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가 한 문화사학자의 끈질긴 노력과 우리 국토에 대한 애정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지난 20여년간 답사가이자 문화사학자로,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해 온, 〈황토현 문화연구소〉의 신정일 소장이, 이중환의 발자취를 따라 직접 답사를 했고, 총 다섯 권에 이르는 〈다시 쓰는 택리지〉를 펴낸 것입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과연 어떤 책이길래, 25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오늘날 평가를 받고 있는지.. 우리가 잘 몰랐던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우리 조상들이 산과 강, 자연을 대했던 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다시 쓰는 택리지〉를 펴낸 문화사학자, 신정일 소장과 함께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다시 쓰는 택리지〉의 저자, 신정일 소장입니다. 문화사학자이자 답사가인 신정일 소장은,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해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 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묻혀 있는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데 애써왔습니다. 저서로는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 〈지워진 이름 정여립〉 등이 있습니다. 지난 2년간, 이중환의 택리지를 토대로 직접 답사한 내용을 기록해 〈다시 쓰는 택리지〉 전 5권을 완성했습니다.
박인규 : 신정일 소장님, 안녕하십니까?
신정일 소장 : 네. 안녕하세요.
박인규 : 우선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라는 책이 어떤 책이길래 250년이 지나서도 다시 쓰실 생각을 하셨는지..우선은 이중환의 〈택리지〉가 어떤 책인지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
신정일 소장 :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중환선생이 1750년대에 벼슬에서 물러나서 사대부들이 살 만 곳은 과연 어디인가.. 하고 이 땅을 2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20년에 걸쳐서 쓴 책이 이중환의 〈택리지〉 입니다.
박인규 : 250년이 지난 책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써 보겠다... 그런 결심을 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신정일 소장 : 25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인문지리지는 대체로 50년 단위로 쓰는 것이 가장 좋거든요.
박인규 : 10년이면 강산이 바뀌니까..
신정일 소장 : 그렇죠. 10년이면 강산이 바뀌는데 50년 단위로 치더라도 그렇게 나와야 하는데 이중환 〈택리지〉를 계승한 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중환의 〈택리지〉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지금에 맞게 새로 쓴 〈택리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을 했었죠.
박인규 : 〈택리지〉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뜻이죠?
신정일 소장 : '살 곳을 가려서 정한다.'그러니까 요즘은 사람들의 생각이 땅값이 많이 오르는 곳이 어디인가.. 해서 행정복합도시가 들어선다든가 하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 갔었고 요즘은 땅값이 많이 오르는 곳을 겨냥해서 했었지만 예전의 사대부들은 벼슬에 물러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서 여생을 마치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좋은 땅의 개념과 지금의 좋은 땅의 개념이 많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죠.
박인규 : 이중환이라는 분이 〈택리지〉를 쓰기 위해서 20년 동안 조선팔도를 다니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신정일 소장은 이 책을 쓰시기 위해서 얼마나 답사를 하셨습니까?
신정일 소장 : 저는 25년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황토현 문화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기 전부터 제가 돌아다녔고 그 뒤로는 우리나라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10대 강을 걸어 볼 예정으로 남한의 8개의 강을 발원지부터 하구까지 걸었습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발원지에서 하구까지 한 발 한 발 걷고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영남대로, 해남에서 서울까지 삼남대로..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을 350여개를 올랐죠.
박인규 : 대단하시네요. 말하자면 발로 도보로 대한민국 한반도 땅을 다녀보시다 보면 250년 전에 나온 〈택리지〉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현대의 한반도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을 거 같은데요. 어떤 차이 같은 것이 보이던가요? 산하에?
신정일 소장 : 1894년에 우리나라에 왔었던 영국의 왕실 국립 지리학자 이사벨포드빈 여사가 서울에서 영월까지 배를 타고 올라갔었어요. 그때 올라갔을 때에는 한강에 다리 하나가 없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정조 임금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문안을 갈 때에는 배다리를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배를 타고 갔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리가 얼마나 많이 만들어졌습니까? 그리고 또 예전에 백두대간..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 줄기는 모두 큰 고개가..천령이네 또는 죽령이네 또는 이화령 또는 추풍령이나 그런 고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개들이 모두 지금은 터널이 뚫려서 터널로 가다 보니 예전에는 백리간에 풍속이 다르고 십리간이 많이 다르다..그런 얘기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풍속이나 말이 다른 곳이 별로 없는 그런 세월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인규 : 교통의 장애가 없다보니..
