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지나 경주 쪽으로 향하다가, 내처 가던 길 버리고 경산 나들목으로 접어든다. 청도(淸道), 운문사 가는 길, 비로소 마을로 나지막히 내려앉은 가을이 엿보인다. 유난히 사과나무가 많은 길, 이미 열매는 다 거두어지고 빈 가지에 바람 소리만 차다. 올벼도 늦벼도 다 거두어지고, 가을걷이 끝낸 손이 피워 올렸던 짚불도 잦아지고, 그 끝에 남은 말간 연기가 빈 들을 강물로 흐르게 한다.
이 길이 이름처럼 맑은 것은, 길이 거느리는 마을이 사과, 감, 대추 따위 유실수를 많이 내는 고장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자명(山自明), 수자심(水自深)한 풍광이 고스란히 되비치는 깊고 넓은 물을 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사람 사는 마을마다 찾아드는 수많은 길 가운데, 장한 청솔숲으로 저를 마무리짓고 있는 맑은 길 하나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 송뢰(松籟) 소리만 새겨들어도 저절로 단속(斷俗)되어 버릴 만한 곳, 그 청신한 솔숲을 일주문으로 삼고 있는 절 하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도,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만 해도, 운문사에서 대구까지 오가던 길은 명호처럼 맑을 수가 없었을 터였다. 1958년에 비구니 전문 강원이 열린 곳, 1970년에 강원 강사로 부임하여 77년도부터 스무 해 동안 주지와 강주 소임을 맡아 온 명성 스님은, 25년 세월 동안에 서른 채가 넘는 전각과 요사채를 개축하고 신축하여 호거산 자락의 경개를 일신해 놓으셨다. 지난 98년부터 운문사 주지 소임을 맡아 오고 있는 주지 혜은 스님에게는 그 오랜 불사 기간 동안, 포장도 안 된 그 길로 건축 자재를 사 나르는 차가 일으켜 놓는 먼지가 자욱하던 길이었다.
77년부터 십 년이 넘게 운문사 사리암의 원주 소임을 맡았으며, 뒤이어 98년부터 이 곳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혜은 스님은, 명성 학장 스님의 원력의 결실이라 할 만한 오늘의 운문사가 있기까지, 그 곤고한 세월을 양날개로 떠받쳐 준 두 분 스님 중 한 사람이다. 서울 청룡사에서 명성 스님에게 경전 공부를 하면서 지은 인연, 이후로 명성 학장(강주) 스님은 그가 스승으로 모셔 온 분이다. 혜은 스님은 사리암 원주 소임을 맡기까지 선방 좌복을 벗어난 적이 없던 수좌였다니, 사리암도 그저 좌복 지키고 앉듯 육중하게 자리만 지켰을 터였다. 그러나 십 년 불사 끝에 사리암은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은 기도객이 몰리는 든든한 기도처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었으니, 그가 지은 복이었던 것이다.
80년도부터 십 년 동안 운문사의 재무 소임을 맡아 사리암과 큰절 불사를 실제로 지휘한 성호 스님도 명성 스님의 또 다른 날개 한 짝이었다 할 만하다. 일백오십 명 학인이 한데 복닥거렸던 요사채는 비좁아서, 밤중에 볼일을 보고 들어오면 몸을 누일 자리가 없어지고 말던 시절, "간장 한 종지와 짠지 한 가지"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 동안에 성호 스님이 치른 상량식만 해도 열여덟 번, 그것은 별난 일일 수도 없이 되어, 어느 때에는 한밤중에야 다음날 상량식에 쓸 상량보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고 황급히 절 문을 나섰던 적도 있었더라 했다. 분식이 국책으로 장려되던 때이기도 했지만, 일 주일에 두 번 의무적으로 국수를 올리던 때, 제 탓만은 아니었더라도, 그 날은 울력 나가는 학인들의 눈치가 슬그머니 보이곤 했었다.
