깃털을 보는 그 순간에 온갖 망상이 일시에 녹아 버리더라 했다. 그것이 그저 부질없는 한 경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인가. 아니, 그저 한 경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더라도 그는 이제 일없다.

이 곳에 오면서도, 독살이는 생각도 못 해 보았다. 한 순간도 그런 생각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수행자로서 집 한 간 없이 살다가, 논두렁 밭두렁을 베개 삼아 지닌 바도 머물었던 흔적도 없이 그렇게 가볍게 가고 싶었다. 그랬던 만큼, "돈이란 벌어 본 적도 없었고 써본 적도 없었으니" 불사라는 것을 그렇게 멋모르고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 백만 원만 있으면 노스님들 많이 모여서 함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삼천만 원 빚을 내어 바랑에 담았으나 밑바닥도 못 채우는고나" 하는 자탄과 함께 휘말려 든 일, 이 도량을 새로 짓고 고쳐 짓고 개금한 것은, 여러 대중을 전제로 한, 대중이 함께 살며 공부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십 년 세월 동안에 늘 대여섯 대중이 함께 살던 곳, 지금 접객실로 삼고 있는 응향각에는 장군 죽비가 그대로 걸려 있거니와, 선방이 개원되기 전까지, 이 곳에 스무 명 선객이 좌복에 앉았었다. 이곳이 인연이 되어 발심의 계기를 챙기는 속인은 또 없을까보냐.

공부법에 고금이 따로 있을 것인가. 일신을 안온히 두어 두는 일이란 당치 않은 일이다. 시류란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공부인이 '이끌어가야 할' 바이다. 수행자란 모름지기 몸은 좀 불편하게 거두는 가운데 마음을 챙기어야 하느니, 좌복 위 정진뿐 아니라, 나날의 삶에서도 서림 스님 자신이 모범을 지어가야 할 터였다. 선방 문 해달고, 방부 인원은 스무 명이 넘지 않게 하리라. 그러고 있던 차에 몸에 탈이 났다. 몸이 마음 같지 않아진 지는 수삼 년 전부터였다. 세 끼 공양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바, 법을 거둘 몸을 그 동안 너무 홀대했던 것이다. 조사 스님들도 그저 일로써 몸을 단련했을 뿐일 텐데, 우스워라, 약도 지어 먹어 가며 어지간히 몸을 추슬러낸 오늘, 포행만큼은 조석으로 맘 먹고 일로 삼고 있다.

***저 찻잎에 쌓인 눈은**

그런 시간, 그의 눈에 새삼스럽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동이 트면 관세음보살의 옷자락과도 같이 찬란한 햇빛이 법당을 돌아가며 비추는 곳, 나무관세음, 저절로 탄식하게 만드는 곳이다. 드물게 눈이라도 내리면, 법당을 도탑게 뒤두른 비자나무 숲은 흰 눈 아래 검은 눈썹과도 같이 더욱 또렷해지곤 했다. 누가 읊으셨나, 명아주 지팡이 짚고 이 곳에 걸음했던 옛사람, "영주[바닷가 마을] 땅은 깨끗하기가 신선굴과 같도다" 읊으신 곳이다. 바닷가라 그런가, 가을이면 유난히 노을이 아름다운 곳, 어느 때에 본, 저녁 예불 무렵에 법당을 휩싼 햇살은 필경 천상에서나 볼 만한 자금색이었다! 한두 마리씩 날아들어 이 적막한 산중을 잠시잠깐 흔드는 까마귀들도 반가워 밥 공양을 올렸더니, 이후로 크게 불어나 버린 그것들, 그런 아침에는 도리없이 그것들도 금까마귀가 되어 버린다.

십 년 불사 끝에 남은 자투라기 목재와 고운 황토 흙을 몸소 짓이기어 선방 위에 움막 한 채 지은 것은 그러께 일이다. 부러 전깃불도 달아 넣지 않았으나 해와 달이 번을 갈아 들고 나니 그리울 것이라고는 없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해다 쟁여 잘 마른 잡목을 아궁이에 지피면 솥의 물이 절로 끓고, 그 속에 두어둔 양재기 물도 덩달아 끓어 그가 우려 마시는 찻물이 되어 준다. 세 칸 집 옆퉁이에 있던 숯 가마터는 허물기 못내 아까워서 지붕 하나 더 얹으니, 무덤처럼 고요하고도 아늑한 혼자만의 선방이 되었다.