신정일 소장 : 그렇죠.
박인규 : 이 다섯 권의 책을 어떻게 나눠서 쓰신 거죠.
신정일 소장 : 〈팔도총론〉이 있습니다. 팔도를 개괄한 책..조선팔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1권에서는 경기와 충청을 다루었고, 2권에서는 경상과 전라도를 다루었고, 3권에서는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4도를 다루었고요. 그리고 이 〈택리지〉의 주제가 되는 〈복거총론〉..어느 곳에 살 것인가와 그리고 이번에 나온 〈우리에게 산하는 무엇인가〉 복거총론 두 권을 다루어서 5권으로 나누었습니다.
박인규 : 아무래도 청취자 분들이나 많은 분들은 어디가 살기 좋은 곳인가..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을 거 같은데요. 아까 잠시 말씀을 하셨는데요. 요새 사람들은 땅값이 얼마나 오를 것인가에 관심이 많고, 예전에는 어땠습니까? 우리 조상들께서는 어떤 곳이 살기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신정일 소장 : 예전에 이중환선생이 가장 살 만한 곳이라고 계거..계곡 근처이거든요. 산을 등지고 앞에 냇물이 흐르는..아주 평화로운 곳..그런 곳에 집을 지어 놓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었고요. 두 번째가 강거..강가 근처입니다. 강가 근처에서 살려고 했었고요. 그래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임진강변이나 또는 여강..지금의 여주에 있는 부근에 있는 한강을 여강이라고 했었거든요. 여강 또는 안동에 도산서원이 있는 데 그 일대에 집을 지어 놓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이 살만하지 않은 곳을 해거..바닷가 근처로 봤습니다. 바닷가 근처는 풍토병도 있고 여러 가지의 상황 때문에 살기를 꺼려 했었는데 지금은 해거..부산이나, 또는 울산이나, 인천이나 얼마나 큰 도시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죠.
박인규 :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좀 다르죠 예전과?
신정일 소장 :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도 강가 근처에 가서 보면 얼마나 가든이 많습니까? 그리고 모텔이 많습니까? 그리고 또 별장도 많습니다. 지금도 역시 강가 근처는 사람들이 아주 살만한 곳으로 여겨서 그런 곳으로 놀러도 가고 잠도 자고 하는데 계곡 근처에는 요즘에 또 기후변동으로 홍수도 나고 그렇게 되면 모두 휩쓸려 가기 때문에 계곡 근처를 많이 꺼리는 경향도 있고요.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서울 한강 근처의 아파트들은 조망권이 좋다는 이유로 얼마나 땅값이 비쌉니까? 그러니까 서로 살기를 선호하는 곳이 또 강가 근처입니다.
박인규 : 이중환선생이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지리, 인심, 생리, 산수..이렇게 네 가지를 꼽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신정일 소장 : 이중환선생이 살 만한 곳으로 지리를 꼽았었는데요. 지리가 좋아야 하고 그 다음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중환선생이 나중에 술회하기를 인심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지리도 좋지 않고..그리고 생리라는 것은 말할 것이 많고 먹을 것이 많아야..사람들이 이익이 많은 곳..그리고 나머지 네 번째가 산수를 꼽았습니다. 어떤 산수를 바라보고 산수가 좋은 곳에서 살고자 했었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그래도 산수였었죠.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금강산을 한 번 가보기를 굉장히 소원했었고 지리산이나..그런 명산들을 가보기를 참 소원했었는데 일반인들은 요즘 얼마나 여행을 많이 갑니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고 사대부들 역시 가능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김일손선생이 그렇게 지리산을 가고자 했는데 인연이란 항상 어기기를 좋아하고 어긋나기를 좋아해서 내가 지리산을 가고자 했던 마음 먹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서 지리산을 가게 되었는가..하는 얘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요.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사실 행복하죠. 그런 면에서는..
