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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작갑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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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작갑전 앞에서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6〉의해편 '보양이목'조

나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자주 가는 편이다. 청도 인근에 가게 되면 으례 운문사를 찾곤 한다. 볼일이라도 있어 경주에 들르게 되면 일을 끝내고는 건천읍으로 해서 단석산 고개를 넘어 운문댐을 따라 구비구비 운문사 골짜기를 들어간다. 일연의 자취를 찾는답시고 현풍 비슬산을 올랐을 때에는 청도 쪽으로 하산하여 운문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언양 쪽에서 운문령 고개를 넘어 운문사를 찾아간 적도 있는데 가슬갑사 유지(遺址)를 찾는다고 나섰다가 찾지 못하고 싱겁게 운문사로 넘어와 버린 기억이 있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운문사를 들락거리다 보니, 근처 다른 곳들을 찾을 기회도 많았다. 운문사 인근에는 알려지지 않은 볼거리들이 제법 있다. 운문사에서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소작갑사 흔적으로 알려진 대비사(大悲寺)가 있는데, 금천면 소재지를 거쳐 찾아가다 보면 운강고택, 석조여래좌상 같은 유적들도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이웃 매전면에도 장연사(長淵寺) 터에 통일신라 때 3층 쌍탑이 감나무 과수원 안에 얌전히 서 있고, 거기서 북서쪽으로 산 중턱 불영사(佛靈寺)에,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신라 시대의 3층 전탑(塼塔) 하나가 폭포를 내려다보며 그윽히 서 있기도 하다. 그 뿐인가? 청도읍을 지나 서쪽으로 풍각면을 거치다 보면 봉기리 3층탑의 미끈한 모습도 볼 수 있고, 북쪽으로 각북면의 용천사(湧泉寺)에서는 일연의 불일결사(佛日結社) 자취까지 더듬을 수 있다. 이렇게 줏어섬기다 보니, 건성으로 한번씩 들러본 운문사에서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이웃 동네에서 더 알뜰하게 볼거리를 찾아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작년 봄에는 팔공산 동화사를 갔던 길에 운문사를 찾았다. 동화사 근처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불현듯 운문사의 아침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튿날 일어나던 길로 운문사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운문사에 당도했을 때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 햇살이 마악 비쳐들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벚꽃이 눈부셨다. 야트막한 담장 따라 난 길 위로 벚나무 꽃가지들이 터널을 이루어, 온 세상이 벚꽃 빛이라 눈 둘 바 모르겠던 황홀경이었다. 그렇게, 아침 햇살과 벚꽃에 감탄하면서 나는 범종각 아래로 운문사 경내로 들어섰다.

절 뜨락에는 아무도 흐트리지 않은 새뜻한 아침 기운이 깔려 있었다. 처진 소나무의 널따란 가지폭에 내려앉는 햇살이 또 싱그러웠다. 나는 그 풍경을 즐기며 느릿느릿 작갑전 쪽으로 향했다. 명부전과 관음전 사이 그늘에서였던가? 그리 굵지 않은 자목련 한 그루가 하늘을 향하고 자줏빛 꽃들을 터뜨리고 있었다. 관음전을 지나 작갑전 뒤쪽에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거기 전각 앞으로 정갈하게 쓸려진 마당 모습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바닥에는 부채꼴 무늬가 채곡채곡 쌓여진 모습의 빗자루 자국이 선명했다. 누군가가 명부전 앞에서부터 작갑전 앞까지 뒷걸음으로 빗자루질을 했을 터. 그렇게도 곱게 마당을 쓸어놓은 정성이라니, 나는 한참 동안 마당 바닥에 눈을 주고 있었다.

나는 운문사에 들르면 작갑전부터 찾는다. 작갑전 앞에서 잠시 마음을 모은 다음, 그 안에 들어가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상 석주를 뵙는다. 그리고 작갑전을 나와서는, 멀찌감치 물러나서 사모지붕과 지붕 가운데 솟은 복발(覆鉢)과 보주(寶珠) 모양의 장치를 바라본다. 그 장치는 작갑전이 탑이었다는 흔적이다. 작갑전은 원래 5층 전탑이었으며, 그 원위치도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니라 금당의 석등 앞이었다고 한다.

