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한국영화평균 제작비를 훨씬 웃도는 값비싼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웬만해선 국내 시장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기도 어려울 큰 영화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건 바로 해외 시장이다. 하지만 한국영화에게 해외 시장은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태풍〉은 제작비와 홍보비를 모두 합쳐 200억 원 가까운 돈이 들었다. 〈청연〉은 80억 원 가량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150억 원 정도 투자됐다. 〈실미도〉도 100억 원이었다. 이렇게 비싼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들이 국내 시장에서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500만 명은 들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규모를 키워도 500만 명을 안정적으로 넘기란 쉽지 않다. 매주 극장을 찾는 전국 관객수는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아무리 대작이라도 첫 주말 관객이 180만 명을 넘긴 경우는 없다. 대작이어도 재미 없다는 입소문만 퍼지면 개봉 둘째 주부터는 관객수 낙폭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제대로 터진다면 모를까 비싼 영화들이 극장 개봉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란 애당초 쉽지 않은 일이란 얘기가 된다.
2004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42억 원 정도다. 그런데 평균치를 세 배 넘게 웃도는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제작되고 있다. 손익분기점이 웬만한 영화가 대박이 났다고 말하는 정도이니 무리수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영화의 제작비를 이렇게 높여놓는 데는 해외 시장이라는 '가능성'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영화의 해외 시장 판매는 매년 7%에서 9% 가까이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제작사나, 심지어 감독조차도 지나치게 비싼 영화 제작비를 결국 해외에서 회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획단계에서 영화제작비의 대차대조표를 만들면서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시장, 아직 오르지 못한 고원**
이미 오랜 동안 해외 시장은 한국 영화 산업이 궁극적으로 돌파해야 할 고원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 고원은 아직 오르지 못한 곳이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제작 관행은 이미 아직 미완성인 해외 시장의 돈을 미리 '당겨쓰는' 형국이다. 한국영화산업이 해외 시장에서 회수하는 돈의 비율은 아직 기대만큼 크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영화산업이 매년 해외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액수가 전체 한국영화 제작비의 10%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한국영화 해외 수출액은 3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300억 원 정도였는데 같은 해 한국영화의 총제작비는 3천3백억 원이었다. 대략 9% 정도를 해외 시장에서 회수한 셈이다. 한국영화 해외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 2004년 수출액 총액은 5천8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80억 원 정도였다. 2004년 한국영화의 전체 제작비 총액은 3천4백 억 원이었다. 17% 정도를 해외 시장에서 회수한 셈이다. 단순화시키자면 해외 시장 수익은 덤일 뿐 아직 실질적인 손익분기점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미 해외 시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한국 영화 산업에 무리수가 되고 있다. 제작비가 100억 원 가까이 들어간 작품은 대부분 국내 시장에서 최소한 손익분기점을 맞추고 해외 시장에서 이익을 낸다는 전략을 따른다. 그런데 해외 시장에서 잘 팔리기 위해서는 국내 박스오피스 결과가 클수록 유리하다. 결국 비싼 작품들은 극장 배급에 무리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국내 흥행이 곧 해외 시장에서의 흥행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같은 작품들은 기대했던 일본 시장에서 쓴 맛을 봤다. 해외 시장은 아직 한국영화에게는 그림의 떡이란 얘기다.
***해외수출 내세워 제작비 늘리는 건 아직 무리수**
영화진흥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한국영화의 수출 실적을 보면 아직 한국영화가 해외 시장에서 큰 기대를 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해외 세일즈 회사의 관계자도 "한국영화의 수출은 급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고 제작비를 늘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영화는 대작 기획을 반복하면서 해외 시장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 메이저 제작사의 관계자는 "어쩔 수 없이 제작비가 늘어나고 있고 애초에 제작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해외 세일즈 예상치를 포함시키지 않고는 투자자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 시장 크기에서 감당하기 힘든 제작비를 들여서 영화를 제작하고 그것이 결국 해외 시장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로 이어지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배급을 늘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이 블록버스터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대형화 바람은 1천만 명을 모았던 영화들의 전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균적인 국내 영화 시장 크기를 넘어선 기획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결국 해외 시장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적었거나 요행수를 바랬던 탓일 수도 있다. 2005년 상반기 한국영화는 4천8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480억 원 정도의 해외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해외 수출은 하반기에는 다소 둔화하는 경향을 보이긴 했지만, 2005년 12월까지의 실적은 2004년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2005년에도 전체 제작비 총합의 10% 미만일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한국영화의 해외 시장 개척은 오래된 과제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영화가 해외 시장에 기대기는 이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영화는 해외 시장에 기대지 않고는 이익을 내기 쉽지 않은 거대한 부피의 영화들을 반복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태풍〉은 국내에서 어렵사리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역시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결과다. 〈청연〉은 참패했고 손실 규모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여기서 끝나진 않을 것이란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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