옛이야기를 하다 말고, 혜은 스님은 자리에서 가만히 일어나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똑, 하고 껐다. 장지문으로 막 아침 햇살이 비쳐 들기 시작한 때였다. 전등을 끄기에는 아직 방이 너무 어둡지 않을까 싶은데, 객의 그런 마음을 읽은 듯, 뒤쪽 바깥 겹문을 열면 환해져요, 했다. 올로써 속랍이 예순일곱, 58년에 마곡사로 출가하여 오늘에 이른 분, 일상의 행, 당신이 앉는 자리는 늘 그렇게 갊아 왔을 터였다. 콩깻묵을 식량으로 배급 타서 먹던 시절 보내고, 산문에 들어서도 도토리를 양식으로 삼거나 시레기를 두어 지은 쓴 밥도 달게 먹었던 곤고한 삶이었으니, 그것이 습으로 남았기도 했겠다. 그러나 일미칠근, "쌀 한 톨의 시은(施恩)을 달면 그 무게가 일곱 근"이라는 산문 안 법도를 받자온 끝에 얻은 일상의 행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다섯 해 동안 보던 큰절 주지 소임을 놓고, 2003년 하안거부터 방부를 들이게 되는 운문사 안 문수선원 선원장으로 옮겨 앉게 된다. 환귀본처(還歸本處), 수좌였던 혜은 스님으로서는 아마도 그 뜻이 그러할 때, 그는 이제 한 세월이 뒤돌아 보인다.
이곳 소임을 보면서 아주 잔소리꾼으로 호가 났어요. 그렇게 말하지만 그는 달라지는 세상을 거스르며 옛것만 고집하는 완고하고 매정한 어른이 아니라, 달라지는 세상에 맞는 새로운 비구니상을 세워 가야 한다고 여기는 선진한 선배이다. 내전(불교 경전)만 보아도 되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은 내전말고도 변해 가는 시대에 맞추는 다른 공부들이 많이 늘었다. 문화부, 방송부… 학인들이 맡고 있는 이런 소임도 그 옛날에는 없던 것들이다.
기운은 써야 나지! 이곳이 지난날에는 나락 농사까지 해내었어! 힘겨워 하는 대중의 면전에서는 이렇게 맵게 말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구메구메 그 형편을 헤아려 주려 애썼으니, 품을 사서 힘든 시간을 줄여 주는 자상한 어른이었다. 정법의 당간을 세우는 수행 도량, 그로서는 도량을 한 바퀴 돌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번와 공사가 끝난 뒤에까지 한 무더기 남은 기와도 포크레인 동원해서 치우고, 정진실 들렀다가 뜯어진 커텐도 슬며시 고쳐 달곤 하는 그이이다. 내가 소임이 주지이잖습니까.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久住] 지키고 보호하는[護持] 소임, 주지의 뜻을 풀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자귀나무에 분홍 꽃 피면**
공부하는 학인의 수효가 250명이 넘는 곳, 운문사는 나라 안 네댓 비구니 강원뿐만 아니라, 비구 강원을 포함시켜도 그 규모가 첫손 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웅크린 범이 굽어보고 있는[호거산] 도량이 아름다운 것은 절을 이루는 수십 채 번듯한 당우 때문도, 봄철에 열두 말 막걸리를 받아먹는 몇 백 년 묵은 처진 소나무 때문도 아닐 터였다. 먹물색 한 가지로 저를 다스리되, 서른 채가 넘는 당우가 비좁도록 활기찬 수행 도량, 그 도량을 채우고 있는 학인들 때문이다.