이곳에 혼자만 머무시나 했더니 아니라 했다. 이 한겨울에 길을 잃고 찾아든 집게벌레, 귀뚜라미 새끼, 개미…. 때로는 벌도 오시고, 지네도 심심찮이 찾아오신다 했다. 사람보다 눈치가 빠안해서, 쓸어낼 생각을 하면 움직임을 멈추고 내게 뭐라고 이릅니다 그려, 한다. 이가 맞지 않는 문창 안으로 스며든 바람이 촛불을 잠깐 흔들었다. 그 희미한 촛불의 흔들림을 따라 눈길이 머문 방 구석에 '쌍방울', '아가방'이란 글자가 보였다. 황토흙이 부풀지 않도록 깔았다는 천조각 끝에 붙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무늬가 선연히 남은, 쓰다 버린 아기 포대기의 조각천도 보이는고나.

무엇이 못내 그러하다는 것일까.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이이' 하고 동백숲 위로 날아가며 우는 저 새! '홀딱벗고, 홀딱벗고'…. 초여름이 되면 그렇게 우는 '홀딱새(검은등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누구는 '됫박바꿔, 밥해먹세'로 듣고, 날마다 제 등짝을 후려갈기는 엄마가 미운 꼬마는 '똑똑하네, 똑똑하네'로 듣고, 서림 스님은 방 어둠 속에서 '밥만먹고, 잠만자네' 하며 이 게으른 수좌를 꾸짖는 소리로 듣는다.

"개골개골개골개골 / 별들이 무수히 연못에 떨어진다"('개구리' 전문), 그런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언제나 기운이 쇠해지던 까닭을 몇 년 전에사 알았다. 쑥단에 불을 지펴 모기를 쫓으며, 도량 안으로 아늑히 번져 나가는 연기의 자취를, 또는 도량을 서늘하게 하는 냉갈이 밤하늘의 은하수에까지 다 닿은 듯, 그렇게 맑고 초롱한 밤하늘의 별을 더 이상 평상 위에 누워서 볼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었고나.

그를 보고 찾아와 체발(剃髮)을 하려는 이들은, 대여섯 달쯤을 겨우 채우는 세태와는 달리, 두세 해 동안 꼬박 행자살이를 해야 한다. 떨어지면 기워 입고 신어라. 양말 한 켤레, 속옷 한 벌, 계를 받으러 떠날 때는 얻어다 빨아놓은 장삼 한 벌 받는다. 풀독이 오른 몸으로 떠난 길, 수계조차 못하게 생겼단 말을 듣고 그는 혀를 찼다. 피부병? 그 중은 풀독도 모르고 살았던갑네잉!

그러나 어른 노릇이 쉽기만 했겠는가. 수혜 노스님이 이 산중을 오래도록 든든히 지켜 주고 계시거니와, 참으로 힘에 겨워 고꾸라질 지경이던 그에게 자연은 또다른 든든한 의지처였다.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적어 보면 되지 않겠느냐. 그는 대중들을 독려하여 함께 시를 지었다. 잘 된 것은 적어서 벽에 붙여 놓고 함께 새기자꾸나. 아직 몸이 더운 나이 어린 대중의 번민을 슬며시 꺼트려 줄 방편, 그러나 그 일은 대중들과 함께 하다가 그치고, 이후로 그이가 혼자서만 지속하는 일상이 되었다.

가난은 해도, 산중의 살림은 글로 옮기기만 해도 시가 될 만한 것이었다. "봄이 오는 물소리는 들뜨는 소리 / 가을 물소리는 갈앉는 소리"('물소리' 전문), 그렇게 자연에서 실상을 보아 내기도 하지만, 돌팍이 감자로 보이던 배고픈 젊은 날을 보냈다는, 절 돌담을 쌓는 처사가 들려 주던 신세타령도 그에게 와서는 시가 되었다. 유치원 다니는 효영이가 일기로 쓴 내용을 시로 읊은 것도 있다. "엄마 아빠는 바닥에 나가서 / 일을 함심니다 / 피곤해서 낮잠을 잠심니다 / 그 마음으로 이 마음으로 / 다 암심니다"('유치원생 효영이 일기' 전문).

