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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와 '아사히'의 이례적인 의견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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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와 '아사히'의 이례적인 의견일치

〈대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중단돼야"

〈요미우리〉와 〈아사히〉는 각각 일본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양대 신문으로 이제까지 평화헌법 개정 등 주요 이슈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 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두 신문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즉 지난해 중반부터 〈요미우리〉가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반대' '야스쿠니를 대신할, 나아가 천황이나 외국 국가원수도 참배할 수 있는 세속적 추모시설의 건설'을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아사히〉의 입장에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요미우리〉의 변신에 대해 일부에서는 최근 일본의 보수화 추세 속에서 〈요미우리〉 등의 판매부수는 상당히 줄어든 반면 극우 성향인 〈산케이〉의 구독률은 급증한 데 대한 대응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 일본의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요미우리〉 최고경영진의 고뇌에 찬 전략적 결단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요미우리〉를 이끌어 온 와타나베 츠네오 회장(79)은 그 자신이 대학 때 학병에 끌려갔던 전쟁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2차대전 직후 연합군에 의한 도쿄전범재판과는 별도로 일본인 자신에 의한 전쟁책임 추궁이 있어야 한다며 지난해 8월부터 전쟁범죄에 관한 연중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이같은 요미우리의 변신이 앞으로 일본의 행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부분의 일본전문가들은 와타나베 회장을 비롯해 정치권의 노나카 히로무 전 자민당 간사장(태평양전쟁으로 사촌과 삼촌을 잃었다), 고토다 마사하루 전 관방장관(최근 작고) 등 보수파 인사 중에서도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나 헌법개정에 비판적인 인물이 있긴 하지만, 문제는 젊은 층이 역사문제에 관심이 없어 보수화 물결에 쓸려가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찌됐건, 최근 〈요미우리〉의 변신은 일본의 진로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판단에서 일본의 시사월간지 〈론자〉 2월호에 게재된 〈요미우리〉 와타나베 회장과 〈아사히〉의 와카미야 요시부미 주필 간의 대담을 번역, 소개한다. 이 글은 〈재팬 포커스〉에 실린 영문번역문(http://www.japanfocus.org/article.asp?id=524)을 다시 한글로 옮긴 것이다. 〈편집자〉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중단돼야 한다"**

와카미야: 지난해 6월 5일자 〈요미우리〉의 사설 "전몰자들을 위한 국가추모시설 즉각 건설돼야 한다"를 읽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요미우리〉가 오랫동안 전몰자를 위한 (야스쿠니신사 같은 종교시설이 아닌) 세속적 추모관의 건설을 주장해 온 것은 알고 있지만, "(총리는)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주장한 것은 이 사설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지난 수년간 〈요미우리〉 사설을 읽으면서 '〈요미우리〉는 야스쿠니 참배를 찬성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너무 우익으로 흘러 이젠 〈산케이〉와 〈요미우리〉가 별 차이가 없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설이 나왔으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리고 그 무렵, 와타나베 회장께서 '나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반대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회장께서는 또한 야스쿠니의 존재 자체가 중국, 남한과의 외교적 균열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장님과 직접 말씀을 나눌 기회를 갖게 된 만큼 우선 이러한 태도변화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와타나베: 저는 대학 입학 이래 줄곧 전쟁반대론자였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수백만 국민들이 천황폐하의 이름 아래 죽었습니다. 저도 군에 징집돼 노예처럼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운 좋게 저는 살아 남았지만, 진짜 참혹했던 것은 가미카제 특공대를 만들어낸 군대시스템이었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전투기 조종사들은 귀환에 필요한 연료도 공급받지 못한 채 출격해야 했고, 결국 그들은 자살폭탄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살공격만이 유일한 전략이었습니다. 전쟁기간동안 저는 어떤 국가도 저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천황의 이름으로 저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야만적 명령을 내린 군사지도자들, 그리고 군사지도자들의 행동을 묵과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증오를 씼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2001년, 고이즈미 총리가 패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반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8월 15일에 가서는 안 됩니다. 정 가고 싶다면 8월 13일에 가십시오. 8월 15일에 참배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결정입니다."

