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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맘' 먹은 교사들, 시골에서 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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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맘' 먹은 교사들, 시골에서 일 냈다

[민들레 교육 칼럼] 또 하나의 대안, 산촌유학 <1>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풍경, 그 맞은 편에는 학교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스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래서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제대로 살기를 고민하다

2000년 9월 전주 시내 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전교생 2천 명, 한 반에 46명인 아이들과 십 년 동안 생활하면서 그게 맞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무렵 나는 방탕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교사였다. 교육보다는 술자리에 더 관심이 많았고, 아이들과의 소통보다는 유명 브랜드 옷에 관심이 갔다. 더 멋진 차를 타기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였고, 틈만 나면 자동차 개조에 열을 올렸다. 거의 날마다 이어지는 술자리는 몸을 점점 무겁게 만들었고, 유명 브랜드 옷과 자동차 개조에 드는 돈 때문에 월급날은 카드 대금 막는 날이었다. 그러면서 내 몸에서는 신호가 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병원에 3주간 입원하는 큰 수술을 받고, 그 뒤로는 알레르기 비염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민들레>에서 이명학 님이 쓴 "따로국밥 교사들에게 고함"(<민들레> 45호)이라는 글을 읽었다. 당시 교사 생활 7년차로, 교사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조차 없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그 뒤 교사란 무엇이고, 내 삶의 주체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자꾸 쌓여가던 답답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답답함이 삶의 의식을 바꾼 계기가 되었고, 희망이 되었다. 당시에 나는 답답함을 주변 동료 교사들에게 털어놓곤 했다. 혼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처럼 답답해하며 살고 있는 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바로 그 사람들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져, 지금 임실에서 교육문화연구회 '도담도담'이라는 모임도 꾸리고 산촌유학도 같이 의논하며 든든한 동무로 삶을 나누고 있다.

교육문화연구회 '도담도담'을 조금 더 소개하자면, "따로국밥 교사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함께 읽고 5년 전에 초등과 중등교사 5명과 전주교대 재학생 5명으로 시작된 모임이다. 처음에는 모인 사람들 성격에 맞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그 막걸리가 우리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막걸리를 사이에 두고 나누기 시작한 학교 이야기, 교사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는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고민으로 확대되고 결국 자기 삶의 고민으로 번져 공동의 삶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농촌 학교를 활성화할 수 있을까? 우리 교사들이 농촌에 가서 살면서 우리 자식들을 그 학교에 보내면 최소한 학생 수가 줄어들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과 교사로서 학부모로서 지역주민으로서 살면 좋은 대안 세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렇게 해서 2009년 내가 먼저 임실군 운암면 월면리에 집을 짓고 2010년 대리초등학교에 전근을 오게 되었다. 그 뒤 한 명 두 명씩 들어와 지금은 13명의 교사들이 임실의 3개 마을에 흩어져 살면서 작은 학교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농촌에 가서 살면서 농촌 학교에서 근무하고 함께 작은 교육공동체를 이뤄보자는 잡담이 현실이 된 것이다.

대리마을에 유학센터가 생겼다

내가 대리마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무슨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임실은 치즈로 유명하지만 들여다보면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다. 학업중단률이 매우 높은 지역이고, 민선 자치단체장이 부정으로 한 번도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곳이다. 지역이 낙후되어 있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주와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은 방귀 꽤나 뀌는 사람에게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떠나는 구실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구미가 당겼다. 교사로서 많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고,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임실을 택했다.

대리마을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이 떠나가는 학교, 아이들과 함께 마을이 사라지는 현실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다, 먼저 '학교 살리기'가 할 일이다 싶었다. 대리초등학교는 이미 2009년에 단 한 명의 입학생도 없었고, 전교생 16명인 폐교 대상 학교였다.

