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신군부의 쿠데타 사건이 일어난 날이라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뒤인 1985년 12월 12일은 바로 이들 신군부가 장악한 권력과 대결한 어머니들의 운동이 새롭게 결집된 날이기도 합니다.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 줄여서 〈민가협〉이라고 부르는 단체가 발족한 것이죠. 오늘은 바로 민가협 출범 20주년이 되는 날인데요. 초대 회장이자 지금은 고문을 맡고 계신 임기란 어머니 모시고 민가협이 지나온 날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 초대회장 임기란 여사입니다. 임기란 여사는 민가협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남 3녀 중 서울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박신철씨가 1984년 전두환 정권 퇴진 농성에 참가해 구속된 이 후, 미문화원 사건,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등 민주화를 요구하다가 구속된 학생들의 가족들과 뜻을 모아 이듬해인 1985년 12월 12일 민가협을 발족합니다. 임기란 여사는 초대회장으로 창립초기부터 참여해 20년동안 네 차례 상임의장을 맡았고, 현재는 민가협의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박인규 :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임기란 여사 : 안녕하세요?
박인규 : 보통 상임의장 임기란여사님이라고 하는데,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죠?
임기란 여사 : 괜찮습니다. 할머니죠. 엄격히 말하면..
박인규 : 85년도에 민가협이 출범할 때는 50대 후반의 어머니이셨는데, 민가협도 이제 성년이 됐고, 그러다 보니까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민가협이 성년이 될 때까지 열심히 활동을 하셨는데요. 20주년을 맞으면서 여러모로 느끼시는 게 많으실 것 같습니다.
임기란 여사 : 어머니들이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는 50대 중반이었는데, 어느덧 70대 후반이 훌쩍 넘었습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박인규 : 우선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 임기란 어머니께서는 민가협을 발족하는데 참여하시게 됐는지, 85년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해서 민가협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시죠?
임기란 여사 : 어머니들이기 때문에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고, 필요에 의해서.. 자식들이 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과 우리 자식은 죄가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어요. 당국에서 관계자들이 "빨갱이다, 당신의 아이들은 위험분자이다." 이렇게 할 때는 부모들이 앞이 캄캄해 지면서, 이것을 어떻게 하나..하면서 자식들이 감옥에 갔을 때에 뒷바라지나 하자..라고 했는데, 차차 재판과정이라든지, 여러 가지 부모들과의 대화에서 우리 자식은 투철한 애국심에서 참가하게 된 것을 알고 어머니들이 내 자식, 남의 자식 할 것 없이 우리 자식들을 우리 어머니들의 힘으로 구출하자는 각오가 나날이 생겼던 것입니다. 당시 저의 자식도 두 번째 구속이었는데요. 구속되고 나서 50여일 동안 면회가 안 되었지만 매일 구치소마당에서 안타깝게 면회가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럴 때 많은 각 대학의 어머니들과 함께 하면서 어머니들이, '내 자식 다 죽인다'고 아우성 하면서 여러 가지 협상 아닌 협상도 하고, 구치소 앞에 모여서 농성도 하게 되고, 우리 편에 서 있는 인권단체, 종교단체들과 의논해서 자식들이 당하고 있는 인권..지금 생각해 보면 인권이라고 했는데, 그 때 어머니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모성애에 가깝도록 뛰어 다녔기 때문에, 그것이 인권인지도 모르고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눈에 불을 켜고 쫓아 다닌 것이 어머니들의 운동에 기초가 된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그런 어머니들이 모여서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협의회를 만드셨는데, 그 당시에는 대략 몇 분 정도가 모이시고, 모이신 분들 중에 생각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임기란 여사 : 그 때는 한 단체가 아니고,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사건이라든지, 가락동에 있는 민정당사 점거 사건이라든지, 많은 구속자가 양심수가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가족들, 대학생가족협의회..이런 노동운동가족협의회, 저명한 인사 문익환목사라든지, 실제로 사회운동을 하던 민청련 같은 구속자 가족 협의회..협의회들이 합쳐져서 실천가족운동협의회라고 하면서 현판식을 하자니, 그 때 그 자리에 저는 없었지만 나중에 들어 보니, 원천봉쇄를 하고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문 앞을 몇 줄 이상으로 전경들이 막고 출범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박인규 : 올해가 20주년이 되다 보니까, 제가 알기로는 지난 12월 10일날 인권콘서트를 하셨죠? 그 이름이 '보랏빛 수건'이라고 하던데요? 그 '보랏빛 수건'이 민가협 어머니들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데, 그 '보랏빛 수건'에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까?