강원 체제의 뜻이 그러하거니와, 운문사 학인들은 경학하는 가운데 수행자로서의 먼 길을 위한 초석을 깔되, 그 길이 종이 책 속에만 있지 않음을 몸으로 익혀 나간다. 선원의 조직과 교단의 제도를 집대성하여 중국 불교를 인도 불교와 차별화한 백장 회해는 수행에서 생산적 노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바, 스스로도 그 뜻을 몸소 실천했던 분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 노경에도 밭일을 멈추지 않자 건강을 염려한 그의 제자들이 호미를 뺏어 버리자 그는 공양을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호미를 꺼내 놓았던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즈음에 들어 쇠미해지고 말아 뜻있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 백장의 정신은 여기 운문사에서는 오롯하게 살아 있는 점도 다른 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학인들의 하루 일정은 분, 초를 다툴 만큼 엄격히 지켜진다. 세시에 도량석과 함께 시작된 아침 예불이 끝나고 나면, 한 시간 조금 못 되는 동안 저마다 처소에서 입선(간경)에 들고, 다시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경을 읽는다. 저녁 예불 뒤에는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는 밤 9시 전까지 강원의 전통 학습 방법인 논강과 다음날을 위한 예습 시간을 갖는다. 따져 보니 경상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여섯 시간이 조금 더 되는데, 가을걷이로 한창 바쁠 때는 울력이 다섯 시간을 넘기기도 한다고 했다.
어려운 한문으로 율을 맞추어 짓는 것만 시이겠는가. "자귀나무에 분홍꽃이 달릴 무렵에는 팥씨를 뿌린다" 했다. 농투성이가 흙밭에서 깨친 그 한 소식도 글로 옮기면 아름다운 시 한 귀절이 될 터였다. 농사 짓는 일은 학인인 형편으로 한 해 동안만 맡게 된다지만, 명성 학장 스님을 비롯하여 학감 스님, 그리고 재무 스님 등이 입을 모아 함께 짓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콩을 거두는 것은 서리 내릴 때쯤이 알맞다거나, 무는 싸늘한 가을 기운을 쐬어 단련을 시켜야 쓴맛이 가시는 법이라 일러 주신다. 또한 사하 마을에서 대대로 농사 일을 해 오고 있는 할머니들의 훈수도 없지 않은 것이다.
농사도 지어 보지 않은 학인이 글쎄, 한 해 내내 한 고랑도 놀리지 않고 바지런히 씨를 묻어 가꾸고…. 혜은 스님이 올 한 철 도감 소임을 맡아 농사 일을 책임 맡은 묘진 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농사 짓는 일뿐만이 아니라, 도량 내의 갖가지 뒷일도 함께 해 내야 하는 소임인 만큼, 그의 하루는 별을 보고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형편이 아니라, 하늘에 뜬 별을 치어다 볼 겨를이나 있는 것인지.
"땅에 거름 주고 이랑을 쌓으며, 씨 뿌리고 싹을 틔우며, 물 주고 김매는 일을 모두 모름지기 때 맞춰 해라. 마땅히 (농사 일을) 잘 아는 이에게 물어라. 하늘의 때와 땅의 형편을 함께 헤아려, 늘 소채를 땅을 놀리는 바 없이 짓되, 잘된 것은 대중에 공양시키고, 남는 것이 있으면 마을에 내다팔아라." 백장의 뜻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는 장로 종색의 〈선원청규〉에서 이르는 바, 노동을 강조하되 그 뜻을 승단의 자립 방편으로 삼았던 당시와 다른 것은, 땅에서 거둔 것은 돈사지 않고 모두 대중의 먹거리로 삼는다는 정도이다. 상치, 근대, 가지, 박, 오이, 해바라기, 무, 장다리, 시금치 등, 이른 봄, 한식 전, 유월과 칠월 중순 따위 네 번에 나누어 심으라 이른 작물의 종류까지 오늘 이 곳에서 가꾸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먼뎃밭까지 보태면 일만이천 평이나 되는 이 곳 밭 농사는 1월 중순(이하 모두 양력)쯤에 거름 내는 일로 시작된다. 