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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일본의 기원인가 - '연오랑과 세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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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일본의 기원인가 - '연오랑과 세오녀'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4〉

"일본은 한일합방을 앞두고 그 역사적 근거로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그들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를 집대성하여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그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두었다'라는 통설적인 내용으로 정리한 사람이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를 지낸 스에마쯔 야스까즈(末松保和)였다. 스에마쯔의 주장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열악한 연구 여건과 연구자의 부족으로 수십 년 동안 반론다운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에마쯔 설은 전세계의 교과서에 실렸고, 고대부터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소리없이 스에마쯔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반론을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임나일본부 문제에 관한 스에마쯔의 강의를 듣던 김석형(金錫亨)이라는 학생이었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의 저명한 역사학자가 된 그는 …… 이미 그때부터 스에마쯔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론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작과 비평사, 2002년)라는 책에서 고려대 김현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쪽이 "열악한 연구 여건과 연구자의 부족으로 수십 년 동안 반론다운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던" 동안,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일본 학자들에게 거의 최초라 할 충격을 안겼던 사람이 바로 김석형이었다. 김석형은 1963년 북한 『역사과학』지에 '삼한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데 이어, 1966년에는 『초기 조일(朝日)관계사 연구』를 출간했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고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낱낱이 밝혀내고 거꾸로 한국이 일본을 경영(經營)했음을 논증함으로써 일본 사학계를 10여 년 동안 침묵에 잠기게 만든 고대사 연구의 고전적 노작(勞作)"이라는 광고 문구와 함께 소개되었을 정도로, 일본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저서는 그러나, 그것이 '북쪽'에서 출간되었다는 이유로 극소수의 전문 연구자들만이 쉬쉬하면서 읽었을 뿐, 출간 후 20여년 동안 일반 독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판금 도서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던 1980년대 말에야 비로소 『고대 한일관계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일반 독자들도 그 '불온했던' 저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 나라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그야말로 역사의 미아(迷兒)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석형은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에서, "일찍부터 3한과 3국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큐슈 북부, 이즈모 및 기비 등의 서부 일본 지역 곳곳에 본국의 분국을 만들고 있었는데,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일본 내에 있는 이들 3한 3국의 분국들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이 기구는 일본 열도에 있었던 것이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일본 학자들의 설을 반박했다.

"초기 한일관계의 시작은 기원전 3-2세기 경부터이다. 이 시기 한국과 일본 열도와의 역사적 관계는 우리 진국(辰國) 삼한(三韓) 주민들의, 갈대벌로 뒤덮인 왜 땅(서부 일본)에로의 진출과 그곳의 개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선진적인 금속 도구와 농경 문화를 가지고 서부 일본의 저습한 지역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독자적인 단위인 마을, 고을, '소국(小國)'들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이주는 대량적이며 계통적이었다. …… 기원 1세기에는 백 개도 넘는다고 중국 사서에 서술된 '소국'들이 열도 내에 형성되었다."

김석형은 이러한 논지를 펴나가는 과정에서, 한일 양국은 물론 중국 측의 문헌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일본서기』, 『고사기』 등의 일본측 문헌에 수록된 신화, 전설들에 대해 예리한 해석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릉 비문, 칠지도 명문(銘文) 등의 금석문을 분석하고, 서부 일본 지역의 산성이라든가 고분들 그리고 고분 부장품들을 포함하는 고고학적 자료들의 분석을 통하여 자신의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는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읽으면서 본론인 '임나일본부' 문제보다도 일본 신화, 전설의 분석 부분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조와 관련하여, 고대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 나아가서 일본의 기원(起源)에 대한 비밀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초기 한일관계사의 주된 내용은 …… 우리 이주민들의 일본 열도에로의 적극적이고도 계통적인 진출이며, 진출한 우리 이주민들의 고국들에 대한 종속적인 관계이며 그리고 그들에 의한 그곳 전체 역사 발전에 대한 선구자적인 거대한 역할이라면, 종전의 모든 한일 관계 역사 서술들과 그것들이 근거로 하고 있는 자료들은 바로 이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김석형은 이러한 관점에서, 『삼국사기』는 신라와 왜(倭)의 관계를 기록하는 데에 있어 근본 서술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대 한일관계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이주민들의 일본 열도에로의 적극적이고도 계통적인 진출"을 도외시하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가십에 불과한 왜의 침입 사실만을 산만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침입을 일삼는 왜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문자로 된 5세기 이전 시기에 우리 나라 자료로서 오직 하나가 우리 세력이 일본 열도로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라는 것이다. '연오랑 세오녀'조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나타나서 연오랑을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를 본 일본 사람들이 연오랑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가 남편을 찾아 바닷가에 나갔더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바위 위에 있었다. 세오녀가 올라가자 바위는 세오녀를 업고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자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되었다. 이에 그 비단을 궁궐 창고에 간수하고 보물로 삼았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불렀다."