박인규 : 그 당시에는 한 번 가려면 최소한 한, 두달은 잡아야 하니까 힘들었겠죠? 정말?
신정일 소장 : 하루 백리 길을 걸으면 짚신이 열 켤레 정도가 구멍이 났다고 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갔었겠습니까?
박인규 : 신정일 소장께서 계속 25년간 특히 남한 땅을 다니시면서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라고 꼽은 곳이 있으십니까?
신정일 소장 : 저는 강가를 참 좋아합니다. 낙동강이나, 한강이나, 섬진강, 금강을 따라 가다가 정말로 좋은 곳들을 발견해서 그때는 제가 마음 먹고 이장을 찾아가서 저 곳에 땅이 나오면 저에게 연락을 해 주십시요..이런 얘기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 번도 전화가 온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저의 차림새가 별로 좋지 않다 보니까 이 사람에게 얘기해봐야 이익이 없겠다..라고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좋은 곳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이라고 지명을 얘기하면 무리가 있을 거 같아서요. 정말 좋은 곳들이 많은데 그러한 곳들을 사람들이 너무 모르는 거 같아요.
박인규 : 이중환선생은 청화산이 제일 좋다..라고 하셨다는데 이 청화산은 어디에 있는 산입니까?
신정일 소장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속리산에서 건너 보이는 산이 청화산입니다. 산수가 그렇게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굉장히 후덕하게 보이는 산이거든요. 그래서 청화산을 이중환선생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오복동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 완적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일대가 천하의 명당이고 사람들에게 전란을 겪지 않게 하는 곳이라고 해서 조선시대 말기에 수많은 부자들이 그쪽으로 재산을 팔아서 왔었는데 땅이 넓지 않거든요. 그래서 다시 내려간 곳이 청화산 아래 오복동이죠.
박인규 : 약간은 다른 얘기이지만 음택이라고 해서 묘자리를 잘 쓰면 후손들이 말하자면 잘 된다..출세한다..그런 얘기들이 있었는데요. 그것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얘기 입니까?
신정일 소장 : 동기감응이라고 하거든요. 자손이 좋은 곳에 묻히면 그 신령이 힘을 발휘해서 자손이 잘 된다..조상이 좋은 곳에 묻히면..그런 얘기들을 동기감응이라고 하는데요. 매월당선생이나 또는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조상을 좋은 곳에 모시고자 함은 조상을 이승에서 마지막 보내는 게 아닙니까? 좋은 곳에 묻혀서 편안히 사시라는 의미에서, 효도하는 의미에서 사실은 묘자리를 찾았었는데 그것이 변질되어서 우리 조상 묘를 좋은 곳에 써서 우리가 복을 받겠다는 것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월당선생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을 편안한 곳에 모셔서 편안하게 저승에서 보내시라는 의미로 쓰는 것이다..그것을 가지고 조상에게 좋은 묘를 써서 내가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이미 그것은 효도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박인규 : 조상을 잘 모시고자 하는 좋은 마음..계속해서 그런 좋은 마음을 가질 때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지..
신정일 소장 : 그렇죠.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지..우리 조상을 좋은 곳에 모셔서 내가 복을 받겠다..하면 그때부터는 사심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얘기이죠.
박인규 : 우리나라는 산이 많지 않습니까? 전국의 70%가 산이라고 하는데 산수를 대하는 태도..그런 것이 우리나라와 서양의 지리학에 차이가 많다고 하던데요? 어떻습니까?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까?
