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확정 판결난지 18시간 만에 8명을 전격 사형시킨 인혁당 사건, '사법살인'이라고까지 불렸던 이 사건의 배후가 드러났습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지난 수요일 1964년의 인혁당 사건과 1974년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유신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국가정보원이 자신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수사가 자행됐음을 인정한 것이고 굳게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을 스스로 연 셈입니다.
이를 보며 '사필귀정'이라는 말과 함께 '만시지탄' 떠올리게 되는데요.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은 어떻게 조작됐는지, 오늘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당시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가 피고와 함께 구속되었던 변호사 한 분을 모시고 말씀을 나눠보려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유신시대의 대표적 변호사로 알려진 강신옥 변호사입니다. 강신옥 변호사는 1936년 경북 영주생으로 경북고를 졸업했습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1958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1959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고 서울지법 판사를 일년 간 역임한 뒤, 1963년 변호사를 개업 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변호했고 1979년 김재규씨가 '10.26 사건'으로 사형당하기 전까지 변론를 맡았습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아 정계에 입문, 1988년 13대 서울 마포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바 있습니다. 현재 강신옥법률사무소의 대표 변호사를 맡고 있습니다.
박인규 : 변호사님, 안녕하십니까?
강신옥 변호사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31년만에 사건의 실체라고 할까요? 배후가 밝혀졌는데, 당시 변호까지 맡으셨다가 구속까지 되셨는데 만감이 교차하실 것 같은데요? 어떠십니까?
강신옥 변호사 : 네..고맙습니다.
박인규 : 지난 7일날 국가정보원과거사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은 후에, 유인태의원이 간단한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너무 오래 걸렸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가.." 그러면서 눈물까지 흘리셨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강신옥 변호사 :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 당한 79년 그 후에 예를 들면, 서울에 민주화 정권이 들어섰다면 조금 빨라졌을 수도 있는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왔죠. 후에 노태우 정권이 들어왔죠. 그 후에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고, 사실 그 때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데도 역시 그 당시 분위기만 해도 그 때 정보부가 한 일, 과거를 함부로 거론하지 말자라는 분위기 때문에 하지 못했죠. 그러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발표가 났는데 때가 늦었죠.
박인규 : 발표가 있었던 그 날, 마침 서울 인사동에서 엠네스티 한국지부에서 '한국의 양심수'라는 사진전시회를 그 날 열었습니다. 마침 제가 그 자리에 갔다가 유인태의원을 잠깐 뵈었어요. 그 분도 양심수분들 중에 한 분이기 때문에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축하드린다고 했더니 본인 말씀이, "자신들 보다도, 인혁당사건 관계자분들에 대해서 다행이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여덟 분이 그 당시에 돌아가신 게 아닙니까?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이런 분들인데.. 그 사건의 관계자이시면서 상당히 마음의 짐이 컸던 것 같아요?
강신옥 변호사 : 그렇죠. 그 사건 관계자들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예를 잃은 부분도 있는데..인혁당 희생자들도 있으니까요
박인규 : 64년에 인혁당 사건이 한 번 있었고, 74년에는 인혁당 재연사건이라고 해서 이 분들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정했다?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설명을 해 주시죠?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인혁당 사건이 10년만에 다시 거론이 되는지요?