먼저 마을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마을의 자산과 현실적인 마을 상황 등. 대리는 역사적으로 교육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이득환 선생이란 분이 서당을 지어 후학을 기르는 데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한 덕분에 대리는 지금도 인근에서 학덕 높은 마을로 꽤 알려져 있다. 특히 선생은 자손이 없어 재산을 마을에 남겨 두고두고 제자들이 배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했다. 제자들은 그 뜻을 이어 '남애'라 이름 붙인 일종의 마을 공부방을 만들어 배우고 익히기를 즐겨 했다. 그분의 시제를 지금도 해마다 지내고 있을 정도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그 문화와 역사를 아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정보를 알고 나니 더욱 관계 맺기가 수월했다. 소통을 잘 하려면 무엇보다 그 마을 어른들이 무엇에 자부심을 느끼는지 알고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육과 뗄 수 없는 이 마을의 훌륭한 역사가 있는데, 학교를 잃고 교육을 잃으면 되겠나, 우리들이 열심히 한번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마을 행사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인사를 잘하는 건 기본이었다. 처음에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른 귀농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우리는 겪지 못했다. 누구도 왜 왔는지 의심하지 않았고, 어르신들은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둘러 먼저 인사를 하시곤 했다. 교사라는 직업 덕을 엄청 본 셈이다.

▲ 학교 옆에 자리잡은 대리농촌유학센터 ⓒ민들레

그렇게 마을 속으로 들어가면서 도담도담 교육문화연구회가 처음 시작한 일은 임실 대리마을에 산촌유학센터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강원도 양양의 산촌유학센터와 공수전분교를 직접 찾아가 사례를 듣고 본격적인 산촌유학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이 중심이 되어야 해서 마을 어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기까지 세 달이 걸렸고, 자치단체와 협의를 하는 데 여덟 달이 걸렸다. 마을에서 땅을 내놓고 군비 2억을 지원받아 거의 일 년이 넘어서야 마침내 36평짜리 농촌유학센터를 세울 수 있었다.

처음 마을임원회의에 찾아가 산촌유학이란 걸 하려면 도시 아이들이 묵을 집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니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들에겐 너무 먼 이야기였던 셈이다. 산촌유학을 하면 마을에 어떤 도움이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당신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알려드려야 했다. 공감을 이끌어 내는 데 그 전에 조사했던 마을의 역사가 요긴하게 쓰였다. 이곳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었는지, 학교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이득현 선생의 시제와 연결해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마음이 동하는 듯했다. 거기에 대리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마을회관을 찾아 주민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추진위원회에 참여함으로써 마을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계획서를 만들어 임실군을 찾아갔다. 군은 도시 아이들이 시골로 유학 와 학교를 살리고 마을을 살린다는 취지에 적극 공감하고 협조를 약속했다. 이후 대리마을은 대리초등학교와 군청, 교육청과 함께 임실교육특구추진협의회를 구성했고, 임실군에서는 2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예산 집행 과정도 만만찮았다. 예산 집행의 방법과 절차를 놓고 마을과 임실군의 이해가 매우 달랐고, 담당자가 수시로 바뀌곤 했다. 또 다른 지역에서 왜 대리에만 특혜를 주느냐는 지적도 나왔고, 임실군 내부에서도 산촌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부서 간 협조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유학센터를 다 짓는 데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려 거의 여덟 달만에 완공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걸로 다 끝난 것도 아니었다. 건물이 다 완공되고도 도의회는 학생 안전 대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고, 언론에서는 도시 아이들이 오는 건 위장전입이라며 문제를 삼기도 했다.

마을의 중심, 산촌유학센터

이렇게 세워진 대리 산촌유학센터에는 2012년 4월 현재 서울과 인근 도시에서 온 유학생 14명이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 대리초등학교는 산촌유학을 시작한 이후 학생 수가 해마다 늘어나 현재 유치원생을 포함해서 90명이 되었다. 아이들이 늘면서 학교도 활기차고 즐거운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산촌유학을 생각하고 센터를 만들고 도시에서 아이들이 찾아오는데, 센터에서 아이들을 지내며 보살필 적합한 사람을 찾는 일이 참으로 중요했다.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기도 하고, 같이 준비하던 멤버들 중 누가 없을까 심사숙고하기도 했지만 막상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마침 도시에 살고 있던 여동생이 귀촌할 뜻이 있어 같이 이 일을 해보자고 설득했다. 동생은 오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내려와 마을 부녀회원으로, 또 유학센터장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도우며 함께 가는 귀한 동지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센터에서 먹고 자며 지낸다. 주말이면 같이 장에도 가고 아웅다웅하며 또 하나의 가족으로 생활하는 셈이다. 센터장은 그 중심에 있는 존재로 일상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킨다. 도시에서 주의력결핍이니 하는 꼬리표가 붙었던 아이들도 여기 와서는 언제 그랬냐 싶게 잘 지낸다. 아이들이 그렇게 편하게 이곳 생활에 젖어드는 데는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센터장의 역할이 크다.