작갑전은 운문사의 핵심이다. 작갑전 안 좌우 양쪽 벽에 기대어 세워진 네 개의 사천왕상 석주는, 지금은 사라진 5층 전탑의 기단부 장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항마촉지인의 석조여래좌상은 보양이 운문사를 중창했을 때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작갑전의 전신인 5층 전탑이 운문사 초창기부터 절의 중심 건축물이었음은 『해동고승전』이나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해동고승전』 '원광'조의 기록을 옮겨본다.

"스승[원광]이 신(神)에게 물었다.
"절을 창건하려는데 어느 곳이 좋을는지요?"

신이 대답했다.
"저 운문산에 가면 뭇 까치가 모여 땅을 쪼아먹고 있을 터인즉 바로 그곳이 절터이다."

이튿날 아침에 스승은 그 신 및 용과 함께 가서 그 땅을 살펴보고 곧 땅을 팠더니 과연 석탑(石塔)이 있었다. 바로 절을 지은 다음 운문(雲門)이란 액자를 달고 이에 머물러 살았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해동고승전』의 그것과 다르다. 『삼국유사』는 의해편 '보양이목(寶壤璃目)'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양(寶壤)법사가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누런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서 찾아보면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법사는 바다 용이 작갑(鵲岬)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前代)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작갑사라고 했다.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 기록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문사의 역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운문사의 역사를 얘기할 때 흔히 『조선사찰사료』 중의 『경상북도 청도군 동호거산 운문사 사적』을 든다. 여기에 따르면 한 도승(道僧)이 운문사 터에 와서 암자를 짓고 머물다가 560년에 뜻맞는 도우 10여 명과 함께 7년에 걸쳐 가슬갑사, 천문갑사, 대비갑사, 소보갑사 그리고 지금의 운문사인 대작갑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진평왕 12년(590년)에 원광법사가 처음 중창(重創)하고, 고려 태조 20년(937년)에 보양국사가 두번째 중창하였으며 고려 숙종 10년(1105)년에 원응국사가 세번째로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해동고승전』의 기록이 원광의 1차 중창을 얘기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보양의 2차 중창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두 기록 모두 '까치가 땅을 쪼은 곳', 즉 작갑(鵲岬)에 탑이 있었다고 적고 있으나, 『해동고승전』은 원광이 석탑을 캐내었다고 적고 있음에 비해, 『삼국유사』는 보양이 허물어진 전탑을 복원했다고 적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운문사 사적』은 그러나 1차 중창 연대를 잘못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 의하면 운문사가 1차 중창되었다는 590년에 원광은 중국에 유학 중이었다. 따라서 원광의 운문사 중창은 그가 중국에서 귀국한 600년 이후의 일이 될 터이며, 원광이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귀산과 추항 두 젊은이들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을 감안할 때 600년에서 원광이 죽은 64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운문사가 중창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캐냈던 탑이 석탑이라는 『해동고승전』의 기록도 잘못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우, 탑은 분황사 모전석탑을 시작으로 황룡사 탑 같은 목탑이 먼저 세워지고 그런 다음에야 석탑이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애초에 운문사에 세워졌던 탑은 『해동고승전』의 '석탑'보다는 『삼국유사』의 '전탑'이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운문사 사적』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운문사 사적』은 원광의 1차 중창 후, 937년에 보양이 5층 전탑을 중수하여 2차 중창을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 두 시기 사이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하나 빠뜨리고 있다. 운문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 여럿 있다. 작갑전 안의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상 석주가 보물이며 범종각 인근 전각에 모셔진 원응국사비가 보물이다. 그리고 비로전 앞에 서 있는 3층 쌍탑과 금당 앞 석등이 또한 보물이다. 문화재청의 안내문에 의하면 금당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고, 3층 쌍탑은 9세기 경에 세워졌다고 되어 있는데 이 점은 운문사의 역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탑이나 석등의 건립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때문에 여간 재력이 있지 않은 단월(檀越)이 아니고서는 그런 것을 건립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왠만한 탑이나 불상의 건립에는 대개 왕실이나 유력한 귀족의 후원이 있게 마련이고, 탑이나 불상의 건립 자체가 국가적인 행사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3층 쌍탑과 석등의 존재야말로 9세기 경 운문사에, 중창에 해당하는 대역사(大役事)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운문사 사적』은 이를 무시하고 보양이 937년에 5층 전탑을 중건한 사실을 2차 