강신옥 변호사 : 10년전에 64년도에는 인혁당 문제를 거론했다가 검사들이 수사를 해 보고는, 이 사건은 기소할 수가 없다고 거부했어요. 그 당시에 이용원부장검사가 그 당시의 사건을 맡았는데, 이용원부장도 사표를 냈는데, 그것도 무시하면서 말하자면 강제로 기소하려 했다가 모두 형을 받지 못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 때부터 문제가 됐었는데, 그 때 그 일들을 계속 해 왔다는 것이 전제이고, 이 사람들이 인민혁명당을 만들어서 데모를 한 학생들의 배후조정을 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그 때 계속해서 학생들의 저항이 심해지니까 이것을 근본적으로..말하자면 극약을 써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그래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그 팀들과 청와대와 교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 4월 3일날 민청학련 대집회가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이번 차지에 뿌리를 뽑자.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인혁당..예전에 말하자면 수사하다가 실패한 사람들..그 사람들이 아직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사람들 중의 마침 여정남씨가 경상북도 대구에 있는 경북대 출신이라고요. 이 친구를 매개를 해서 인혁당 사람들과 말하자면 대구 쪽 사람들이 많으니까..만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인혁당의 간부들이 여정남을 통해서 데모를 조정한 것이다 라는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여정남 피고인은 인혁당이면서도 민청학련 사건의 피고가 됐다고요. 내가 변호한 피고인이 되고요. 그러니까 다른 민청학련 사람들 모두 다 한 10개월 뒤에 석방됐잖아요. 여정남씨만 빼고..그 부분만 계속 올라가서..'여정남 사형'..인혁당 사건과 같이 됐다고..그러니까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의 재판을 따로 했다고요. 그래서 여정남씨를 내가 변호하게 된 것도 사실은 원래는 내가 여정남씨의 변호인이 아닌데 유인태씨나, 이철씨나, 나병식씨, 김지환씨 등을 변호하고 있었는데 여정남씨에게는 국선 변호사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저의 대학교 선생님을 하시던 분이 국선변호사였어요. 그래서 제가 "사건이 똑같으니까. 선생님 물러 나십시요. 제가 맡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려서, 제가 자진해서 여정남씨를 변호했어요. 그런데 묘한 것은, 여정남을 중간에 끼워서 인혁당과의 고리를 만든 것입니다. 아주 묘하게 된 거죠. 인혁당 재판은 우리는 관여 못했어요. 다른 사람이 변호를 했지..여정남씨가 중간에 끼었으니까 결국은 인혁당사건도 우리가 관여를 하게 된 것이죠.
박인규 : 그 당시에 재판에서 숱한 명언이라고 할까요? 발언들이 많이 나왔는데 김병곤씨께서는 "사형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강변호사님께서는 "차라리 내가 저 피고인석에 앉고 싶다. 이런 재판은 사법살인이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구속까지 되시고 옥고를 치르셨는데 그 당시 재판이 어땠습니까? 분위기나 그런 것들이?
강신옥 변호사 : 재판이 완전히 군사법정이니까 헌병들이 서 있고, 피고인 가족도 두 명 정도 들어오게 되어 있고, 옆에도 물론 못 서 있고, 기록도 못하게 되어 있고 아주 삼엄하죠. 그것도 중앙정보부가 배후에 있으니까 군법회의의 군인 심판관도 있고, 판사로서 온 사람들도 있고, 검사로서 온 사람들도 있지만 뒤에서 쪽지가 들어오고 말하자면 재판이 아니고 일종의 쇼죠. "이것은 쇼지 재판이 아니다."라고 말도 한 것이죠.
박인규 : 강신옥변호사의 그 당시 구속 사유는 법정 모욕죄입니까?
강신옥 변호사 : 법정 모욕에 긴급조치 위반입니다.
박인규 : 어떻게 해서 긴급조치 위반이 되는 거죠?
강신옥 변호사 : 긴급조치를 위반한 피고인들을 변호하면서 긴급조치를 비방했다는 거죠.
박인규 : 비방했다? 비방만 해도 안 된다?
강신옥 변호사 : 네. 안 된다는 거죠. 20세기 중세와 비슷한 사건이죠.
박인규 : 이번에 국정위과거사가 발표를 하면서 그 당시 "인혁당 관련 분들의 사형집행을 박정희대통령이 지시했다는 문서나 증언은 없었지만 여러 정황과 논리 상 청와대 선에서 처형 방침을 정한 것으로 판단했다." 말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이 사실상 지시한 것이 아니냐? 이런 판단을 내렸는데 그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들을 하셨나 봐요?
강신옥 변호사 : 물론 심지어는 저의 구속도 박정희 대통령이 "저런 변호사를 놓아두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른다."하면서 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러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청와대에서 야비하게 지시했다기 보다 서로 암암리에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주도했으니까.. 또 그 때 분위기는 정부가 밀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강하게 나간 거죠. 큰 실수를 한 거죠.