도시에서 처음 유학 온 아이들은 집에 가고 싶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고, 날마다 전화기를 돌리더니 이제는 주말이 되어도 집에 가지 않으려고 해서 힘들 지경이 되었다. 도시 부모들은 아이들이 너무 집에 전화도 안 하고 소식이 없으니 오히려 서운해하기도 한다.

유학 온 아이들이 마을에서 맨 먼저 하는 일은 마을 어른들한테 혼나는 일이다. 채소와 들풀이 구분이 안 돼 텃밭 채소를 밟아 망쳐놓거나, 길가에 쌓아둔 비료나 퇴비를 터뜨려놓거나, 어른들은 농사철에 피곤하시다 보니 어두워지면 일찍 잠을 청해야 하는데 소란을 피워 잠을 깨우는 등 혼나는 일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혼나면서도 어른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하고 씩씩하게 지내는 아이들 덕분에 마을은 생기가 넘친다.

유학센터는 마을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엠티 장소다. 같이 숙제도 하고 수다 떨며 놀다가 자고 가기도 한다. 지금은 누가 유학 온 아이인지 마을 아이인지 거의 구분할 수 없게 지낸다. 생각해보면 구태여 구분할 필요도 없다. 그렇듯 자연스레 넘나드는 아이들이 참 부럽다. 유학센터는 부모들에게는 유익한 모임 공간이다. 아이들을 시골에 보내놓고 궁금한 부모들이 가끔 찾아와 머물고 가기도 하고, 부러 공부모임을 만들어 모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만 유학 온 게 아니라 부모들 마음도 같이 와 있는 듯하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놀고 우정을 쌓아가고 부모들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희망을 쌓아간다.

유학센터는 기본적으로 센터장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주위의 도움 없이는 힘겨울 일이다. 여기에 큰 힘을 보태는 게 도담도담 교사들이다. 교사들은 운영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기도 한다. 아이들 진로에도 구체적인 도움을 준다. 마을 중학생들과 5명의 젊은 교사가 멘토 관계를 맺고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무엇보다 마을과 지자체 사이에서 중간 지원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말로만 흘러 다니는 마을 활성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문서로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도담도담 교사들의 몫이다.

대리산촌유학센터는 유학 비용을 가능한 낮추려 노력하는 중이다. 현재도 다른 곳에 비해서는 싼 편으로 알고 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못 오는 불상사가 없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리는 센터 공간도 지자체와 마을의 도움으로 마련했고, 센터장을 포함한 상근 활동가들이 학교 방과후 수업을 한다든지 하는 형식으로 인건비를 따로 마련해서 지금의 비용을 유지하고 있다. 센터장과 학부모들이 유학센터와 학교를 오가며 봉사하고 공부한 경험을 살려, 방과후 제과제빵 수업을 지원하는 '찾아가는 맛있는 학교'라는 회사까지 만들었다. 인근 마을에 벌써 소문이 나 초·중학교에서 서로 수업해달라고 요청하는 꽤나 유명한 회사가 되었다. 거기서 수익이 발생하면 어쩌면 더 비용을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놀고 있다. ⓒ민들레

교사들이 딴 맘 먹으니

임실 산촌유학은 아마도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시도한 첫 사례일 것이다. 교사들이 먼저 뜻을 모으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던 듯하다. 사실 교사이자 지역주민이면서 학부모이면 농촌에서는 엄청난 권력이다. 학교 종이 땡 치면 집이 있는 도시로 달려가버리는 교사들은 마을주민들로서는 섭섭할 수밖에 없다. 교사들이 마을에 살면서 학교를 살려보겠다는데 도와주지 않을 마을주민은 없다.