신정일 소장 : 서양은 정복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나라 특히 산악계에서도 정복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히말라야의 몇 개봉을 정복했느니, 등정했느니..그런 얘기를 하는데 우리나라의 옛 선인들은 산을 등산이라고 하지 않고 입산이라고 했습니다. 산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다..산에 들어간다..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들어가면서 내가 산이 된다는 것이거든요. 산 속에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산의 정상에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산의 정상에서 잠시 내가 올라갔다가 온 것이지 내가 발자취를 남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겸허함..그러한 것들이 옛 선인들이 산을 대하는 태도였어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너무 등산이네, 등정이네, 산을 몇 개를 정복했느니..이렇게들 하는데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부터 버려야 하거든요. 내가 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산을 대할 때 산이라는 것은 겸허한 것을 가르쳐 주는데 우리가 겸허한 것을 가르쳐 주는 산을 우리가 모독하는 것들이 너무 많죠.
박인규 : 선인들이 우리 산하를 대할 때 즐풍이라는 그런 말이 있다고 하던데요? 즐풍이라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신정일 소장 : 즐풍, 거풍이 있습니다. 즐풍, 거풍은 옛날에 선인들은 그냥 산에 오르지 않고 동남풍이 부는 날 산에 올랐어요. 동남풍이 부는 날 산을 오르면서 상투를 틀었지 않습니까? 상투의 묶은 끈을 풀고 올라가면 동남풍의 바람으로 빗질을 해서 머리를 빗는 거예요. 시원하게..그것을 즐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위치에 태양이 잘 뜨는 곳에 올라가서 하체를 벗고 누워서 양기를 받아들이는 거예요.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받아 들이는 양기와 양기를 받아들이는 그런 산행을 통해서 자연이 되는 거예요. 거풍이 그렇게 좋기 때문에 호남지방에서는 지금도 논 서마지기도 없는 놈이 거풍 하러 간다..먹을 것도 없는 놈이 무슨 거풍이냐..그런 얘기를 하는데요. 그런 것들이 거풍암, 거풍재..그런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등산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앞 사람의 발 뒤꿈치만 보고 따라 가다보니 관절염이 걸렸네..하는데 옛 사람들은 산을 소유하듯이 산책하듯이 오르면서 산과 내가 되는 그 이치를 맛보았는데 요즘에는 내가 너무 많은 산을 올랐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오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박인규 :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땅, 좋은 자리에 대한 것에는 큰 별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아까 신소장께서 말씀하시기는 요즘은 땅값, 역세권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말하자면 산다는 것보다는 어떤 이익에 상당히 관심이 많고 난개발 얘기들도 나오고..어떻습니까? 우리가 자연을 정복, 이윤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신정일 소장 : 예전에는 저도 좋은 곳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생은 제가 좋아하는곳에서 집을 지어놓고 살고자 했었는데 그것을 버렸어요. 왜 그런가 하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좋아하는 주지스님도 계시고 좋아하는 사 람이 좋은 집도 지어 놓고 있는데 그런 집들에 가서 며칠씩 쉬어가라고 연락 이 와도 제가 바빠서 가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별장을 짓거나 그러지 않고 그 런 좋은 곳에 가서 며칠씩 기거하다 보면 그곳에 있을 때에 늘 내 집이라고 여 긴다면 아주 편하지 않습니까?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박인규 : 가지려 하지 마라?
신정일 소장 : 네. 가지지 않고 서로 이용한다면 그렇다면 이것이 내 것이라는 것은 내 소유욕 때문에 자꾸 욕심이 생기는데 우리 국토를 그렇게 자꾸 병들게 하는데 지금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서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그런 것들을 모색하면 훨씬 낫지 않겠는가..그런 생각을 하죠.
박인규 : 명당 자리를 어떤 한 사람이 독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고루 나눠 가지면 훨씬 효용이 좋아질텐데요.
신정일 소장 : 그래서 제가 어떤 얘기를 했었는가 하면, 그런 좋은 명당 자리는 모두 써 버렸거든요. 설령 그런 명당자리에 조상을 모시고 싶다면 자기 조상을 화장해서 그 화장한 재를 가지고 명당자리에 조금씩 뿌리면 좋은 것들을 받아 들여서 자손이 잘 되지 않겠는가..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습니까?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있어요.
박인규 : 서로 더불어 나누는 지혜도 필요할 거 같습니다.
신정일 소장 : 네.