임기란 여사 : 네. 이 보랏빛이라는 색깔의 뜻을 대략적으로 담았고요. 그 전에 치마저고리를 보라색으로 입고, 70년대 말에 민청련이라든지, 이희호 여사라든지, 문익환 목사님의 사모님이라든지, 많은 가족분들이 보랏빛 치마저고리를 해 입고 한 것도 있지만..오랜 시간이 지나서 저희들이 할 때는 이 보라색은 탄압, 불안, 평화의 뜻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담아서 저희들이 수건을 만들어서 쓰게 된 것입니다.
박인규 : '고난 속에 희망'이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임기란 여사 : 네.
박인규 : 저도 사실은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는데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에 계신 형사 분이 저의 아버님께 오셔서 '단속 잘 해라..' 그런 말씀도 하시고 했는데, 막내아드님이시죠? 막내아드님이 데모를 하기 전에는 데모를 말리거나 그러시지는 않으셨나요?
임기란 여사 : 어리석게도 전혀 몰랐고, 저는 저대로 YWCA봉사활동을 하느라고..열심히 학교를 다니는 줄로만 알았고..첫 번째 민정당 가락동 연수원에 점거했다는 소리만..1차 구속됐을 때 처음으로 막내아들이 학생운동을 하는 걸 알았죠. 그 때는 학생운동이라고 하기 보다는, '빨갱이 됐다.'라는 당국의 선전에 너무나 불안해 했고 아들이 원망스러웠죠.
박인규 : 아들이 원망스러우셨다?
임기란 여사 : 네. '왜 이러나..공부나 열심히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그 이듬해 86년 5월달에 다시 학생들 사건에 연루돼서 일주일 동안 제 아들이 없어졌어요. 그 때는 무언가 불안하고, 없어진 학생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서울대 학생들이요. 나중에 같이 유치장에 있던 사람의 제보로 알게 됐는데, 제 아들이 남양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서대문 경찰서에 갇혀 있는 것을 알았어요. 그 때는 그것도 아주 비밀이었거든요. 고문으로 다 죽어간다는 제보를 받고 놀라서.. 그 때부터 저희 가족들이 확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을 이해하고, 우리 자식들이 왜 이렇게 당해야 하는가? 우리의 자식을 우리가 구하자..내가 자식을 구하자..그래서 나중에는 내 자식이 다 우리 자식이 되고, 아들, 딸이 남의 자식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문제의 막내 아드님은 그 뒤에 석방되셔서 지금은 생활인으로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임기란 여사 : 지금은 평범한 외국계열의 보험회사에서 근무하는 월급쟁이고요.
박인규 :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아드님이 어려운 환경에서 나오게 되면, '우리아들은 잘 되었으니까..'하면서 그런 활동을 안 하시게 될 거 같은데 그 뒤에 20년동안 계속 이 활동을 하시게 된 나름대로의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여쭤 보는 겁니다.
임기란 여사 : 제 아들은 나온 후에도 가출해서 노동 운동을 했고요. 대학도 8년만에 졸업하고, 후에 결혼도 했지만은 그 동안에 자식이 없는 사이에 민가협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또 재수감이 될 지도 모르겠고, 또 눈물을 흘리고 찾아오는 많은 어머니들이 있었어요.
박인규 : 다른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도와줘야겠다?
임기란 여사 : 네. 학생운동 차원에서 잡혀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위로하고, 법률 안내도 하고, 투쟁하는데 함께 가다 보니까 1년, 2년이 지나서 10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어머니들이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자식들이 잘 되기를 원하는 그런 어머니를 떠나서..차차 눈을, 귀를 넓게 잡아서 여러 가지 나라와 겨레와 그런 것들을 함께 생각하면서 자식들이 운동하는 곳에 함께 하면서 연대투쟁도 하게 되고 어머니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됐지요.
박인규 : 자신의 자식을 도우면서 배우신 여러 가지의 것들을 또 다른 어머니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민가협 활동을 하신 거군요?
임기란 여사 : 네.
박인규 : 마침 12월 12일이 창립 20주년이기도 하지만,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셨던 조영래 변호사께서돌아가신 지 14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민가협 활동을 하시면서, 여러 재야인사들과도 협력도 있었고 도와주신 분들도 많으실 것 같은데생각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임기란 여사 : 지금까지 거의 모두 가족 같고, 다 동지들이죠. 그리고 조영래변호사님은 젊은 나이에 참 안됐습니다만, 학생들 변호를 많이 맡아 주셨어요. 그렇게 황인철변호사님도 돌아 가시고 많은 분들이 학생들을 변호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요. 사실 자신의 영리를 따지지 않고 학생들을 위해 정의 편에 서서 도와주시는 변호사님들이 지금도 많이 계십니다. 또 문익환목사님 같은 분은 우리 민가협에 초대 회장도 하셨고, 지금 모두 말씀 드리기는 어렵지만 많은 분들과 교분이 있고, 주로 변호사님들 중에 아는 분들이 많고요. 지금도 투쟁하는 연대를 만들어서 하는 그 분들과는..하다못해 노동운동 하는 이수호씨, 이용득씨등등 노동운동을 하는 장 되시는 분들도 우리 어머니들을 참 사랑해 줍니다. 지금도 그래요.
