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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태어나는 방식"

김민웅의 세상읽기 〈198〉

얼마 전 작고한 백남준의 세계는 기존의 서구 예술이 도달한 일체의 표현방식에 일대 단절과 파국을 가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른바 전위예술로 개념화되는 그의 예술에 대한 접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과 경악, 그리고 혼란을 안겨다 줍니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일체의 질서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깨어져 나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피아노를 망치로 부순다거나 또는 여자의 나체를 안고 첼로를 켜는 모습을 연기한다거나 하는 것 등으로 말미암아, 저게 무슨 예술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게 합니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러한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파격을 계속 구사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도달한 지점은 비디오 아트였습니다. 그는 기존의 종이를 버리고, 붓을 던졌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의 표현 도구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진이 미술의 영역에 입장을 허락받은 것이 사실 긴 예술사의 시간으로 볼 때 최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비디오 아트란 그야말로 '이제 막 시작'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백남준은 파괴적 인상을 주는 작업을 넘어서서, 비디오를 캔버스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나갔던 것입니다.

그건 사실 대단히 기괴한 시도였으나, 기발하고 창조적인 발상을 존중하는 서구 예술계는 백남준을 유심히 주목했습니다.

결국 백남준은 이른바 '비주얼(visual)의 세계'라는 새로운 세대의 예술무대를 우리의 미학적 인식의 영역 속에 설치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건, 오늘날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영상의, 예술적 접근과 해석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백남준을 통해 서구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표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저 멀리 동양에서 날아온 한 작은 사나이가 오랜 세월동안 축적해 온 예술사의 질서를 뒤흔들고,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세계를 구성해내었을 때 이들 서구 예술인들은 찬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종이와 붓만이 전부라고 믿었던 이들의 뒤통수를 내려 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백남준의 엉뚱함을 이들은 배척하거나 뭉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이들의 예술세계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풍요하게 만든 힘의 정체입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 라는 식의 고정된 사고와 정서의 형식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는 노력이 예술의 창조적 영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백남준은 아마 그냥 다소 탁월한 화가로 그치고 말았을지 모릅니다.

물론 백남준의 예술세계에도 비판의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표현의 기술을 새롭게 진전시키는 과제에만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그로써 표현된 세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지에 대한 깊이는 확보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합니다.

서양 예술에 대한 해체의 시도를 넘어서서, 한국의, 동양의 영혼과 접목시키는 정서적 충격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건 고암 이응로 화백이나 윤이상 선생이 서구 예술사의 맥락 속에, 한국의 예술혼을 부어 새로운 양식과 내용을 주조(鑄造)했던 것과 비교됩니다. 백남준에게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백남준은 모든 고정된 질서를 다르게 볼 자유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자유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길을 여는 열쇠임을 또한 일깨웠습니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것의 반복만을 연습시키는 데에 너무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거기에서 예술의 천재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냉전의식은 '다른 각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냉전의식에 찌든 이들은 한 가지밖에 모르는 자들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나 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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