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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권력의 빗장은 언제나 풀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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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권력의 빗장은 언제나 풀리려나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3〉

뭔가 이상합니다. 문화는 풍성한데 예술은 허약하고, 문화행사에는 대규모 예산이 도는데 작가는 생존마저 위협 받는 시대입니다. 문화가 국가 경쟁력이라며 돈이 되는 문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들 하는데 원천이 되는 문예창작물은 빈곤한 시대입니다.

인문학 책은 팔리지 않은 지 오래고, 전시장은 끼리끼리 자화자찬하는 판이 된 지 오래입니다. 미술시장은 가짜그림이 진짜인 것처럼 조직적으로 버젓이 팔리고 유사품이 진짜 행세를 하며 약삭빠르게 유행을 타는 사이비 예술이 판을 칩니다. 명사들은 많은데 혼을 가진 쟁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이미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 돼. 외국에 나가서 인정을 받아야 그때 가서 '나도 한 표' 식으로 평가하는 척하지 자기 눈으로 보는 비평문화가 없어." 끼리끼리, 그것도 사제, 동기, 학맥, 지연 등으로 동류가 되어야 챙겨준다는 식의 패거리주의입니다.

줄기세포 연구가 조작되었답니다. 줄기세포가 가짜랍니다. 어떻게 국운을 건 국책사업이 갑자기 실체도 없는 가짜사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나마 젊은 과학도들이 진실을 규명하자고 인터넷에 따지기라도 하였으니 비리가 밖으로 알려질 수가 있었지 문화예술계는 가짜가 판을 치든, 유사품이 오리지날을 비웃으며 행세를 하든 속수무책입니다. 비평계는 있는지 없는지 실사비평은 사라진 지 오래고 젊은 예술인들은 비리가 워낙 구조화되다 보니 엄두도 못 냅니다.

과학적 진실에 비견할만한 '문화적 진실'은 없나요. 가짜와 진짜를 판독하는 잣대는 없나요. 문예비평이나 문화계 여론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것입니다만 창작비평지 하나 없습니다. 문예창작물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주관적 소통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기에 객관적 기준이 없어 더 애매모호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 눈으로 문화를 평가하고 예술을 비평하는 정연한 잣대들이 모여 있는 문예적 소양 층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문화국가 아닌가요.

시장 효율성에 따라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을 만드는 일이 문화예술의 목적이 되는 듯한 시대입니다.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문화콘텐츠의 펀더멘털이란 논리에는 사실상 강력한 상업 지상주의 논리가 있는데 허약한 예술은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그 논리의 가교자인 문화행정가, 단체 조직가, 예술기획자들의 처분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임, 애니메이션, 영상물 등 디지털 문예상품 개발사업에 강박증처럼 달려드는데 진짜 '원천 기술'은 가지고 있는지 불안해 보입니다. 그러다가 세계시장에서 유사상품으로 아류 판정이나 받지나 않을지 조마조마한 문화상품들이 많습니다. 원형 창작은 그 밑바탕에 없고 허약한 모조품이 한국의 대표선수가 되어 한류를 떠돌아다닐 겁니다.

전국에 세워진 공공미술 프로젝트, 1년에 수천 개가 올려진다는 각종 축제 프로젝트,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문예공간 운영 프로젝트, 국제 문예비엔날레 프로젝트, 각종 문화연구조사 프로젝트, 문예창작 프로젝트 등에 방대한 국가예산이 쓰이고 있지만 제대로 쓰이고 있는 건지 조사·평가할 잣대가 없습니다. '거짓의 바벨탑'은 비단 황우석 프로젝트만이 아닙니다. 문화 프로젝트는 오래 전부터 가짜를 진짜처럼, 유사품이 마치 오리지널인 것처럼 둔갑하며 문화프로젝트 속에서 활보해 온 지 오랩니다.

남달리 창작을 해 보아야 값도 쳐지지 않고 유통 시장도 없고 마주할 민간 문화 영역도 없는데 한편에서는 막강한 조직과 예산을 가진 권력의 담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국가 예산으로 치러지는 '프로젝트 문화'는 담 넘어 다른 문화지대를 형성했습니다. 저 위의 그림처럼 언제나 민간은 장외에서 생존에 허덕거리며 자신의 문화 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객꾼으로 구경꾼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는 민간문화 불모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기획은 문화행정가, 문예시장기획가, 문예단체 조직가들이 책상의 서류로 일단 먼저 올립니다. 이런 문예물들은 기획의 출발부터 예술인의 창작 영혼과는 별로 무관합니다. 예술가의 자율성이 빠진 기술관료적 선결정이 예술혼을 담아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늘날 기술관료주의의 원천은 신자유주의적 시장효율성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형 프로젝트 사업일수록 그렇습니다. 그 뒤에서 받치고 있는 거대한 문화권력과 문화자본이 얼마나 더 커져갈지 두렵습니다.

두려움에 몸 감추고 지낼 한적한 시대도 아닙니다. 살벌한 문화전쟁시대에 예술인(쟁이)은 풍전등화처럼 바람막이 없이 서서 생존을 찾습니다.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으면서 민간 차원에서 생존적 전문성을 세우는 일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 되었습니다. 농민이나 민중의 생존권 사수와 엇비슷하게 절박한 일입니다.

문화권력의 빗장이 풀리고 민간이 주도하는 진정한 문화시대는 언제나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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