박인규 : 김영삼 전대통령, 김대중 전대통령도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앞에서 끌어오신 정치지도자들이신데요. 그 분들과 민가협과는 연관이 있었습니까?
임기란 여사 : 양 김씨께서 주도하는 민추협에..그 곳은 어머니 300명들이 모여서 매일 회의하고 울고불고 하던 곳인데요. 그 당시 김영삼씨는 별로..엄마들이 적대시는 안했더라도..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분은 김대중씨였어요. 그 분은 자신이 양심수였었고, 사형선고까지 받으신 분이라서 그런지..우리가 교도소의 비리를 밤새 차를 타고 와서 동교동에 새벽 2시에 들어가서 애걸하다시피하면서, 빨리 아이들을 구출해야 한다, 아이들이 위험하다..하면서 폐를 끼친 적이 많습니다. 집권하고 나서도 99년도, 2000년도에 남아 있는 장기수 수십명을 2000년도에 다 비전향 장기수로 석방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6.15후에 석 달도 안 되어서 63명을 1차 송환이라고 해서 갔었죠.
박인규 : 20년동안 민가협 활동을 계속 해오시면서 여러 가지 사연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특히 기억에 남으시는 일이 있으십니까?
임기란 여사 : 대체적으로요. 저희들은 자식들이 자꾸 죽더라고요. 91년도까지..강경대까지 12명이 분신자살해서 매일 울면서 눈가가 짓무르도록..장례를 함께 하면서 우면서..아이들이 죽지 말고 싸웠으면..그런 걸로 서운했었고..명동성당 앞에서 양심수들 전원 석방하라고 외칠 때, 서울대 84학번 조석만씨도 비수를 배에 꽂으면서 구호를 외치고 죽는 것을 우리 눈으로 목격을 했다든지, 이런 많은 젊은이들이 떠날 때 너무나 슬펐고 남의 일 같지 않고 매일 울면서 쫓아 다녔습니다. 제가 처음에 회장을 할 때는 유가협, 민가협이 하나로 합해 있다가 2~3년 후에 유가협이 갈라져서 지금은 따로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 때는 어머니들이나 가족들이 매일 길가에서 최루가스를 마시면서 넘어지면서 같이 다녔죠.
박인규 : 지금 20년이 지나서 사회도 많이 민주화가 되기도 했는데, 아직도 민가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임기란 여사 : 필요를 따진다면, 지금 국가보안법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도 안 들어요. 주로 한총련 관련해서 수배를 내리면 국가보안법이 되고, 이런 분들과 강태훈선생.. 민주노동당 고문하신 석방이 안되고 노동법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람들이 몇 명 있는데, 대개는 노동하다가 시위현장에서 잡힌 분들이 많고, 철거민들이 한 30명 되고요. 농민들도 있었지만 지금 농민들은 대부분 나오셨어요. 대력 70명정도가 분포되어 있지만 그래도 악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집권자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의 엄마들은 꼭 이 법이 없어져야 한다고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양심수들이 하나 둘씩 석방 될 때는, 늘 기뻐하고 지금도 나오면 가족들이 떡을 해서 나눠먹으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박인규 : 처음엔 구속된 자녀들을 위해서 만든 모임이지만 지금은 억울하게 구속되는 사람들이 없게하기 위해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도 하시게 된 거군요?
임기란 여사 : 그렇게 된 거죠. 아픔을 함께 하고 있어요.
박인규 : 민가협이 20년이 지나면서, 민가협 어머님들이 돌봐줬던 그 아들들이 지금 많이 컸습니다. 그래서 주로 386세대라고 하는데 요즘 정치라든가,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 분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임기란 여사 : 바로 제 자식들 얘기인데 상당히 괴롭습니다. 우리가 그 때 당시 길에서 자식들과 함께 할때는 "너희들이 커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라."라고 했는데, 이번에 그 자식들이 국회 입법 하는 곳에 10명이상 되기도 했는데, 한 마디로 해서 학생시대에 비해서 함성과 판단력과 용맹이 부족한 것 같고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만, 더 잘해주기를 바라고.. 기성세대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그 사람들이 386세대라고 안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알게 모르게 역사에 오점이 남기 때문에 지금 386세대에 대한 걱정도 앞서지만 좀 더 용감하게 학생시대에 외쳤던 그 이상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인규 : 386세대 중에서 이름도 있고 권세자리에 가 있는 자식들도 있고, 또 평범하게 지내는 분도 있습니다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더 좋으십니까? 꼭 이름을 알려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더 잘사는 것 같습니까?