후원에서 나오는 젖은 쓰레기나 낙엽, 잡초, 불사 때에 나온 톱밥, 재, 정랑(뒷간)에서 나온 것 따위를 한 해쯤 묵히어 발효시킨 것이다. 밭에 올린 뒤에 며칠쯤 볕을 쏘인 다음 땅을 깊이 갈아엎는다. 밭을 갈아엎거나 타래질로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일까지는 처사들의 도움을 받지만, '저팔계'(가래)로 골을 내고 흙을 고르는 것은 대중들이 한다. 2월로 접어들면 도량 안에 있는 온실에 씨를 뿌려 모종 낼 준비를 하고, 밭에 뿌릴 씨앗 준비도 한다. 감자 씨도 이 때 미리 마련해 둔다. 겨우내 황량한 밭을 푸르게 지키던 월동초, 시금치 따위를 거둬 먹거나, 온실에서 자란 치커리, 청경채 따위를 뜯어먹다가 3월 초가 되면 온실에서 심어 모종을 낸 상추, 쑥갓, 얼갈이 배추, 열무, 고소 등을 밭에 심는다. 그러나 가지 같은 것은 모종을 사서 쓴다. 놈은 싹 내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그 사이 개울 너머 장군평에서 세 해 동안 자란 도라지도 캐 내고, 케일, 근대, 아욱, 갓, 당근, 비트 따위 씨도 뿌린다. 그뿐이랴, 극성 맞은 비둘기들이 씨를 쪼아 먹지 못하도록 위도 덮어 주어야 한다. 중순이 넘어가면 감자를 네댓 조각으로 잘라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재도 묻혀 둔다. 아이, 그새 법당 뒤 밭에 상추 하고 쑥갓 싹이 텄네! 씨가 좋았던지 올라오는 품새가 이쁘다. 충실한 씨라야 좋은 됨새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덜 충실한 것도 정성으로 보살피면 잘 자라난다. 우리만 맛난 것 먹을 수 있나. 오백 살 먹은 쳐진 소나무 할아버지께도 열두 말 막걸리 공양을 올린다. 그늘이라 풀도 잘 자라지 않는 곳, 그저 한 해에 이렇게 두어 번 곡차만 올려 드리면 점잖게 잘 지내신다.
삼백 명 가까운 대중들의 공양거리를 뒤대는 일, 밭 울력은 수행의 방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나날이 해결해야 할 절박한 생활의 문제일 듯도 하다. 날마다 후원 소임자들과 함께 식단을 의논한다 하나, 푸성귀를 키우고 있는 도감 스님으로서는 갓 거둔 것을 대중에게 바로 공양 올리고 싶다. 그리고 그 뜻은 거의 그대로 존중된다. '소쿠리' 또는 콘테이너, 도시에서 이사를 할 때에 쓰이는 네모꼴 큰 플라스틱 바구니를 이르는 말이다. 온 대중의 한 끼 국에 필요한 양은 그것으로 하나 반쯤 된다. 대중들의 처소와 가장 가까운 종각 옆 밭은 거의 끼니마다 공양으로 올려지는 국거리와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종류를 주로 가꾸는 곳이다. 온실에 호박도 싹이 나서, 도감 스님 농사 일기장에는 "호박 씨가 살며시 세상 구경…"이라는 귀절이 이쁘게 적힌다. 우엉 씨도 묻었다.
4월이면 청명, 더 바빠진다. 첫날부터 비가 내렸으니 시작이 좋다. 대두콩도 옮겨 심고, 애호박도 옮겨심기를 한다. 비가 제때 내려 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급하면 도감 스님은 131번으로 전화를 걸어 날씨를 확인한다. 그리고 일 주일쯤치의 밭 울력을 예정해 둔다. 골라도 골라도 밭에서는 돌이 나온다. 이런 땅에서는 그래서 토란이나 오미자는 잘 안 된다. 알타리도 뿌리를 족 곧게 내리지 못하고 울퉁불퉁해진다. 삼백 근 마른고추를 닦아 고추장 담글 준비를 한다. 연등도 만들어야지! 고추밭에 잡초가 덜 자라게 비닐도 덮어 줘야 한다. 도라지를 캐낸 데에는 들깨 씨를 뿌렸다. 장군평과 먼데 고추밭 둘레에는 옥수수를 심었다. 날 잡아 대중 스님들이 쑥도 캐 온다. 냉이, 질경이, 홑닢나물도 함께 캔다. 재 묻은 쪽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심은 감자도 싹이 났다. 작물이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하면 떡잎 따 주기, 배게 난 것 솎아 주기, 지짓대 세워 주기 등의 일로 더 바빠진다.
