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가 해외교민 유공자들에게 수여하는 훈ㆍ포상자 선정기준이 교민사회의 여론을 무시한 채 주재공관장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돼 아르헨티나 한인사회가 들끓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1일 제87회 3.1절 기념식장 자리에서였다. 이날 아르헨티나 한인사회 원로인사들과 한인회 임직원, 공관직원 등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교민사회 유공자 표창에 문제가 있다는 한 교민원로의 이의가 제기되자 이영수 한인회장은 "포상문제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전임) 공관장은 한인회를 배제했다"고 주장하고 "공관장의 이런 행태를 본국 정부에 여러 경로를 통해 항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는 이민 40주년을 맞아 교민유공자들을 선정, 포상하기 위해 포상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적에 따라 훈장과 대통령 표창 등을 수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유공자 선정이 교민여론과는 무관하게 공관장의 임의대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포상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한 위원회의 관계자들이 훈ㆍ포상을 받기도 해 자신의 표창을 상신한 격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포상위원회를 이끌었던 한인회의 김 모 위원장은 "이번 포상은 (위원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대사관이 임의로 결정한 사항"이라며 "선정방법이 옳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한 인사는 "포상위원들이 포상을 받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반문하면서"원래 포상위원들은 포상대상에서 제외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잘못은 대사관에 있다"고 해명하고 "대사관이 한인사회를 무시했다"고 목청을 높인 뒤 포상위원들이 당초 올린 포상자 명단을 공관장이 임의대로 바꿨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 전임대사는 외무부 출신이 아니다 보니 외교적인 관례를 무시한 채 자신의 임의대로 일처리를 해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하고 "전임대사가 한인사회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교민사회 원로인 한 인사는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교민사회에 공적이 있는 교민을 공관이 임의로 선정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이는 공관장과 가까운 인사들만을 선정하는 부조리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해외주재 공관장들의 원칙을 무시한 근무방식은 현지교민들에게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아르헨티나 현지외교가와 정가에서 한국대사를 보는 시각은 어떤지를 알아본다.
***'정부대표인 공관장 인사 신중히 해야'**
필자의 20여년 아르헨티나 생활 가운데 지금까지 8명의 공관장이 바뀌었다. 이들 중에는 교민들과 담을 쌓고 3년의 임기를 채우다 간 인사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교민들과 하나가 되어 현지에 한국학교를 세우기도 했고, 교민사회의 예술활동, 사업분야에 발벗고 나서는 등 교민생활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아르헨티나 외교부와 대통령 공보실, 정계인사들, 언론계가 본 한국대사들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 교민들의 의견과는 정반대였다는 것을 필자는 지켜 보아 다.
어떤 대사는 현지 교민사회에 많은 활동을 보였고 심지어는 교민들의 개업식까지 챙겼지만 현지 외교가나 정가에서는 '한국 대사가 있기는 한 거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현지 외교가와 정계에 담을 쌓으며 임기를 채웠다. 또 다른 대사는 대교민관계는 공사나 영사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외교가와 현지정객들과 우의를 돈독하게 쌓아 현지 주류사회에서 '한국에도 저런 훌륭한 외교관이 있느냐'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대사들은 현지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지나치게 정치적인 발언을 일삼아 이곳 외교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는 공식적인 의전절차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대사도 있었다고 아르헨 외교부 의전담당관은 필자에게 귀띔하기도 했다. 한국대사의 이런 행보는 이곳 외교가와 정가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한다.
또한 일부 교민들에게는 훌륭한 대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곳 정계나 외교가에서는 "라틴문화는커녕 외교의 기본도 모르는 정치적인 대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역대 한국대사들이 아르헨 현지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임기가 끝난 각국의 대사들에게 의례적으로 수여하는 그 흔한 수교훈장 하나 받은 대사가 없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다.
***'사진찍기'용 면담은 국가망신"…한국정치인들 명심해야**
공관장의 주요임무 가운데 하나인 한국의 고위관료나 정치인들의 외유성 여행시 현지 정계인사들과의 무리한 면담주선 업무 역시 개선돼야 할 문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한국의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공관장에게 대통령을 포함한 현지 고위정치인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특별히 만나야 할 중요한 사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몇 장 찍어 있지도 않은 자신의 외교성과를 알릴 목적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일이다. 한국에서 실세로 불리는 모 인사가 아르헨을 방문해 대사관에 '아르헨 대통령과의 면담 주선'을 요구했다. 현지공관장은 팔방으로 뛰었으나 때가 마침 연휴를 낀 주말이라 대통령 면담의 길이 막막했다. 이 공관장은 교민 유력인사들까지 총동원, "대사 좀 살려달라"고 할 정도로 면담성사에 매달렸다. 당시 공관직원들 사이에서는 "만일 대통령 면담이 실현되지 못할 경우 대사는 끝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긴박한 분위기였다. 물론 우여곡절 끝에 겨우 면담이 성사되기는 했다. 당시에는 이런 능력으로 대사의 근무평가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 인사가 귀국한 뒤 필자를 만난 아르헨 대통령궁의 한 공보비서관은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말 웃긴다"면서 "우리 대통령과 만나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말만 나누고 사진 몇 장 같이 찍기 위해 마치 중대한 외교문제나 발생한 것처럼 난리를 피우며 구걸하듯 면담에 매달리는 행태는 코미디도 아주 저급코미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필자 역시 이 인사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아르헨티나 대통령과의 면담사진을 언론에 흘리거나 자신의 의정보고서에 '훈장'인 양 내걸고 자신의 외교능력과 실적을 자랑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물론 이는 아르헨티나의 경우다. 그러나 특별한 외교적인 현안이나 개인적인 친분이 없이 무리하게 이루어지는 현지고위층 인사들과의 '사진 찍기'식 면담은 두고두고 현지정가의 입방아에 올라 결국은 국가망신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국내의 정치인이나 고위 인사들은 명심해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