박인규 : 지금부터는 개인적인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답사를 다니시고 하시면 댁에 계실 시간은 별로 없겠네요? 일년에 얼마 정도나 댁에 계십니까?
신정일 소장 : 5분의 2정도는 나가 있고, 5분의 3정도는 집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습니다.
박인규 : 부인께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거 같은데요?
신정일 소장 : 처음부터 같이 다니다가 지금은 안사람은 학교에 있어서 잘 못 다니고 저는 많이 출타중이죠.
박인규 :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수법이 이런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같이 낚시를 다니면 부인도 좋아하고..
신정일 소장 : 네.
박인규 :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답사가, 문화사학자..이런 일을 하시기로 결심을 하시게 됐습니까?
신정일 소장 : 저도 이중환선생과 약간 비슷하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어린 시절부터 끈이 떨어져서 제가 자립으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박인규 : 말하자면 독학을 하신 겁니까?
신정일 소장 : 네. 모두 독학을 해서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 졸업장을 탔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마음껏 공부하고 싶은 것에만 책을 읽었거든요. 그러면서 지도에 관심이 많았고 지도를 바라볼 때마다 이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들이 많이 있었죠. 그래서 출가도 했었고 출가를 하면서 많은 곳을 떠돌아 다녔죠.
박인규 : 스님으로서?
신정일 소장 : 스님으로라기 보다..스님으로는 2개월 동안 있었는데..2개월이 지나고 나서 스님이 '너는 아무래도 세상에 나가서 살면 좋겠다..'해서 노자돈을 주셨는데요. 절망감속에서 많이 돌아다녔죠.
박인규 : 1985년에 〈황토현 문화연구소〉라는 곳을 만드셨어요. 황토현이라는 것이 사실은 동학 농민전쟁에서 아주 대표적인 전적지 아닙니까?
신정일 소장 : 그렇죠.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가장 크게 이긴 곳이 황토현이죠. 전라북도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전라북도의 상징은 동학이라고 생각했고, 동학의 상징은 무엇인가.. 했을 때에 황토현이라는 이름을 정해서 〈황토현 문화연구소〉를 설립했죠.
박인규 : 지금까지 〈황토현 문화연구소〉에서 하신 일은 주로 어떤 일이 있습니까?
신정일 소장 : 김개남 장군이나, 손화중 장군의 추모비를 덕진공원에 세우기도 했고요. 수학여행이라고 진행되던 것을 '테마가 있는 현장체험 학습'으로 하자..라고 전라북도 교육청에 제가 제안을 해서 6개월 동안 시행을 하니까 교육부에서 그것을 받아 들여서 지금은 전국적으로 시행이 되지 않습니까?
박인규 : 말하자면 역사적인 어떤 의미나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신정일 소장 : 그렇죠.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고 가자..그러니까 불국사나 또는 제주도나 그런 곳만 갈 것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역사 유산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시행하자..라고 해서 했던 것이고요. 우리말, 우리글로 지명을 바꾸자..그런 운동도 많이 펼쳤고요. 그리고 무학산 살리기도 했고, 그리고 또 저희들이 '우리 땅 걷기'라는 모임을 여러 단체와 만들어서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사람의 길은 없고 차들만 다니는 길이 있는데 보행자전용도로를 만들어 달라고 청와대와 건설교통부에 요청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박인규 : 신소장께서는 25년 동안을 그야말로 남한 땅을 옛날 말로 하면 무른 메주 밟듯이 다니셨는데요. 북한은 못 가보셨을 거 같아요?
신정일 소장 : 북한은 2003년에 개천절 공동행사 때에 다행스럽게도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우리 10대 강 중에 6개의 강이 북한에 있거든요. 그래서 그 강을 빨리 걸어야 하는데 그러던 중에 2003년도 택리지를 쓰고 있을 때에 연락이 와서 구월산과 묘향산 그리고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삼지연공항으로 가서 백두산과 금강산 등 북한의 명소는 모두 다녀 봤습니다.
박인규 : 그것을 한 번에 다녀오신 겁니까?
