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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불교 전래에 관한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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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제불교 전래에 관한 수수께끼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5〉흥법편 '난타벽제'조

압록강 봄도 깊어 물가 풀도 고울시고
흰 모래밭 백구 백로 한가로이 존다오
홀연히 들려오는 노 소리에 놀라 깨니
어드메 고깃밴고 안개 속에 손님 왔네.

『삼국유사』 흥법편 첫머리 '순도조려(順道肇麗)'조에 붙인 일연의 찬시(讚詩)이다. 흰 모래밭, 백구, 백로 등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잔잔함과 한가로움이 홀연한 노 소리에 흐드러지는 압록강변의 봄날. 이 땅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는 순간을 일연은 이렇듯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일연이 그리고 있는 이 대목은 그러나 서정적 풍경으로만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깊은 역사적인 뜻을 간직하고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의 불교수용 문제를 천착했던 고 이기백 교수가, 불교의 전래와 수용이야말로 "씨족사회로부터 오랫동안 지켜 내려오던 자신의 고유한 사상 대신에 외래의 사상을 그 지도적인 관념형태로서 받아들인 …… 한국의 역사상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일대 사건"이라고 지적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아마도 삼국시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삼국유사』 '순도조려'조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년)은 곧 동진(東晉) 함안 2년이며, 효무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서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냈다, 또 4년 갑술(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왔다. 이듬해 2월에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니,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의 시초이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기록을 주로 인용하고 있는데, 『삼국유사』는 고구려에 이어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 또한 『삼국사기』를 인용, '난타벽제(難陁闢濟)'라는 제목으로 간략하게 옮기고 있다.

"제15대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한 갑신(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동진(東晉)에서 오자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 이듬해에 새 도읍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을 뽑아 스님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이다.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대원 17년(392년) 2월에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을 구하라고 했다."

백제의 경우도 불교가 동진의 왕실로부터 백제 왕실로 전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렇게 불교가 전래된 이후 고구려에서 초문사, 이불란사 등 절이 세워진다든가, 백제에서는 한산주에 절을 짓는 한편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는 왕명이 내려진다든가 하여, 불교의 수용이 순탄하게 이루어진다. 고구려, 백제에서 불교가 이렇게 순탄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그것이 왕실을 통하여 전래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는 다시, 아도를 통해 신라로 들어가서 전도(傳道)와 박해가 거듭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그런 시련을 거친 후 신라가 뒤늦게 불교를 공인하게 됨으로써 삼국 모두가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처럼 불교가 한반도로 전래되는 과정을 살피다보면, 불교가 고구려 및 신라에 전래되는 경로와 백제에 전래되는 경로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발견된다. 불교가 고구려, 신라에는 중국 대륙에서 육로로 전래되었음에 비해 백제의 경우 중국 남부에서 해로로 전래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백제의 불교 전래에는 그 경로가 고구려, 신라와 다르다는 점 말고도 몇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그 하나는 백제 불교가 통설대로 동진의 왕실로부터 전해졌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백제 불교 초전지(初傳地)가 어디였는가 하는, 즉 불교 전래 후 절이 세워진 곳이 어디였던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곧 당시 백제 도읍 한산의 위치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불교가 동진의 왕실로부터 백제 왕실로 전해졌다는 설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침류왕 원년 조에는 "가을 7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한 다음에 바로, "9월에 마라난타가 진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라난타를 공식 사절로 보는 입장에서는 마라난타가 조공 갔던 백제 사신을 따라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한편, 침류왕이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는 대목을 마라난타가 공식 사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고 새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조공을 갔던 사신이 귀환하는 편에 마라난타가 왔다고 보기에는 당시의 해상교통 여건 상 너무 시일이 촉박하다고 보아, 사신이 조공간 것과 마라난타가 온 것은 별개의 사건이라고 내세운다. 그 경우, 마라난타는 공식적으로 왔다기보다는 개인 자격으로 온 셈이 된다. 『해동고승전』이 "마라난타는 …… 전교(傳敎)에 뜻을 두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옛기록을 보면, 그는 원래 인도 간다라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왔다. ……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멀더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마라난타가 진 왕실로부터 공식적으로 파견되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도 이런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백제 불교의 초전지와 관련하여 『삼국유사』는 마라난타가 왔던 이듬해 385년에 절이 세워진 곳이 "새 도읍 한산주"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마라난타가 와서 절을 세웠던 한산(漢山)의 위치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제시되고 있다. 백제가 건국 이래 도읍으로 삼아왔던 하남위례성으로부터 옮겨간 새 도읍이 어디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한 것이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보는 학자들도 일부 있지만 다수의 학자들이 현재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풍납토성, 몽촌토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성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다수의 학자들은 현재의 남한산성을 한산으로 보고 있으며 일부는 하남시 춘궁동, 교산동 일대를 한산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기』 개로왕조 기사 중에 나오는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북성인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남성인 몽촌토성을 한산으로 보는 견해까지 있어 설이 분분한 편이다.