시 짓기에 필요한 형식이란, 그로서는 지켜야 할 틀이 못 되었다. 애당초 그가 염두에 두어 본 바 없었으나, 나날의 삶을 탈격으로 읊은 그것은 모두 시가 되었다. "시방 나도 나를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 글쎄 날보고 道를 묻네 // 내가 먹은 밥값을 알려 주면 / 그 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했네"('글쎄 날보고 도를 묻네' 중). 어느 날에 그를 찾아와서 도를 묻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눙치셨다더니, 동백꽃 그늘 아래로 스님을 따라 걷는 객을 향해 죽비 한 방 맵게 내리치시는고나. "저 찻잎에 쌓인 눈 좀 보소잉. 똑 제 분상(分相)만큼 눈을 담고 있잖허요?"

그것이 언제적이었더라, 까마득히 잊고 마는 지난 날, 이제는 맏상좌 휴정에게 주지 소임을 맡기고 '뒷방 한주'로 물러나 있지만, 그가 소임을 맡고 있을 적에도 수자 놀음이 서툴거나 또는 아주 없었다. 머물러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고나. 쇠똥이며 닭똥 따위가 널린 궂은 땅 밟기가 꺼리어져 그랬을까. 그것이 아니면 전생에 짓던 계족(鷄足) 수행의 습이 남았던 것일까. 깨금발로 가려 딛던 땅, 그렇게 따박따박 걸음 옮기는 아이 적부터, 동그란 흙무덤은 무서워 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그저 안온한 놀이터로만 여겨졌던 바, 전생에 공부를 짓던 끝에 '저 너머'를 이미 봐 버리지 않았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을 터였다. 십 년 공부 짓던 내원사 선방이 한 순간도 그에게 회고조로라도 머물렀던 적이 없듯이, 곡절 끝에 〈세상소리〉(2000년, 동서고금刊)라는 이름으로 시집 한 권 세상에 내보냈다 한들, 이 또한 그에게는 머무는 바 되지 못할 터였다.

만덕산(萬德山) 개울 끼고
절 속이 괴괴한데
물길만 겨우 발자욱 나 있네

굴뚝에 냉갈빛 눈발에 어둑지고
군불 지핀 꺼벙한 중 여닫는 문소리가

늦은 저녁 산울림
이산 저산 맞닿네

-'산사의 저녁' 전문

십 년 불사를 아쉬우나마 회향식으로 마무리해 버리고 난 지금, 뒷방에서라도 거들 것이 있다면 아주 손을 놓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오늘 그의 마음은 홑지기만 하다. 이후로 한 해쯤은 기도를 하고 싶다. 불사에 필요한 돌과 흙 따위를 얻으려고 어쩔 수 없이 파헤친 산, 숨태인 곳에서 온전히 살지 못하고 터를 앗긴 나무와 풀과 벌레들이 적잖을 터였다. 그들을 위해 '천도의 제'를 그렇게나마 조촐히 지내 올리면서, 경전도 손 가까이 당겨다 놓고서 부처님과 좀더 친해지고 싶다.

뼈대만 목수의 손을 빌어 세운 뒤, 부치는 힘만 거들어 주는 두셋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은 집, 손수 흙을 밟고 담을 쌓은 곳, 그렇게 움막 한 채 지어 들앉고 나니, 선방으로부터 끼쳐지는 먼 불빛조차 성가시더라 했다. 그가 스스로 모셔온 어둠 속에 함께 앉아서 객은 속마음으로 묻는다. 오늘 우리에게 전기가 밝혀 준 것은 무엇이고, 눈 멀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 환한 불로써 그렇게 많은 것을 얻고도, 아주 귀한 그 무엇을 놓쳐 버렸길래 이렇게 눈을 뜨고 있어도 한밤중처럼 어두울까.

비만 조금 많이 와도 별일이 없는지 절로 올라와 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 늘 함께 어두운 저녁 포행길 동행하는 아랫말 이장님 내외, 직수굿이 머리 숙이고 앉아 객과 함께 스님 법문 듣는 동안에, 산사의 겨울밤은 똑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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