신정일 소장 : 금강산은 따로 갔고요. 한 번에 4박 5일 동안 갔었습니다.
박인규 : 직접 가보시니 어떠셨습니까?
신정일 소장 : 가서 보니 60년대, 70년대 풍경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고요. 물론 변화된 풍경도 있었지만 변화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꼭 옛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박인규 : 60년대의 풍경이라는 것은 산에 나무가 없다던가..그런 것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신정일 소장 : 산에 정말 나무가 없어요. 묘향산이나 구월산 등 북한의 명산에만 나무들이 있고 다른 곳에는 나무가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청천강을 거쳐서 묘향산에 가는 길에 보니 청천강 강변에는 사실은 나무가 울창하고 그래야만 강이 아름답거든요. 그런데 제가 강을 따라 걸을 때에는 그런 운치와 함께 걸었었는데 제가 북한의 강을 따라 걷는다면 정말 살풍경한 강 길을 따라 걷겠구나..하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팠었죠.
박인규 : 〈다시 쓰는 택리지〉를 쓰시면서 이중환의 〈택리지〉에 관한 논문들을 50가지를 보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택리지〉에 관한 연구들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겁니까?
신정일 소장 :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문사철을 모두 겸비했었습니다.
박인규 : 문사철이라고 하면 문학, 역사, 철학..?
신정일 소장 : 네.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공부를 했기 때문에 백과사전과 같은 책을 많이 쓰지 않았습니까? 제가 〈택리지〉를 쓰기 위해서 논문들을 모두 비교해 보니 지리학을 하는 분들은 역사를 되도록이면 건드리지 않고,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지리학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학문이 이렇게 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
박인규 : 그것은 말하자면 지리학을 하시는 분들은 역사학은 자신들이 하는 분야가 아니니까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예의다.. 이런 의미입니까?
신정일 소장 : 네. 예의이죠. 예의범절이 너무 투철하다 보니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라도요. 그래서 저는 〈택리지〉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저에게는 어떤 행운입니다. 저는 역사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지리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저 혼자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공부라는 의미가 요즘에는 사실..예전에는 모두 독학을 했었거든요. 요즘에는 스승에게 배워야만 공부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행운으로 제가 〈택리지〉를 쓰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누구도 〈택리지〉를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유일하게 〈택리지〉를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이 되어서 쓰게 된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오히려 분과학문, 제도교육을 받지 않고 혼자서 이런저런 여러 분야를 독학을 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과가 됐다는 말씀이시죠?
신정일 소장 : 네. 그래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박인규 : 최근에 유홍준선생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고 해서 많은 답사기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신정일 소장께서는 좋은 답사가가 되려면...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싶다, 아니면 자연유산을 답사하고 싶다..그런 분들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야 답사가 될 수 있다..이런 조언 같은 말씀을 해 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신정일 소장 : 저는 문학을 공부했었거든요. 시도 많이 써 두었는데 아직 발표는 하지 않았습니다. 소설도 쓰다가 만 것들도 있는데요. 문학과 역사와 철학..그러니까 폭넓은 학문을 공부해야만이..그래서 제가 답사를 할 적에 모든 것들을 문사철을 통달하는 것이 답사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전공분야만 가지고 하다 보면 밋밋하거든요. 그러니까 감흥을 못 줍니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그대들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그러면서 다음 구절이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현자가 주는 것이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경탄하는..경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철학도 역시 그것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것들을 공부하면 훨씬 답사가 풍성해지고 이렇게 바라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바라 볼 수도 있는데 우리는 너무 자신의 것들만..역사를 하는 사람은 역사만 가지고..그러나 그것에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그리고 사람과 모든 것들이 곁들여진다면 한 곳에서만 가지고도 하루 종일 지낼 수 있고 넉넉해 질 수 있는 것이 답사거든요.
박인규 : 인간 만사에 대한 관심, 인문학적 소양..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겠군요?
신정일 소장 : 그렇죠.
박인규 :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북한 땅도 밟으셔서 〈택리지〉를 완성시켜 주시기를 빌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 드립니다.
신정일 소장 : 네.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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