그러나 풍납토성이며 몽촌토성에서는 발굴 결과 절터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도 고려시대의 절터는 확인되고 있으나 백제 시대의 절터로 확실하게 밝혀진 곳은 없다. 다만 백제 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기왓조각이나 주춧돌 등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어서 백제 최초의 사찰이 세워진 곳이 어디였는지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구려의 초문사와 이불란사, 신라의 흥륜사 등 나라 별로 처음 지어지는 절들의 이름이 기록에 남기 마련인데, 백제 최초의 절은 그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이 또한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다. 이렇게 보면 중국 대륙으로부터 공식 사절로 파견된 순도나 아도 같은 승려들이 들어오고 초문사, 이불란사 같은 절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분명한 고구려나, 토착신앙에 젖어 있던 귀족세력들의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고 순교자를 내면서도 결국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는 과정이 자세하고 분명한 신라의 경우와 비교할 때, 백제에 불교가 자리잡게 되는 과정은 안개 속 풍경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백제의 경우에는 불교 전래 뿐 아니라 그 초기 역사 자체에, 비어 있고 또 허술하기도 한 구석이 적지 않다. 예컨대 7백년에 가까운 백제 역사 중 5백년이라는 기간 동안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던 한성시대와, 2백년이 채 못되는 역사를 지닌 웅진·사비시대를 비교할 때 느껴지는 역사적 공백이 그것이다.

남아 있는 유물, 유적들로 보자면, 웅진·사비시대의 그것들이 양이나 질의 면에서 한성시대의 것보다 훨씬 앞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성시대의 유적들이 심하게 파괴되고 유실되었다는 점이 그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4세기 이후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취하면서 백제와 충돌하게 되고 여기에 신라까지 뛰어들면서, 한성백제가 위치했던 한강 하류 일대는 삼국의 각축장이 되어 전쟁이 그칠 날이 없게 되었다. 이후에도 고려조의 몽고 침략, 조선조의 병자호란 등으로 이 일대가 계속 전쟁으로 유린되었으니 한성백제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망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요행히 그런 험난한 역사를 살아남은 흔적들마저 20세기 후반에 몰아친 도시개발로 다시 대규모로 훼손, 파괴되었다.

서울은 강남, 강동 지역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과 방이동의 일부 고분들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고, 하남시의 경우 춘궁동 일대에서 출토되는 기왓조각이나 주춧돌 따위로 한성백제의 흔적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초기 한성백제 역사가 허술한 마당에, 백제 불교 전래 초기의 사정을 더듬어 내기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근래에는 백제 불교의 영광(靈光) 도래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백제 불교 영광 도래설은, 한성백제 시기에 마라난타가 전남 영광에 들러 불법을 전했다는 설이다. 384년 백제에 불교가 전해질 때, 마라난타가 한성에 가기 전에 영광 지역에 상륙하여 불갑사(佛甲寺)를 창건하는 등 불법을 처음으로 전하고는 한성으로 올라갔다는 것으로, 백제불교 초전지의 무대가 느닷없이 옛 한성 지역에서 전남 영광으로 옮겨지고 있는 셈이다. 이 설은, 『호남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의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마한으로 왔다"라든가, 나주 불회사의 법당, 대용문(大用門) 상량문에 나오는 "불회사를 백제 불교 초조(初祖)인 마라난타 존자가 개창했다"는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들에 더하여 영광 지역의 민간 전승들이 있다. 예컨대 아무포, 부용포, 법성포 등으로 전해내려 오는 영광의 지명 중 '아무포'의 '아무'가 아미타불을 뜻한다든가, '법성포'는 문자 그대로 성스러운 불법이 전해진 곳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마라난타가 석불을 모시고 황해를 건너오다가 풍랑을 만나 석불을 바다에 던지고서야 법성포에 당도할 수 있었는데 그 석불의 불두가 후에 법성포 바닷가에 닿아 이를 모셨다는 전설도 있다. 이런 민간 전승의 중심에, 첫 번째 절임을 의미하는 불갑(佛甲)이라는 이름이 자리하고 있어 불갑면, 불갑산, 불갑천 등의 지명이 영광군 일대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마라난타 또는 불갑사와 관련되는 기록들이 대부분 조선 후기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민간 전승들을 불교 초전의 증거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백제 불교 영광 도래설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백제 불교의 영광 도래설을 관점을 달리하여 살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예컨대 한성백제의 몰락과 연관시켜 보는 것인데, 백제는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군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자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고 그후 불과 60여 년만에 다시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한성 일대의 영토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상실되고 그 지역은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이후 대통사, 수원사, 왕흥사, 호암사, 미륵사 등 유수한 사찰들이 웅진·사비 지역에 새로이 세워지게 되면서, 불교의 백제 전래가 이들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영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고, 이에 따라 영광 지역에 불교 전래 관련 지명이나 민간 전승들이 생기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사진설명

사진 1.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서울 강동구 풍납동 주택가의 풍납토성.@김대식

사진 2. 풍납토성과 함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서울 강동구 올림픽 공원의 몽촌토성.

사진 3. 하남시 춘궁동의 고려시대 사찰 동사(桐寺) 터의 쌍탑. 일부 학자들이 이 일대를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진 4. 백제의 한성(漢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남한산성 성곽.

사진 5. 마라난타가 상륙했다는 전설이 있는 전남 영광군 법성포 포구.

사진 6. 마라난타가 창건하여 불교를 초전했다는 전설이 있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의 대웅전.

사진 7.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가운데 있는 보주(寶珠). 인도식 스투파를 본따고 있다는 점에서 영광 불교도래설의 근거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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