"고추가 병이 났습니다." 도감 스님 일기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힌다. 날이 더워졌다. 화엄반 스님들이 감잎을 골라 따서 일곱 번, 여덟 번씩 덖어 감잎차를 만든다. 밭매기에 대중들 허리가 아주 꼬부라진다. 감자, 옥수수 등 별식이 나온다. 때로 아이스크림도 나온다. 그러나 묵언하며 두세 시간씩 견책 울력까지 하고 나면, 제쳐지는 공부감에 흐르는 땀에, 어젯밤에 머리 속으로 가만히 풀었던 보따리를 다시 싸고 싶어진다. 이 밭에서 들어야 할 화두는 망(忘)? 본성을 흐리는 무명을 씻어 내는 일? 그것은 책에서 글자로나 읽힐 말, 밀짚 모자로 가리지 못하는 햇살, 머리 밑으로 흐르는 땀뿐이다.
시금치는 겨울 나물이라 더운 철에는 잘 안 된다. 여름이면 아주 녹아 버린다. 상치도 한여름에는 잘 안 된다. 그러나 봄에 심기 시작하는 아욱, 근대, 상치는 9월달까지 가꾸어 먹을 수 있다. 6월에는 감자를 수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7,8월 한더위에는 고추밭말고는 다른 밭농사는 조금 쉬는 편이다. 저녁 무렵이면 포기 사이에서 기어 나오는 배추벌레를 멀리 떨치되, 병에 넣고 흐르는 물에 흘려 보낸다. 자비의 도를 행하되, "쥐를 위해 밥을 남겨 주고, 나방을 불쌍히 여기어 등불을 켜지 말라"는 말씀까지 받자올 수는 없더라도, 그것들이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는 해야 한다. 한여름 성하게 자라난 쑥을 뜯어 검은 설탕을 켜켜로 두었다가 일 주일쯤 발효시킨 것을 희석한 것이거나, 우유와 식초를 섞은 물을 주면 썩 효과가 있다.
묘진 도감 스님의 '야심작'은 이모작으로 길러 낸 오이일 듯하다. 피클용보다 길이가 조금 긴 이 토종 조선 오이는 겉잎은 이미 말라서 바스러지는데도 아직 크기대로 자라면서 거둘 손을 기다리고 있다. 톡 하고 꼭지를 따서 오도록하게 가시가 돋아 있는 놈을 옷에 문댈 것도 없이 베어 무니, 아삭거리는 육질도 일품이었지만, 입 안에 번지는 향이 참으로 상큼하였다. 간간히 뿌리기 시작하는 늦가을 비에 우비를 걸치고 장화를 챙겨 신고 나온 품이 야전 사령관과도 같아진 도감 스님, 객의 모습을 지켜보다 잘 기른 자식 선보이는 어미처럼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4월에 모종을 사서 고추와 가지 따위와 함께 심은 오이는 대개 9월이면 끝물을 보게 되는데, 묘진 스님은 욕심을 내어 보았더라 했다. 학인들은 틈 내기가 여의치 않고, 때는 놓치면 안 되겠기에 처사들의 힘을 빌어 우중을 무릅쓰고 7,8백 포기쯤 모종을 낸 것이다. 강수량이 많다 못해 지나칠 정도였던 궂은 기후를 무릅쓰고 오이는 어찌나 잘 되었던지. 올 한 철 운문사 학인들이 대한 '새반찬'(장아찌 따위가 아닌 신선 야채로 조리한 것)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있던 먹거리였다. 그러나 때없이 따 먹었다가는 그것도 대중 참회감에 부쳐진다! 땅에서 거둔 것은 먼저 산신각과 조왕님께 올려서 맛 보시게 하는데, 그렇게 예를 올린 것이라도 그렇다. 땅에 포복시켜 키우기 일쑤인 속 노란 단호박도 시렁을 만들어 순을 올려 주었더니, 단위 생산량이 몇 배로 늘었다. 이것도 대중들이 즐겨 먹으니, 도감 스님 마음은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바쁠 때는 전 학년이 다 울력에 참가하게 되지만, 농사 짓는 일은 주로 2학년인 사집반이 담당한다. (갓 입학한 1학년 치문반은 발우를 공양간으로 옮기거나 설겆이, 그리고 풀 뽑기, 바닥 닦기 등 도량 안 울력을 맡고, 3학년인 사교반은 후원에서 공양 준비를 하고 도량 내 화단을 맡아 가꾼다. 4학년인 화엄반은 공부에 더욱 힘써야 할 때라 울력 양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대내외 학인을 대표하면서 전체 규율을 이끄는 입승, 바깥 손님을 맡는 지객, 법당 소임인 노전이나 병법, 방송부, 사보를 제작하는 문화부 따위의 소임을 맡는다.) 