임기란 여사 : 우리의 자식이 양심수가 되기 전에는 어떤 엄마들이든 자식이 잘 되지 말라는..그런 부모는 없거든요. 그것이 좋은 줄 알았는데 이 많은 국민들 속에 지도자만 되는 것이 최상의 목표가 아니고, 사람의 권리를 옳게 행사할 수 있는 평범한 국민..보통 민중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좋다고 생각하고요. 지금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옳게 지도자 자격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절대로 군인들처럼 독재를 하거나, 박정희대통령처럼 얼마전에 발표가 있었던 인혁당처럼 소름끼치는..자신의 직권연장을 위해서 파리목숨처럼 거짓으로 국민들을 속여서 18시간만에 사형을 시키는 이런 지도자는 진짜 태어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민가협을 하시기 전에도 YWCA에서 활동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래도 민가협 활동을 하시면서 자식들의 어려움과 부딪치다 보면 민가협을 하시기 전에 알던 세상과 민가협을 하시고 나서 알게 되신 세상과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임기란 여사 : 많이 있죠. 편안하지 않는 세상, 억울한 세상,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분들, 끝까지 우리 힘으로 도와줘서 이 분들을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우리가 노력을 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어요. 솔직한 말로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박인규 : 요즘은 상당히 민주화가 되어서 데모를 하다가 구속되는 대학생들은 거의 없다시피 됐거든요. 원래 민가협이라는 곳이 데모를 하다가 구속당한 자식들을 위해서 모이신 건데 앞으로도 민가협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활동을 해야 하겠다는..그런 생각도 많이 하실 거 같은데요?
임기란 여사 : 저만 70대 중반이 된 것은 아니고, 똑같이 나이를 먹어 가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 단체는 일종의 기동부대와 비슷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20년 세월동안 민주화운동 역사 장막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젊은 활동가들이 인권 사각지대에 소외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장애우까지 여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체계적인 이런 인권여성단체라고 해도 좋고요. 이런 단체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인규 : 자기 자식이 아니라 모든 어려운 사람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하시고 싶다는 그런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약간은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자제분들이 어떻게 되시죠?
임기란 여사 : 3녀 2남입니다. 딸들을 먼저 낳았기 때문에요.
박인규 : 다들 요즘에는 행복하게 사시죠?
임기란 여사 : 그런대로 자기 몫들을 하고 있지만 항상 바쁘다고 합니다.
박인규 : 사위 분 중에는 유명하신 분도 한 분 계시다고 하던데요?(웃음)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웃음)
임기란 여사 : (웃음) 배철수씨가 우리 셋째 사위입니다. (웃음)
박인규 : 예전에 활주로를 하시고 요즘에는 DJ도 하시는 분 말씀이신가요?
박인규 : 네. 7080프로그램도 하고 있고, 음악캠프도 오랫동안 해 오고 있습니다.
박인규 : 이제 우리 손자들이 예전에 민가협 활동을 시작하셨을 때의 그 나이들이 됐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손자들이 젊었을 때와 자녀분들이 젊었을 때와 다른 것 같으세요?
임기란 여사 : 사실은 우리를 어머니라고 하지 말고, 할머니라고 해야 하는 연령인데요. 그래도 우리가 서울대 앞에서 장터를 할 때마다 "어머니, 뭐 주세요." 할 때는 귀엽기도 하고요. 순진하게 "민가협이 뭡니까? 뭐하는 곳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면서 격세지감도 느끼고요.
박인규 : 지금 학생들은 민가협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 군요?
임기란 여사 : 네. 민주화 운동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할 수 없죠. 20년 세월이면 이 급변하는 세상에 얼마나 많이 바뀌겠어요.
박인규 : 어떻게 생각해 보면,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필요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수도 있겠죠?
임기란 여사 : 그렇죠.
박인규 : 이제 연세도 70대 후반이 되셨고 건강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민가협을 위해서 활동을 계속 하실 생각이십니까?
임기란 여사 : 글쎄요. 제가 필요하다면 인원도 되어 드리고..머릿수라고 하거든요. 우리가..많이 참가하는 것을요. 머릿수라도 해 주고 싶은데 지금 아픈 곳이 많이 생겼습니다. 관절도 좋지 않고요. 재작년에는 척추수술도 해서요. 지금도 건강하다면 간판이 붙어 있는 한 함께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어머니께서는 그 동안 활동하신 것만으로도 앞으로 안 하신다고 해도 충분히 하신 것 같아요. 건강도 생각하시는 것이 자녀분들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임기란 여사 : 감사합니다.(웃음)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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