그 후에 야스쿠니신사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산보 삼아 신사에 가긴 하지만, 아직도 그곳에 참배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야스쿠니신사 본관 건물 옆에 있는 유슈칸 전쟁기념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기념관은 군국주의를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념관에 갔다 온 아이들은 "사실은 일본이 이긴 전쟁이었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야스쿠니신사가 군국주의를 자극하고 선동하는 일종의 전쟁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장소를 총리가 방문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와카미야: 유슈칸이 다시 지어진 것은 2002년입니다. 겉으로는 대단히 멋있는 건물이지만 그 내용물은 도저히 현대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 전시된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편지가 읽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낼 만큼 감동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시된 내용의 주조는 전쟁은 아시아를 해방하고 일본의 생존과 방위를 위한 것으로서 영예로운 행위였다는 겁니다. 수치의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예를 들어 1층에는 제로(Zero) 전투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설명문에는 이 전투기가 충칭(重慶)전투 때 처음 선을 보여 장개석군의 소련제 전투기들을 수없이 격추시킴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제로전투기로 충칭 상공에 대한 제공권을 확보한 뒤, 이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살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충칭폭격은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의 효시로서 전세계적인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 폭격에 기여했던 전투기를 야스쿠니신사에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해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일본 지도자들의 처신은 매우 부적절한 것입니다.

와타나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요미우리〉는 지난해 8월 13일부터 지난 전쟁에 대한 전쟁책임을 밝히자는 캠페인을 전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리즈를 1년 동안 계속할 작정입니다. 1년이 지난 뒤, 올해 8월 15일쯤부터는 그동안의 기사를 바탕으로 전쟁 당시 여러 군사 및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의 경중을 가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법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경중을 가릴 구체적 기준을 세워 누가 가장 책임이 무거운가, 용서 받아도 괜찮을 사람은 누구이고,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은 누구인가 등을 가려낼 것입니다.

와카미야: 도쿄전범재판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와타나베 회장께서는 일본인 스스로가 전쟁책임을 명확히 가리자고 하시는 거군요. 도쿄재판에 회부된 사람들과 상당한 중복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데, 사장께서는 어느 정도 중복될지, 특히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지만 전쟁책임이 더 큰 인물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출 계획이 있으신지요?

와타나베: 국제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11조에서 도쿄전범재판의 판결을 수용했으므로 이 판결은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생각한다면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외상이었던 도고 시게나리는 전쟁 초기부터 조속한 전쟁종식을 위한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런 분들을 A급전범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전쟁기간 중 일본이 타국의 선량한 시민들을 살해한 것은 잘못이지만, 수백만의 일본인 역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스쿠니에 모셔져 추모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희생자들입니다. 저는 살인을 명령한 사람과 살해당한 사람은 구분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살해를 명령한 사람들의 책임의 정도가 가려져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중국과 남한에 가했던 고통의 문제에 대해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웃나라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도의, 우리 자신의 과거청산(A soul-searching)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요미우리〉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지만, 정부에서도 그 자신의 주도에 의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의회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같은 것을 설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언론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언론도 이 문제에 대해 철저한 반성을 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야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사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습니다.

1985년 8월 15일에 당시 나카소네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을 때, 저는 반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나 당신네 파벌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도조 히데키를 위해 야스쿠니에 간 것이 아닙니다. 내 동생이 전쟁에서 죽었고 그의 혼이 야스쿠니에 있습니다. 나는 동생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당시 저는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숙고한 끝에 야스쿠니신사에 A급전범의 위패를 합사한 것은 보건후생성의 전쟁희생자 원호국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도쿄신문이 최근에 보도했듯이 전쟁희생자 원호국에는 전직 고위 장교들이 많이 포진해 있고, 이들이 지난 1966년 야스쿠니 합사를 위한 A급전범의 명단을 넘겨주었습니다.