학인들은 전화도 직접 받지 못하고, 신문, 텔레비전, 컴퓨터 따위의 외부 소통 매체에의 접근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도량 안만 맴돌다가 밭일을 하더라도 바깥 바람을 쏘이게 되었으니 좋아라 호미를 들고 나섰던 사집반, 그러나 밭에서 당근을 캐던 화엄반 학인 한 스님은 "운문사 화엄반을 끝내면 팔지(八地) 보살(〈화엄경〉에서 이르는, 보살의 수행도에 따른 열 단계 중 여덟 번째 단계)은 된 것"이라 웃으며 말한다. 운문사는 운문 문언(雲門文偃)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스승 목주(睦州)는 법을 구하려는 제자를 밀쳐 내며 호되게 문을 닫아 버려 다리를 부러뜨려 놓았었다. 그런 스승을 둔 제자답게, 운문의 어조는 늘 단호하고도 간결했다. 무엇이 올바른 진리의 눈입니까. 보(普), 어디에나 있다! 그 곳이 대체 어디입니까. 친(親), 몸소 깨달아야지! 운문사 학인들은, 스스로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도 여법한 천지 운행에서 법의 본성을 보고, 철 따라 변전하는 초목의 태에서 무상의 이치를 몸소 깨쳐 갈 터였다. 밭에서 쌌던 보따리는 다시 풀어졌다!
***가을 하늘 아래 붉은 감**
'운문사'는 고려 태조가 창업 당시에 도당 유학승인 보양의 도움을 받은 것을 인연으로 내려 준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절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양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다가 서해 중간에 이르렀을 때에, 용왕은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그의 아들 이목(璃目)에게 조사를 모시게 했다. 이목은 조사를 따라 운문사에 살게 되니, 남몰래 법의 교화를 돕고 때로 가문 땅에 비를 내리게 하기도 했다(〈삼국유사〉). 이목이 살던 못, 절 서쪽을 휘감고 흐르는 약야계 이목소(璃目沼)는 그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니, 그것은 천 년이 넘도록 아직 이 도량에 함께 산다.
지난 유월달에도 사흘에 걸쳐 우순풍조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던 곳, 오늘 이 곳에서는 배추 절이는 울력이 한창이다. 이목의 성심이 지나쳤던지 유난히 강수량이 많았던 올 여름, 김장용으로 심은 배추와 무는 속도 아직 차지 않고 밑도 덜 들었다. 아무래도 이번 김장 때는 배추를 사서 보태야 할 듯, 그러나 본격 김장은 11월 말쯤에나 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치는 상시로 담가 먹는 양일 텐데도 그 규모가 놀랍다. 냇둑 바구니에 담긴 배추가 일렬로 늘어선 학인들의 손에 손으로 전달되고, 그것을 건네받은 조는 소금 푼 물에 배추를 담갔다 건져 냈다. 두어 '숙수'는 소금물에 얼간이 된 배추 포기 사이로 굵은 소금을 뿌려 넣었다. 장화 신고 고무 장갑을 끼었으나 물 가 공기는 찼다. 나무 아래에 놓인 뜨거운 찻물통을 기울이는 학인들의 콧등은 붉고, 찻잔 위로 새하얀 김이 피어 올랐다. 대중이 손을 모아 하는 일, 산더미처럼 쌓였던 배추 더미는 어느새 붉은 고무통 속으로 얌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곳은 해발 600미터가 넘는 곳이라서 농사 짓는 형편으로 보자면 남부라기보다는 중부의 잣대로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독밭에다 우순풍조하지도 못한 곳, 가물거나 강수가 지나친 곳이라 한다. 이제는 밭농사만 짓지만, 80년대 끝무렵까지 70마지기 논에다 쌀농사를 지었었다. 절 아래 마을에 35마지기, 그리고 지금은 삭막한 주차장으로 변한 그 곳이 모두 쌀을 내던 논이었다. 모철에는 개울에 양수기를 대고 밤새 물을 펐더라 하니, 혜은 스님을 비롯한 옛날 대중들로서는 힘든 쌀농사 짓는 동안의 불순한 날씨만 기억에 남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몸을 놀려 하는 일이란, 그런 세월 겪은 사람에게나 낯선 사람에게나 늘 새롭게 힘든 일일 터였다.