김석형은 일본 신화전설 분석의 첫머리에서, 『일본서기』에 설정되어 있는 신대(神代)라는 신화시대에 제1대 천황 신무(神武)의 조상들이 다까-마라-하라(高天原)라는 높은 하늘 같은 곳에서 지내다가 큐슈 동부 지방으로 내려온다는 이른바 천강(天降) 신화에서 다까-마라-하라 또는 다까-아마-하라의, '마라' 또는 '아마'에는 하늘이라는 뜻 이외에 바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다까-마라-하라는 하늘 같이 멀고 높으며, 바다를 건너서야 갈 수 있는 한국을 가리킨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와 관련해서는, 이 신화보다 『일본서기』 중 개벽신화에 포함되어 있는 이즈모신화가 더 연관성이 깊다고 한다.

"신화의 주인공 스사노-오노-미꼬도(素殘鳴命)는, 음양(陰陽)의 두 신이 일본의 여덟 개 큰 섬들과 바다와 산천초목을 낳고, 그 지배자로서 일신(日神) 즉, 아마-데라스-오-미까미(天照大神)를 낳은 다음, 월신(月神)을 낳고, 다음에는 거머리 새끼를 낳고, 그 다음에 막내로 낳은 신이었다.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막내이자 망나니이기도 하여 …… 부모되는 음양 두 신이 네노구니(根國)로 멀리 귀양을 보내었다. 쫓겨난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다까-마라-하라에서 그 지배자인 누이 아마-데라스-오-미까미를 노엽게 하는 폭행을 많이 하였다. 그의 누이가 이를 보기 싫다 하여 굴 속에 들어가 숨어 버리니 천지가 어두워지고 밤낮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들은 그 굴 앞에 모여 큰 굿을 벌여 아마-데라스-오-미까미가 나오도록 하고 스사노-오노-미꼬도에게는 형벌을 가하여 쫓아 버렸다. 이리하여 스사노-오노-미꼬도는 하늘로부터 이즈모국 히노가와 강변에 내려오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일신과 월신이 등장한다든가, "아마-데라스-오-미까미가 굴 속으로 숨자 천지가 어두워지고 밤낮도 없어지게 되었다"는 대목은 '연오랑 세오녀'조를 연상시킨다. 이 신화에 덧붙여진 기사 중에는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여러 신들에게 쫓기어 그 아들을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가 소시모리(曾尸茂利)라는 곳에서 살기도 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신라사람들이 집단 이주한 사실을 반영한 것을 의미하며 고고학적으로도 입증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스사노-오노-미꼬도가 (한국의 칼로 추정되는) 가라사비노 쯔루기(韓鋤之劍)을 썼다"든가, "스사노-오노-미꼬도가 '가라구니라는 곳(韓鄕之嶋)에 금은이 있다'라고 말했다든가" 해서 당시 이즈모 지역과 한국과의 관계가 여러 모로 투영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즈모국 풍토기』라는 책에 이즈모라는 나라가 좁아서 신라(시라기)의 남는 땅을 끌어와서 붙였다는 기사가 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야쯔까-미주오미노-쯔노노-미꼬도(八束水臣津野命)가 말하기를 '이즈모라는 나라는 좁고도 어린 나라로구나. 당초에 나라가 작게 만들어졌도다. 때문에 기워보태자'라고 말하고 '다꾸후스마 시라기에는 미사끼라는 땅의 남음이 있는가 보니 남음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동녀의 앞가슴처럼 날이 넓은 호미로 꽉 찍어서 뚝 잡아떼어 석 줄로 꼬은 튼튼한 밧줄을 걸어 감아 당기는데 슬슬 '땅이 온다, 땅이 온다'고 하면서 끌어다가 기워 붙인 나라가 고즈의 우묵 들어간 데로부터 기즈끼, 미사끼까지다."

