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만에 되찾은 잉카제국의 주권'**
내년 1월 22일 취임을 앞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당선자가 본격적으로 대권 인수작업에 착수한 가운데 볼리비아 내의 인디오 지식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는 스페인 정부와의 역사적인 앙금이 다시 불거져 나올 조짐을 보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21일 모랄레스의 대통령 당선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순간 로드리게스 사빠떼로 스페인 총리의 당선축하 전화였다. 모랄레스 당선자는 최근 한 공식 석상에서"스페인 총리의 축하전화를 받았으며 6분 정도 통화를 했다"고 밝혔다. 모랄레스 는 이어 "사빠떼로 스페인 총리가 쿠바의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형제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을 스페인으로 공식 초청했다"고 발표하고 "사빠떼로 총리가 언제쯤 스페인을 공식 방문할 수 있는가 등 구체적인 나의 일정까지 궁금해했다"고 통화내용을 공개했다.
스페인과 역사적인 악연을 가지고 있던 잉카제국의 인디오출신 모랄레스가 사빠떼로 총리로부터 분에 넘치는(?) 친절한 축하인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외신은 물론 볼리비아 현지언론들을 흥분시킨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축하인사가 스페인 현지의 한 가톨릭계 라디오방송국이 사빠떼로 총리와 목소리가 비슷한 코미디언을 이용한 장난전화 프로그램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황당한 장난전화에 놀아난 꼴이 된 모랄레스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심기가 편치는 않아 보인다. 자신의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안팎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볼리비아 국민들은 "이것은 명백히 지난날 우리의 조상인 잉카제국에 행했던 천인공노할 만행을 스페인이 21세기에 와서 다시 재연한 것"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인디오 출신의 한 볼리비아 역사학자는 "볼리비아와 페루 국경을 거쳐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라 쁠라따 강물이 붉은 건 지난 15세기 스페인 정복군에 도륙 당한 우리 조상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며 "당시 스페인 정복군에 의해 도륙된 잉카 제국의 토착민 수는 300만 명을 헤아린다"고 역사 속의 기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또한 볼리비아 뽀또시의 한 인디오 인류학자는 "스페인이 지금까지 누린 부는 잉카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들 손으로 넘어간 잉카제국 소유의 금은보화 때문이었는데 이제 와서까지 우리의 국가원수를 향해 그런 장난전화를 해 공개적인 망신을 준 것은 우리를 아직까지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하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분노를 나타내기도 했다.
***모랄레스는 '잉카 식 사회주의 제국' 부활시킬까**
남미의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스페인과 볼리비아의 역사적인 악연을 생각한다면 장난치고는 너무 심한 장난이었다"며 "아무리 코미디프로였다고 하지만 스페인 전역에 생방송되는 공중파를 통해 국가원수를 사칭해 장난전화를 건 행위는 양국 간에 심각한 외교문제를 불러올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또 "이번 사건으로 볼리비아 내 인디오들의 서방세계에 대한 악감정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스페인 정부의 오랜 식민정치와 착취가 끝난 후에도 외국계 자본이 볼리비아를 쥐고 흔들고 있는 현 상황에서 옛 잉카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서방기업들을 추방하고 에너지자원을 전면 국유화하자는 주장이 더욱 힘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인디오출신의 자원국유화운동 지도자들과 고산지역 농민들은 "외국계 다국적기업들은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볼리비아의 국부를 착취하고 풍부한 자원의 원주인인 우리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도록 내몰았다"고 주장하고 "옛 잉카제국 시대의 정치시스템을 그대로 부활해 옛 영화를 되찾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린 우리 조상들의 유산을 외국기업들로부터 다시 되찾자'는 운동이 활발해질 거라는 얘기다.
현지 역사학자들은 잉카제국 당시에는 왕족과 양반, 천민의 구분은 뚜렷했으나 부의 공동 분배와 천민과 귀족 계급이 공존하는 사회주의식 제국정치를 펼친 것으로 나타나 모랄레스가 이 제도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대두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랄레스 역시 이를 의식한 듯 "토착민들의 자주독립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정책을 펼치겠다"면서 "나의 정치적인 좌우명은 토착민들의 존엄성을 지키고 배고픔과 억눌림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그가 이끄는 정치세력도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당'이어서 쿠바의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식 정치를 펼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랄레스가 열화와 같은 인디오 출신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지난 15세기까지 중남미를 호령했던 옛 잉카제국의 영화를 되살리기 위해 볼리비아 경제를 장악한 서방 다국적기업들과 어떤 힘겨루기를 할지는 두고 볼일이다.
더불어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고 아직까지 '인디오'라고 불리는 슬픈 역사를 지닌 채 남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잉카제국의 후예들의 주권회복운동도 힘을 받을 전망이다.
또한 아르헨 북부 정글지대에 생존해 있는 인디오들도 어떤 식으로든 주권회복운동을 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800년대 말 아르헨 정부의 인디오 말살정책에 밀려 안데스 고산지대와 북부정글지대로 피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과 근성을 가진 소수 민족이다. 이들 중 교육을 받은 부족들은 가끔씩 아르헨 정부를 향해 "내 땅을 돌려달라"고 호소해 화제가 되곤 한다.
따라서 모랄레스 집권 이후 남미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인디오부족 대표들의 움직임도 관심사다. 지난 11월초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됐던 미주정상회담장에서도 잠시 언급됐지만 중남미 오지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인디오 부족대표들도 이제는 정치 세력화되어 자신들이 이 땅의 원주인이었음을 당당히 내세우며 처우개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 인디오들의 희망으로 떠오른 에보 모랄레스가 성공적으로 볼리비아를 이끌어 잉카의 옛 영화를 되살릴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남미 전역의 인디오들의 인권과 생존권 등에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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