가을걷이 때, 한 해 중 가장 바쁜 철, 한 해 작물을 심고 가꾸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것을 거두고 갈무리하는 일을 때 맞춰 해 내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가을걷이는 아직도 더위가 그 기운을 누구러뜨리지 않고 있는 9월에 시작된다. 절 서쪽을 휘감고 흐르는 약야계 냇물 건너, 장군평에 심었던 참깨를 베되, 잎이나 꽃 부분은 장아찌나 부각용으로 가려 따 내고 단으로 묶어 세운다. 7월 말부터 익기 시작한 고추도 본격적으로 거두어져 말려진다. 누렁 호박, 단호박도, 들에 저절로 자라는 오미자, 산초, 제피도 거둬 들여야 한다. 수업 시간인 입선 때말고는 밭에 나와 살다시피하는데도, 그리 많지 않은 콩은 사하(寺下) 마을 보살님들의 품을 사서 털었다. 호박은 서리를 맞아야 더 달지만, 감은 그 전에 거두어야 한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감 따기는 힘든 노역일까, 한낮의 소풍일까. 감 따기 울력이 화사한 가을 풍경으로밖에 될 수 없는 한심한 객이 한가하게 품어 보는 궁금증이다.
다음날은 화엄반이 주도하는 메주 울력이 있었다. 만세루, 그 옛날 어느 때는 종루로 쓰이기도 했던 곳, 그러나 200평이 조금 못 되는 이곳은 여름이면 어린이 여름 불교 학교도 되고, 학인들의 졸업 식장이 되기도 하지만, 평시에는 공동 울력장으로 자주 쓰이는 곳이다. 지붕과 기둥만 세워져 있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라 메주나 고추, 시레기 따위를 널어 말리기도 한다. 메주는 한 반에 콩 한 가마씩, 남은 된장과 간장을 가늠하여 그 양은 조금씩 조절된다. 지난 밤에 다섯 시간쯤 불려 놓은 콩은 이른 아침부터 가마솥에서 삶아져 온 도량에 구수한 냄새를 풍겨 놓더니, 웬만큼 물이 빠진 그것은 이미 만세루로 옮기어져 있다. 메주콩은 고추 빻는 기계에 넣고 빻는데, 쌀 담는 마대 자루에 넣고 밟기도 한다. 샛노랗게 갈리어 나온 것을, 두 줄로 늘어앉은 학인들이 기역자를 두 개 겹쳐 놓은 듯한 나무틀 속에 넣고 꼭꼭 눌렀다. 그리고 뒤집어 빼내어 넷으로 칼질하고 다시 잘 매만진 다음, 만세루 한 켠에 짚을 깔아 둔 곳으로 옮기되, 적당한 간격을 두어 바람이 통하게 한다. 어지간히 마르면 다시 만세루에 짚으로 엮어 매단다. 일을 줄여 말하면 그렇다. 쑤어진 메주콩이 유난히 빛깔이 곱다 싶었더니, 아이고, 그 많은 콩은 차판에 놓고 티나 검불 따위를 일일이 골라내는 택두(擇豆) 울력을 거친 것이었다!
