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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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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모닥불"

김민웅의 세상읽기 〈174〉

폭설(暴雪)이 축복처럼 내리면 좋겠지만 역시 모든 것은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는가 봅니다. 눈 내리는 겨울의 정경(情景)은 언제나 엽서 속의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그걸 현실로 감당해낼 때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도 합니다. 정지된 화면과 동영상의 차이 이상의 격렬한 격차가 그 사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 속에 파묻혀 고립된 마을의 모습은 태고의 인류가 어느 날 난데없이 또는 서서히 겪었을 삶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것을 여지없이 얼어붙게 하는 빙하기의 기습 앞에서, 당대의 인간은 보다 태양에 가깝게 가기 위한 지름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결국 모험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건 그가 익숙하게 살아오던 자리를 떠나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땅으로 가는 것이었을 겁니다.

눈발이 사납게 몰아치는 산을 넘고, 이미 두꺼운 얼음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 강을 건너 그 어디엔가 푸른 자취가 보일 만한 곳을 향해 가는 이들의 외롭고 고된 행렬은, 정들었던 이들을 때로 낙오자로 남기고 그 기억을 아프게 지워가며 앞으로 전진해나갔을 것입니다. 가혹한 추위로 둘러싸인 밤을 이겨낼 불을 피워내는 것은 생명의 제사(祭祀)이자 신을 부르는 굿거리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펴진 불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앉은 이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잠시 쉬고 있다는 안도감과 막연한 희망이 어지럽게 섞인 채, 날이 밝으면 곧 닥쳐올 새로운 시간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각기 생각하며 비장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굿거리장단에 흥을 돋우며 애써 희망의 의지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한번 서로간의 결속과 우정, 그리고 뜻을 다지는 순간들은 생명의 줄을 이어나가는 일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만 폭설과 추위로 고립되었던 땅을 겨우 빠져나온 줄로만 알았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고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면 이들은 이 세상에 자기들만 남겨진 것은 아니구나 하는 확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저기서 다가오는 이들이 동지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적이 되고 말 것인지 재빠르게 가늠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잔뜩 경계망을 폈다가, 그들 역시 자기들 못지않게 눈보라와 칼바람을 헤치고 들판을 헤매다 마주친 이들인 것을 알게 되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무리들일지라도 이들 사이에는 어느새 고난의 가파른 고개를 함께 넘어온 이들에게나 있을 법한 동지애와 신뢰가 녹아 스미게 됩니다. 그건 삶의 의지에 열기를 더해주는 기쁨이 됩니다.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를 경유했는지, 그리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태고의 인류는 북방의 어느 얼어붙은 광야에서 서로 처음 만난 흥분을 안고 아무래도 낯설게만 보이는 상대의 몸짓을 해석하느라 안간힘을 쓰며 소식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 정경은 상상하기만 해도 인류학적 아름다움입니다. 생명의 길로 엮어지는 운명의 새로운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뒤덮인 산하(山河)가 절망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들만의 고립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 먼 옛날부터 익혀 왔던 생명의 몸짓이 이 시대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장단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슴에 이 겨울에 어울리는 모닥불이 피워졌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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