도시에서 교사 생활 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만족감을 느낀다. 사람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일, 마을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존재라는 사실, 이만큼 살맛 나게 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존재를 인정해주시는 마을 어른들을 위해서라도 더 마을에 보탬이 되고 싶고 뭔가 역할을 하고 싶어진다. 한낱 초등학교 교사가 어디 가서 이런 호강을 하겠나? 농촌 생활이, 농촌 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이 더욱 즐겁게 느껴지는 점이다. 이런 즐거움은 나만 누리는 게 아니다. 함께 이곳으로 온 도담도담 교사들도 다들 비슷하다.

도담도담 교사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없는 집 큰 애기'가 거의 대부분이다. 교사가 되어서는 내 생활보다는 먼저 부모님을 챙겨드려야 하는 형편이다. 다른 교사들처럼 좋은 아파트에 좋은 차를 타기 어렵다. 그런 현실적인 조건이 어떻게 작동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교사로서 고민도 많고, 농촌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대리마을에는 이런 교사들이 모여 산다.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사는 교사,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처가살이 하는 교사, 거기에 총각 선생님들까지 5명이 함께 살고 있다. 마을 행사에 가서는 음식 나르는 일부터 뒷정리까지 솔선수범하고, 마을 어른들이 주시는 술을 넙죽 받아 마시고 다음날까지 고생하기도 한다. 특히 총각 선생님들은 모두 장남인데 한 집에 모여 살면서 맏형부터 막내까지 또 다른 가족의 모습을 만들었다. 아이들이랑 노는 것과 운동을 좋아하고 막걸리 마시는 걸 무척 좋아한다. 학교에서는 교사지만 마을에서는 영락없는 철부지 총각들이다. 장가 이야기가 나오면 본인은 걱정 않고 서로 장가 못 간다고 놀려댄다. 빨래가 밀려 방은 빨래 차지이고, 청소가 안 되니 집은 무척 어수선하다. 이제는 내가 가서 잔소리해도 웃기만 한다. 아침에 어른들을 만나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밝게 인사한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19세기 학교 현장에서 20세기 교사로 방황하던 나에게 21세기 아이들을 만나게 해준 게 산촌유학이다. 귀촌해서 살고 싶은 교사라면 산촌유학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뜻 맞는 교사들 몇이 힘을 모으면 어렵지 않게 지역의 작은 학교를 좋은 학교로 만들 수 있다. 도시에서 힘들게 살지 말고 농촌에 모여 살면 재미나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처음 막연하게 농촌에 가서 살자고 했던 교사들은 지금 마을과 학교를 연결하는 역할을 즐겁게 하고 있고,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신선함과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보람도 함께 느끼고 있다. 알고 보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교사들이 많이 있다. 이 글을 읽는 교사들에게 '도시에서 사는 삶도 좋지만 농촌에서 사는 것이 더 보람 있다. 도시의 분리된 존재감보다는 더불어 사는 농촌 공동체에서 느끼는 존재감이 더 크고 재미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교사들이 없는 농촌은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의 기반인 농촌이 사라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꼭 의미, 사명감이 아니라 교사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농촌으로 와서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교사들이 마을과 학교를 이어주고 도시의 아이들과 농촌의 아이들을 이어주는 농산촌유학의 중심축이 되었으면 좋겠다. 따로국밥 교사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맛이 좋아지는 비빔밥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한다. 마지막으로 뵌 적은 없지만 나의 마음과 몸을 지금의 농촌으로 옮길 수 있도록 "따로국밥 교사들에게 고함"을 써주신 이명학 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 위의 글은 <민들레> 80호에 실렸던 양성호 교사의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양성호 교사

전북 임실 대리마을에 농촌유학센터를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인근의 기림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또 하나의 산촌유학 현장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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