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가 지난 2003년 10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의 외교각서를 미국과 교환했으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전 혹은 사후에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이 2일 주장했다.
최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국정상황실 문제제기에 대한 NSC입장'이란 제목의 11페이지짜리 문건을 공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NSC, '한미간 입장차 분명' 시인**
지난해 4월 5일 작성된 이 문건은 '미국측이 우리의 제안각서 전달로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대통령의 사전 지침에 따라 지지 입장이 전달된 것으로 이해하다가, 지난해 3월 노무현 대통령이 공사 졸업식에서 이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듯한 연설을 함에 따라 입장 변경의 배경에 의아해 하는 분위기다'는 국정상황실의 지적에 대해 NSC가 밝힌 해명을 담은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3월 8일 공사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이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건에 따르면 NSC는 "외교부가 (2003년 10월) 미측에 전달한 외교각서 초안은 먼저 미측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지지함을 밝힌 뒤 ①대한방위공약 유지 ②한국의 안전고려 ③사전협의 의무 등 우리의 우려 사항을 포함했다"고 밝혔다.
NSC는 "이에 대해 미측은 2004년 1월 미측 초안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한국의 안전고려' 조항이 삭제됐고, '사전협의' 조항은 '단순협의'로 수정돼 있어 한미 양측간 입장차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NSC는 또 "차영구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한미미래동맹정책구상(FOTA) 회의에서 전략적 유연성은 연합사령관 전권사항으로서 기존 선언문으로 충분하다는 문제의 발언을 했지만, 미측이 이를 합의단계에 이른 것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또 '미측 협상 대표(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와 핵심 당국자는 대통령의 공사 연설을 한국의 입장 번복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참여정부 초기 외교부-NSC 갈등속 발생"도 시인**
NSC는 또 '대통령님께 보고 없이 외교각서 형식으로 추진해 문안교섭까지 실시했고, 협상이 합의 직전에 도달했는데도 상황을 호도할 수 있는 형식적 수준의 내용을 보고했다'는 국정상황실의 지적에 대해 "외교부 북미국장이 교환각서 초안을 전달한 것은 VIP(노 대통령)는 물론 NSC에 대한 보고 없이 추진"했다고 시인했다.
이어 "NSC는 2004년 3월에 가서야 김숙 국장으로부터 보고 받았다"며 "외교부가 각서 교환에 대해 NSC와 대통령에 사전 사후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NSC는 "외교부의 각서 교환 사실을 보고받지 못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인정하나, 이는 외교부의 보고 누락이 1차적 원인"이라면서 "어쨌든 NSC는 정부출범 초 외교부-NSC간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가운데 발생한 이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유념하겠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최 의원은 "차영구 국장이 안보주권, 군사주권을 포기한 발언을 했을 뿐 아니라 외교부가 전략적 유연성을 용인한 각서까지 전달했는데도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지 않았다"면서 외교라인의 '총체적 부실'을 지적했다.
***청와대 "각서 교환 사실무근" 해명**
이와 관련해 청와대 안보정책실은 "최 의원이 공개한 문서에서 언급된 '한미간 각서 교환'은 사실이 아니다"며 "실제 외교 각서가 교환된 게 아니라 실무 차원의 각서 초안이 2003년 10월과 2004년 1월 시차를 두고 서로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즉각 해명했다.
안보정책실은 "외교부가 2004년 3월 NSC에 한미간 실무 초안이 오간 사실을 보고한 뒤, NSC와 관계 부처는 긴밀한 정책 협의와 상부 보고를 통해 이 문제를 처리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우리 정부는 용산기지 이전, 주한미군 감축, 이라크 파병 등 중요 현안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한미간 의견 조정을 2005년 초까지 연기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2005년 2월부터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최재천 "미국 요구에 밀려 졸속합의" 주장도 **
한편, 이에 앞선 1일에는 전략적 유연성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국회 동의가 필요한 중대한 사안이라는 판단을 했음에도 미국의 요구에 밀려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한·미 외교장관간 '공동성명' 형태로 합의했다는 사실이 최 의원이 공개한 NSC 회의 발언록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발언록에 따르면 당시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전략적 유연성 인정과 관련해서 "미국이 침략을 받지 않은 경우 주한미군을 한반도 이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차장은 또 "외교부 조약국은 한·미 합의시 국회동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정신(성명)'으로만 하기보다 '문자(조약)'로 엄격히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 차장은 "그러나 (전략적 유연성은)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절충한 것"이라며 공동성명 채택안을 제시했다.
최 의원은 "이 문제를 공론화할 경우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 지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때문에 조약보다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치 않은 공동성명 형식으로 졸속 처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 의원은 특히 "현재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놔둔 채 전략적 유연성을 수용했기 때문에 위헌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의 이 같은 주장에 청와대는 "NSC 문건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사실이 왜곡된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만수 대변인은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한미간 공동 성명은 한미상호 방위조약에 위배되지 않으며 우리의 안보상황과 입장을 분명히 반영한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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