신라와의 교류는 일본의, 말하자면 신대(神代) 이야기에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별도의 설화로도 전해지고 있는데, '천일창(天日槍) 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설화는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에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본서기』의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하리마 국에 정박하여 시사하 촌에 있었던 때에 천황은 사람을 보내어 천일창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은 '나는 신라국의 기미의 아들이다. 그런데 들으니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있다 하므로 자기 나라는 동생인 지꼬에게 주고 귀화하러 왔노라 대답하면서 바친 물건은 하호소노-다마(葉細珠), 아시다까노-다마(足高珠), 우가까노-아까시노-다마(鷄鹿鹿赤石珠), 이즈시노-가다나(出石刀子), 이즈시노-호꼬(出石槍), 히노-가가미(日鏡), 구마노-히로로기(熊神籬), 이사사노-가다나(膽狹沙太刀) 등 아울러 여덟 가지 물건이다. 이어서 천일창에게 '하리마국 시사하촌, 아와지섬 이데사촌의 두 마을 중 네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고 하였다. 이에 천일창은 '신이 장차 살 곳에 대하여 만약 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신의 뜻을 들어 주시겠다면 신으로 하여금 몸소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하고 신의 마음에 합당한 곳을 주소서'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사기』는 '천일창 설화'를 『일본서기』와는 다르게 전하고 있다.

"옛날 아메노-히보꼬(天之日矛)라는 신라 왕자가 배를 타고 왔다. 신라에 있을 때 아누구마라는 늪이 있었는데 이 늪 가에서 어떤 천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어 천한 사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더니, 햇빛이 여인의 음부를 비추어 여인이 빨간 구슬을 낳았다. 엿보던 사내는 그 구슬을 얻어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사내가 밭갈이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소에 싣고 골짜기를 들어가다가 아메노-히보꼬를 만났다. 아메노-히보꼬는 그 사내가 골짜기로 들어가 그 소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사내를 옥에 가두려 하였다. 사내는 차고 있던 구슬을 풀어 바쳐 풀려날 수 있었다. 아메노-히보꼬가 구슬을 가져다가 침상가에 놓았더니 구슬이 아름다운 계집아이로 변하여 계집아이를 아내로 삼았다. 그 아내는 매일 맛있는 음식을 왕자에게 해 바쳤다. 때문에 왕자는 거만해져서 아내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내는 '나는 너의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고국으로 가겠다'하고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나니와(難波)에 머물렀다. 아메노-히보꼬는 아내가 도망갔음을 알고 바다를 건너와 나니와에 이르자 거기 나루의 신이 가로막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지마 국에 머물렀다."