배추도 속이 차게 짚으로 묶어 주고, 처사들이 기르는 표고버섯 밭에도 뜨물을 내 주어야 한다. 겨울 한 철 자라게 될 시금치, 월동초 씨도 묻고, 겨우내 먹을 무, 배추도 뽑아서 땅을 파고 묻어야 한다. 가지, 무, 호박도 썰어 말려야 한다. 키 높이 서서 온 도량을 환히 밝혀 놓던 은행나무가 올해는 서리 내리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거짓말처럼 잎이 다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비가 잦아 나무가 근기가 없어진 데다, 한 보름 일찍 닥친 추위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드문드문 떨어져 내린 은행 알은 학인들이 오며가며 줏어 모아 놓았다. 그것도 다시 잘 말려서 까 두어야 한다.
이맘때면 늘 그렇듯, 어제도 한바탕 대중 울력이 있었다. 산내 암자인 청신암, 내원암 가는 길목에 있는 고추밭, 작물은 대개가 세 해 이상 연작하지 않는다. 내년에는 이 곳에 다른 작물을 심어야 한다. 끝물 고추 따기, 혜은 스님도 고추밭으로 나와 고추 따는 손을 보탰다. 그렇게 거둔 것들은 만세루에 모여 앉아 크기대로 가려 놓아야 한다. 잘 익은 붉은 고추는 고추가루용으로 말리거나, 냉동실에 보관하여 내년에 새 김치 담글 때에 쓰게 된다. 냉동 보관되었던 것이라도 잘 갈아서, 감자 간 것과 쌀가루로 풀을 쑤어 함께 버무리어 김치를 담그면 묵은 김장 김치에 식상해진 입맛을 산뜻하게 되돌려 놓게 되는 것이다. 반듯하게 잘 생긴 놈은 간장에 담그는 절임 고추용, 자잘한 것들은 밀가루 묻혀서 말리는 부각용이다. 어중띤 놈도 다져서 국에 두어 먹는다. 버릴 게 없구나.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며 보살펴 주어야 하고, 병약하기 짝이 없어 늘 원두반 스님들을 긴장시키는 고추 농사, 그러나 그 땀이 덧없지 않아서 불순한 일기에도 잘 되었다. 올해 거둔 고추는 일천오백 근, 그것으로 일만 포기 김장을 뒤대고, 남는 것은 갈무리하게 된다. 대중의 공양거리 가운데서도 한 끼도 거를 수 없는 것이 김치이고, 값도 또한 다른 소채에 비해 비싸니 줄여 볼 수도 없는 일, 한 해 농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힘든 고추밭 일은 또 한 차례 전 대중이 다 나서서 고춧대에 남아 있는 잎까지 훑어 내야 끝이 난다.
낮 공양 후 두어 시간 학인들의 높은 웃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눈은 게으르고 손은 바지런하다'더니, 고추밭 아래 넓고 깊은 바다처럼 푸르게 자라고 있던 무가 죄 뽑히어 소쿠리에 담겨 있다. 지난번 이곳에서 고추를 딸 때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꿩, 꿩, 목청을 돋구어 우는 꿩은 보이지 않고, 울음 소리만 텅 빈 밭으로 넘어들더니, 촤르르 촤르르 가을 햇살 부서뜨리며 잠자리 날더니, 쑥부쟁이 곱게 피어, 뿌리 박고 선 진토와 저는 아주 아무 인연도 없다는 양, 푸른 꽃잎만 햇살 속에 청량하게 떠올라 있더니…. 부처님 만장해 계신 화엄 동산이었다.
도량을 둘러싼 산들은 이제 까무룩 암청색 저녁빛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남은 잎까지 훑어 따 낸 고추밭 고랑 사이, 버려진 고추 희나리만 희게 빛났다. 그 모습 가만히 지켜보다가 혜은 스님도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 이 글은 2002년 11월의 운문사 농사 울력 현황입니다. 해를 묵힌 것이기는 해도, 비구니 스님들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으리라 여기고 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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