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안 되겠니~?' 개그가 인기다.
과장되게 부시시한 모습을 한 청년 백수가 등장하는데, 매번 어딘가에 전화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개그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서글프게 풍자한다.
그는 다짜고짜 "XX야, 너 나이가 몇이니? 졸업 몇 회니? 군대는 어디 나왔니?" 등으로 연고를 확인한 후 바로 "100원에 탕수육 안 되겠니? 단무지는 없어도 돼~. 네가 타워팰리스 방 좀 구해주면 안 되겠니? 지하실도 괜찮아~"라는 식으로 억지부탁을 한다.
양복점, 부동산 등 매번 다른 가게가 이 '무대뽀' 청년과 줄다리기를 하는데, 늘 승리는 백수의 차지다. 이 개그의 재미 중 하나는 그가 맨 마지막에 늘 외치는 대사와 득의만만한 그의 표정이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다 되지!"
***지겨운 '저력 있는 국민' 운운, 반복되는 '위기 극복' 구호**
26일 정부가 사회 각계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마포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저출산고령화 대책 연석회의 출범식'을 보면 이 '안 되겠니' 개구가 떠오른다.
"이렇게까지 출산 캠페인을 벌이는데 아기 좀 낳아주면 안 되겠니~. 약소하지만 정부도 지원 좀 해줄께" 마지막 대사의 논조도 비슷하다.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40년만에 민주화 산업화도 다 이뤘는데!"
연석회의의 공동의장인 이해찬 국무총리는 이날 인사말에서 "우리 국민은 저력이 있는 국민"이라며 "40년만에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국이 됐는데,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이 저력을 발휘한다면 저출산고령화의 난관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한껏 애드벌룬을 띄웠다.
연석회의는 재경부 장관, 복지부 장관, 여성부 장관, 예산처 장관 등 정부에서 9명,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계에서 6명,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6명, 한국노총에서 3명,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종교계에서 3명,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업계에서 2명, 여성단체연합 등 여성계에서 2명, 동덕여대 총장 등 학계에서 2명 등 총 33명으로 구성됐다.
***"요즘 여성들은 '사회기여 의식'이 적다"?**
이 연석회의 참석자들은 앞으로 ▲출산과 양육에 장애가 없는 사회 실현 ▲능력 개발과 고용 확대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생활 기반 구축 ▲모든 사회주체의 실질적 역할부담 등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대한 범국민적 합의를 이뤄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연석회의는 실질적인 정책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내세운 대국민 캠페인용 기구다. 결성 배경도 지난해 10월 청와대가 '대연정 제안'에 실패한 후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를 기획하면서 시작됐고, '저출산 고령화' 이슈가 '사회통합'의 무난한 첫 주제로 채택된 것에 있다.
이 기구가 관변 캠페인 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은 참여 인사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은방희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은 이날 "과거 산아제한 운동에 앞장서다 이제 출산장려 운동을 하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요즘 여성들의 풍토를 보면 출산을 자기 인생의 장애물로 여기고 과거 세대와 같은 '사회기여 의식'이 적다"며 '非출산=이기적인 여성'으로 치부했다.
박종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은 한술 더 떠 "기독교계의 저출산 운동에 참여하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결혼 주례 시 자녀를 낳을 것인가를 물어서 낳지 않겠다고 하면 결혼 무효를 선언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현 저출산 대책, 사실상 '공공 보육인프라 구축' 포기 선언**
청와대는 '저출산고령화 이슈'를 워밍업 재료로 삼아 이 연석회의를 사회적 공론장의 모양새로 만든 뒤 올 하반기에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로 격상시킬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이 기구에서 국민연금 재정 개선, 양극화 해소 위한 재원 마련 등 민감한 문제를 다루겠다는 것이다.
이날 출범과 함께 바로 실무에 들어간 저출산고령화 연석회의의 논의틀은 실질적으로 지난 15일 발표된 '희망한국21, 저출산·사회안전망 개혁방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정부는 이 개혁방안에서 "앞으로 2010년까지 5년 간 저출산 대책에 19조3000억 원, 사회안전망 대책에 11조2000억 원 등 총 30조 50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었다.
여기서 저출산 대책 예산의 88.5%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영유아 보육료 및 교육비 지원(9조7762억 원)과 육아지원 시설 및 서비스 개선(5조5380억 원)으로, 여기엔 그동안 무수히 지적된 '믿고 맡길 수 있는 공공 보육시설' 확충 계획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방식은 정부가 '공보육'을 책임지겠다기보다는 "국민에 대한 직접지원이든 민간시설에 대한 지원이든 세금을 풀테니 국민들이 알아서 보육을 하라"는 '공보육 포기 선언'이나 다름 없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당장 부모에게 보육료 감면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체감하게 할 순 있지만 공공보육의 인프라 구축을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보육료의 전반적 상승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해왔다.
***'공공시설 아닌 돈 공급'에 '올인'…'보육료 자율화'의 전단계?**
이같은 '인프라 공급'이 아닌 '보육료 지원' 방식은 그간 재경부, 기획예산처 등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보육료 자율화' 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보육 양극화'는 불 보듯 뻔하다는 걱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여성가족부는 25일 "확대된 보육재정이 보육시설에 제대로 집행될 수 있도록 관리감독 활동을 강화하겠다"며 '보육료 지원' 방식의 지속을 분명히 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5일 발표된 방안에는 그간 정부가 외쳐온 '파파쿼터제(육아휴직 아버지 할당제)'가 빠진 것은 물론 오히려 '출산 여성의 노동시장 재진입을 위한 양질의 파트타임 근로모델 개발 보급 계획'이 포함돼 있다. 그동안 육아의 공동책임을 위한 제도적 바탕 없이 여성의 책임만 강조해서는 저출산의 해결은 요원하다는 점이 누누이 지적돼왔음에도 정부는 이런 지적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셈이다.
연석회의는 이날 출범 선언문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양보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지만 오늘까지 온갖 시련을 이겨온 국민의 저력으로 어떠한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답답한 국민들 역시 거듭 외친다.
"자꾸 애 낳아라, 낳아라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정책이나 잘 만들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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