와카미야: 그렇습니다. 당시 야스쿠니의 궁사(宮司)는 츠쿠바 후지마로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황실의 야마시나계열 사람이었습니다. 츠쿠바가 궁사였던 12년동안 A급전범들의 위패는 야스쿠니에 합사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야스쿠니신사 측이 야스쿠니신사 보수를 위한 국가 재정지원을 규정한 법안의 통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로서는 A급전범 합사와 같이 대중여론에 불리한 조치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또한 황실 측의 입장도 고려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츠쿠바가 갑자기 사망하고, 마쓰다이라 나가요시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마쓰다이라는 제국해군의 부사령관 출신으로 도쿄전범재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쓰다이라는 야스쿠니 궁사가 되자마자 A급전범의 합사를 위해 노력했고, 결국 1978년 그 목표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A급전범 합사 이후 쇼와 천황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국민적 단합의 상징인 천황이 참배할 수 있는 새로운 전쟁기념관의 건립을 주장해 왔습니다. 만일 그런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외국의 국가원수도 참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타나베: 그 문제에 대해서 저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전쟁책임을 논할 때 우리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초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관동군 고위장교인 이시하라 간지 등은 (만주에)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시하라는 류조구 철로 폭파 등 불법활동에도 관여했습니다. 따라서 이시하라가 후에 전쟁확대에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죄는 용서될 수 없습니다.

와카미야: 이시하라 간지는 A급전범에 포함되지 않았지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와타나베: 맞습니다. 그는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시하라보다 더 나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관동군 상관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입니다. 그가 중국 북부에 대한 침략을 선도했으니까요. 그 후로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갔고, 제 생각에는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당초 육군과 해군의 젊은 과격파 장교들이 1932년 5월 15일 쿠데타를 시도했고, 1936년 2월 일단의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정치는 테러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정당들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가 있은 후에 고노에가 총리가 됐습니다. 마땅히 그는 정치상황을 정상화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해놓은 일은 '대정익찬회'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고노에가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죄를 물을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겠죠. 또 기도 고이치라는 인물은 옥새 관리책임자로서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천거한 사람입니다. 도조가 총리가 될 경우 일본이 어떻게 될지를 그는 당연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기도에게 매우 엄중한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와카미야: 와타나베 회장께서는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은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일본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외국이 이 문제를 들고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외국은 일본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는 〈요미우리〉의 사설과는 약간 의견을 달리합니다.

와타나베: 일본이 스스로의 전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기간중 침략의 희생자였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진정성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론자: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전쟁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국민들은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뭐가 잘못됐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최근의 사태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타나베: 저는 올해 79살입니다. 우리들 세대가 죽고 나면 전쟁의 실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실제 경험이 아닌 생각에만 바탕을 둔 논쟁이 난무할까 우려됩니다. 중국과 남한은 독립기념관 건설 등 다음 세대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각인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취하고 있으며 이에 의해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전쟁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에 대해 얘기하고 그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일본 군부가 참혹한 짓을 했다는 것을 얘기하고 써야 합니다.

와카미야: 저는 고이즈미 총리가 우익인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총리가 의회에서 A급전범은 분명 전쟁범죄자라고 말한 만큼, 그의 야스쿠니 참배가 이들 A급전범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그곳에 모셔진 300만 일본 군인의 넋을 기리고 미래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 대해서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희생된 젊은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A급전범은 악인이 아니며 이들이 억울하게 처벌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인으로서 고이즈미는 좀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일본의 우익이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중국과 남한은 점점 더 일본을 '위험한 나라'라고 생각할 것이고 반일감정은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진짜 소신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특히 현재 자신의 입장이 일본은 물론 중국과 남한에 외교적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자신의 입장을 바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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