연구자들은 '천일창 설화'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신라 땅에 살았던 부부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고, 둘째는 두 설화가 모두 일월과 관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월과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천일창 설화보다는 이즈모 신화와의 비교가 더욱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 대해서도 입장에 따라 정 반대의 해석을 할 수 있다. 예컨대 '연오랑 세오녀'조를 신라인의 '도일(渡日) 지배 설화'로 해석할 수 있는가 하면, '천일창 설화'를 도래(渡來)인의 '귀화(歸化) 설화'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월(日月)과 관련해서도 일월의 정(精)이 신라에서 왜 땅으로 옮겨갔다고 해석할 수가 있는가 하면, 거꾸로 왜 땅으로 갔던 그 정(精)을 신라가 되찾아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건너간 방향이나 일월의 정이 옮겨간 방향이 모두 신라에서 왜 땅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방향으로 미루어 우리는 어느 쪽이 기원지(起源地)였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야말로 김석형이 강조해 마지않는 "우리 이주민들이 일본 열도로 진출한" 방향이다. 김석형은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의 '맺는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원 후 몇 세기 간에 우리 한국의 백제, 신라와 가락 제국은 인근 '소국'들을 통합, 연합하여 큰 국가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일본] 열도 내에 있었던 한국 계통 '소국'들은 고국과의 연계를 유지하면서, 또한 그곳의 국가 세력으로 통합, 연합되었다. …… 열도 내에서는 3세기 말, 4세기 초에 좀 선행한 때부터 북 큐슈, 이즈모 기비, 기내(畿內) 지방의 순차로 국가 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 이 국가들에서 우리 이주민 계통이 어디서나 우세하였고 때로는 그 안에서 패권을 장악하였던 것을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지역별로 보면 북큐슈의 서부는 백제 계통, 동부는 가락 계통, 이즈모 기비에는 신라 계통이 우세하였다고 보인다. 가장 늦게 4세기에나 발족하였을 기내 야마도의 국가세력에는 5세기까지는 이즈모 기비로부터 진출한 신라 계통이 우세하였으나 가락, 백제 계통도 이리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또한 원주민 계통의 세력은 여기서는 북큐슈나 이즈모에 비해서는 처음보다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기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이렇게 신라, 백제, 가락 3국의 일본 열도 진출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같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경우, 1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왜의 신라 침략이라는 적대적인 관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제와 왜는, 신라와 왜의 경우보다 훨씬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 397년 백제의 태자 전지(腆支)가 큐슈 방면 왜에 인질로 갔던 기사 이후로 7개의 기사가 나오다가 428년으로 중단되고 이후 백제가 망하는 7세기까지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가락과 왜와 관련해서는 기록이 더욱 드물어 『삼국유사』'가락국기' 중의 석탈해 관련 기사가 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왜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보여주는 기사는 없다. 신라, 백제, 가락 3국과 왜와의 관계는 우리 문헌에서는 달리 알 수가 없는데 김석형은 3국, 특히 신라,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 내고 있다.

"그리고 보면 신라-백제 관계는 약 6백년 간에 백제가 공주에 도읍하고 있었던 시기를 포함하는 5세기 후반기로부터 약 1세기 간을 제외하고는 기본상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북큐슈에 있었던 백제 계통 왜 왕국 세력이 신라와 처음부터 계속 적대, 대립하였던 왜였다고 볼 수 있게 하는 근거로 된다."

일본 열도에 진출한 한반도 세력 중 신라와 백제 둘만을 놓고 볼 때 교류의 역사가 오래 되기로는 백제보다는 신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도 백제보다는 신라가 일본에 가까울 뿐 아니라,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더라도 관계의 우호, 적대 여부를 떠나 왜와 교류를 시작한 것이 백제보다는 신라가 먼저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글 허두에서 내가 인용했던 김현구 교수의 책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는 4세기 후반 이후 백제와 왜의 교류에서 일본의 기원을 찾으려 하고 있다. 나는 그러나 한반도와 왜와의 초기 교류에서 어느 나라가 먼저 왜로 진출했을까 하는 관점에서 '일본의 기원'을 신라에서 한번 찾아보았다. 이 글의 제목 『신라는 일본의 기원인가』는 그런 뜻에서 붙여본 것이다.

*이 글은 2005년 12월 30일자로 실렸던 것을 일부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본문 중에 인용된 김석형의 글은 남쪽에서 편집 출판된 『고대 한일관계사』(한마당, 1988년)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사진설명

사진1 경북 포항시 영일면 도구해수욕장.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다는 장소이다. 사진 왼쪽으로 가면 호미곶이 나온다.

사진2 포항시 영일면 소재지에 위치한 일월사당. 연오랑과 세오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사진3 정면에서 본 일월사당.

사진4 포항시 해병대 사령부 구내에 있는 일월지 사적비

사진5 포항시 해병대 사령부 구내에 있는 일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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