중창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3층 쌍탑과 금당 앞 석등의 건립으로 면모를 일신했던 운문사는 그러나 후삼국 시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후원자를 잃고 인근 5갑사와 함께 퇴락의 길에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저간의 사정은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 "신라 시대 이래로 이 고을 사원(寺院)들로서 작갑 이하 중소 사원들은 삼한이 난리로 망하는 통에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다섯 갑이 모두 무너져 없어지고 다섯 갑의 기둥을 합하여 대작갑에 두었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후삼국 말기에 보양이 고려 태조를 도운 인연으로 937년 태조가 다섯 갑(岬)의 전답 5백결을 절에 바치고 '운문선사'로 사액(賜額)을 내리기에 이르렀고 보양은 이 때에 운문사의 상징이라 할 5층 전탑을 중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5층 전탑의 초창(初創) 시기에 대해서, 최근 1987년에 작갑전 안 석조여래좌상 대좌 아래에서, '함통 6년'(865년)이라는 연도가 표기된 납석제 사리함이 출토되면서 전탑이 865년에 건립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에 따른다면 5층 전탑의 건립과 연계되는 운문사의 창건 연도가 9세기 후반인 865년으로 내려잡히게 되어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운문사 사적』 등의 운문사 관련 기록들과는 현격한 연대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사리구가 출토된 작갑전 석조여래좌상 대좌 밑의 사리공이 5층 전탑 심초석의 사리공과는 별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탑의 건립 시기를 865년으로 내려잡기보다는 오히려 올려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우현 고유섭 선생의 『한국탑파의 연구』에 참고가 될 만한 대목이 있다. 우현 선생은 신라의 전탑을 논하면서 "역사적으로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청도군 운문산 작갑사의 5층 전탑이다"라고 한 뒤에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의 전탑 대목을 인용한 후 바로, "현재 운문사에는 우수한 3층 석탑 쌍기가 남아 있으나 5층 전탑의 존재는 전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매전면 용산동 불영사에 전탑 잔결(殘缺)을 모아 높이 쌓아 보존하고 있고, 장구(長矩)의 전(塼)의 면에 불좌상 및 3층 탑형을 번갈아 부출(浮出)한 것과 우려(優麗)한 당초문을 형압(型押)으로 부출한 것이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운문사 5층 전탑과 매전면 불영사 전탑과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탑에 관해 꾸준히 연구해 온 위덕대 박홍국 님은 『한국의 전탑 연구』에서 운문사 5층 전탑의 865년 건립설을 인정하면서도,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의 기사를 의식하여 "전대에 무너졌던 전탑을 재건하였다는 기사를 받아들이면 ― 이 구절은 운문사에 삼국시대의 전탑이 있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여운을 남기고 있다. 즉, 운문사 5층 전탑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던 668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운문사 인근의 불영사 전탑 건립 연대를 700년 전후로 보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운문사의 5층 전탑 건립과 관련하여 이렇게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운문사 5층 전탑은 삼국통일 이전의 어느 시기, 예컨대 양지 스님이 석장사에 삼천불 전탑을 세웠던 선덕여왕 대보다 조금 뒤늦은 시기에 운문사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탑이 퇴락하게 되고, 운문사에 3층 쌍탑, 석등 등이 건립되면서부터 5층 전탑은 운문사의 중심 건축물 위치에서 밀려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도 운문사와, 이웃의 장연사 등에 3층 쌍탑들이 건립되는 9세기 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운문사 전탑은 퇴락한 모습으로 세월을 버텨오다가 보양이 운문사에 주석하던 937년 무렵에 중건이 이루어져 전탑 하부가 사천왕상 석주 장식으로 치장되기도 했을 것인데,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하여 근년에 이르러서는 하부 탑재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탑의 흔적에 지붕이 씌워져서 작갑전이라는 이름의 전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은 혹시 아닐는지?

아무튼 나는 운문사에 갈 때마다 매번 작갑전을 둘러싼 의문에 부딪치게 되지만 아직까지 속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나의 운문사행은 어쩌면 그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이어서 운문사에 들를 때마다 매번 작갑전을 맴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사진설명입니다.

사진 1. 현재의 운문사 작갑전@김대식
사진 2. 전탑의 모습이 제법 남아 있는 수리되기 전의 운문사 작갑전.(사진 출처 운문사 홈페이지(http://www.unmunsa.or.kr/)
사진 3. 운문사 작갑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상 석주들
사진 4. 작갑전 사천왕상 석주 세부
사진 5. 운문사 대웅전 앞의 쌍탑과 석등
사진 6. 청도군 매전면 불영사 전탑
사진 7. 청도군 매전면 불영사 전탑의 세부, 당초문전과 탑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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