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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향하는 시장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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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향하는 시장문화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4〉

올해는 겨울이 유난히 춥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무척 고생스러운 계절입니다. 꼼짝없이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원주 재래시장 아줌마들이 대단합니다.

나 같으면 그 추위에 1시간만 앉아 있으라고 해도 도망 갔을 겁니다. 나는 유난히 추위를 잘 타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돈 벌이를 할 위인도 못됩니다. 행상하는 아줌마들도 자기 혼자 산다면 밖에서 저 고생은 안할 겁니다. 자식사랑 때문에 고래심줄보다 질긴 삶이 나오는 걸 겁니다.

부처도 이렇게 추운 동토에서 꼼작 없이 앉아서 수행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사랑이란 저토록 혹한에도 오래 참고 기다리며 세상을 노여워하지도 않고 온유하게 앉아 있는 것인가요. 다산 정약용은 "仁者嚮人之愛"라고 했다지요. 인(仁)이란 것도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인 모양입니다.

원주 재래시장도 몇 년째 불경기입니다. 순대국밥집 아줌마도 예전에 이맘때는 손님이 바글바글 했는데 요즘은 장사가 안 된다고 합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는 건데 서민들은 요즘 인심은커녕 겨울 혹한보다 매서운 생존의 벼랑에서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쌀독에서 인심만 나는 건 아닙니다. 정치, 문화, 경제뿐 아니라 우리 같은 서민의 삶도 모두 쌀독에서 나옵니다. 지갑에서 나오지요. 저도 지갑에 돈 떨어지면 기운이 떨어지고 남에게 밥 한 끼 인심도 안 나옵니다. 돈지갑에서 인심 나는 세상입니다. 돈지갑이 두둑한 채 시장을 거니는 발걸음은 활기차지만 텅 빈 돈지갑으로는 시장의 자유도 내 것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돈지갑 안에 돈이 들어 있을 때만 성립되는 돈지갑 속 보증수표 같습니다. 지갑에 돈 떨어지면 지옥 세상, 돈 채워지면 천국 세상입니다.

지금까지 역대 정권이 내세운 슬로건들, 그러니까 수출입국, 선진조국, 세계화, 동아시아 중심국 등이 과연 우리 같은 지역주민의 삶을 진정으로 발전시키는 건지 회의가 갑니다. 자급자족형 다랭이 농사를 경영형 농사로, 재래시장을 대형 슈퍼마켓으로 바꾸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고 지역민은 그런 근대형 자본도 기술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역민의 기술과 능력은 쓸모없는 것인가요.

나는 재래시장을 볼 때마다 저기에 지역문화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지역문화의 마지막 보루가 재래시장 같습니다. 거기에는 온갖 그 지역의 특산물이 나와 유통되고, 재래의 기술이 아직 끊어질듯 말듯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고, 주민의 인심을 느끼게 하는 지역공동체문화가 숨 쉬는 곳입니다. 물건에 덤이 통하고 상호부조의 계와 신협이 움직이고 장터풍류가 있는 곳입니다. 재래시장은 호혜시장입니다.

원주만 해도 밝음신협은 회원 중 4000여 명의 재래시장상인들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이 조직한 한국 최초의 신협입니다. 그 신협이 지금 원주재래시장과 함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신도시 개발로 대형마트와 대금융 은행이 들어오면서 상권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래시장은 이대로 가만 있으면 경쟁력에 밀려 몰락할 겁니다. 원주시는 건축 개발로 재래시장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 외형의 시설개선으로 시장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래시장 살리기는 지역상인, 지역 문화예술인, 시민, 그리고 지자체 당국이 지혜를 모아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겁니다. 재래시장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는 지역문화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재래시장에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오랜 전통문화를 읽지 못한다면, 거기에 숨 쉬는 삶의 문화를 장점으로 보지 못한다면, 거대한 자본의 물량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질 겁니다.

'소통령'처럼 권력이 막강해진 지자체의 장은 민주주의의 산물인 지자체의 권한을 민이 주인인 시대답게 제대로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주민의 문화를 모르면 외형적인 발전만 눈에 들어 올 겁니다. 외래 투기자본과 신도시 개발만 눈에 들어온다면 그 지역은 머지않아 아무 특색도, 정체성도 없는 회색의 도시가 될 겁니다. 원주도 강릉도 영월도 전국 어디도 모두 같은 수퍼마켓과 모두 같은 아파트에서 살 뿐 지역의 문화는 회생하지 않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인 문화를 읽지 못하는 정치주의 시대는 이제 종언할 때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읽고 해석하고 양식화하는 것, 그래서 보이는 물질세계를 보다 질적으로 좋은 세계로 변화하는 것이 진정 정치가 문화와 함께 할 일입니다. 재래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문화를 읽어 오늘날의 지역문화로 현현케 하는 것은 지역 주민경제의 활로이자 지역문화의 관건입니다.

도시가 어차피 인공적인 것이라면 어떤 문화로든 디자인되는 것입니다. 돈지갑이 인심을 만들지만 보이지 않는 '인심의 문화'가 돈지갑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을 향하는 사랑'의 시장문화가 도시의 광장을 채울 때입니다. 재래시장은 사람을 향해 있었던 지역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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