박인규 : 지금 그 사건이 정권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는 게 밝혀지기는 했지만 아직 재판 자체는 남아 있거든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앞에 인혁당 사건이 이미 10년전에 별 일이 아니라고 해서 흐지부지된 사건인데, 다시 이것이 대법원에서까지 확정이 됐단 말이죠. 그 당시 재판을 받으신 분들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제대로 이 분들이 소신있게 하신 것인지 조사를 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요?
강신옥 변호사 : 물론 지금은 이렇습니다. 그 당시의 제도가 검찰관, 군 검사 앞에서 한 진술, 검사가 조사해서 자백한 경우들은 증거로 쓸 수 있게 되어 있단 말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죠. 검사 앞에서는 고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전제하니까..
박인규 : 진술이 증언이 된다?
강신옥 변호사 : 사형당한 분들이 모두 여덟 분 아닙니까? 사형당한 분들 모두가 엄한 고문에 의해서 자백을 모두 했다고요. 형식적으로는..그런데 그 자백이 검사 앞에서 자유롭게 자백한 것이 아니라 그 때 분위기는 여기가 검사 앞인지, 중앙정보부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많이 때리고 자백하면 검사가 조서를 작성하는 것도 있고 말이죠. 검사 앞에서 자백한 것을 기억도 못하는데, 기록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군사재판에서는 형식적으로는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이 서로서로 자백했으니까..그런 엄한 조작이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것을 형식적으로 검사 앞에서 자백이다..검사 앞인지, 중앙정보부 앞인지 모를 정도예요. 검사가 있을 때도 정보부 직원이 옆에 있고 이런 식이죠.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말하자면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는 형식적인 증거는 있어요. 그런데 그 형식적인 증거가 고문에 의해서 조작됐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말도 안 되는데, 법정에서 모두 자백했어요. 고문에 의해서 난 자백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계속 그랬다고요. 물론 우리가 면회할 때도 마찬가지이고..형사기록에는 형식적으로 검사 앞에서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그것을 판검사들이 마치 형식적으로는 증거가 있지 않느냐..대부분 판사들도 기록에 보니까 자백 다 되어 있는데..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의 수사분위기를 거의 알면서 판사들이 고문이나 이런 것들을 그냥 무시한 거죠.
박인규 : 대법원에서 사형판결 확정이 난다고 하더라도, 재심도 있고 상당히 몇 년에 걸려서 사형이 집행되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다음날 새벽에 사형이 됐다는 건 참..
강신옥 변호사 : 그것도 자신들이 꿀려서 그런거지..결국은 쐐기를 박겠다 라는 박정희대통령의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보인 건데, 이건 말도 안되죠. 보통은 재심청구가 바로 들어 갑니다. 사형선고를 하자마자 변호사들이 의식적으로 재심청구서를 가지고 가요.
박인규 : 그 날도 들어갔겠네요?
강신옥 변호사 : 물론 들어갔죠. 들어가면 그 것이 심의가 되어서 일 년 뒤에 재심을 해 본다든지, 다시 검토를 한다든지 해야 하는 건데 20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죠.
박인규 : 일단 희생당하신 여덟 분의 가족분들께서는, 이것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조금의 한이 풀어지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재심을 상당히 원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 어디까지 진행이 되고 있습니까?
강신옥 변호사 : 현재는 재심청구서는 이미 제출되어 있고, 재판부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심이 개시된다고 하면 그 때부터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고 하는데, 현재는 법원에서 재심개시 결정이 안 나오고..
박인규 : 현재 법으로는 재심이 되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강신옥 변호사 : 그렇죠. 현재의 법을 보면, 그 사건의 증거가 됐던 서류가 위조라는 것이 판결에서 확정이되어야 한다. 그리고 증언이 위증했다는 것이 판결을 받아서 확정 판결이 되어야 한다..
박인규 : 그럼 그것을 따로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까?
강신옥 변호사 : 그렇죠. 위증했다는 것을 찾아내서..있을 수 없죠. 이런 경우는..그래서 사실은 형사소송법을 개정해야겠다는 움직임이 있는데 현재 이러한 현저한 사실..예전에 수사했던 기관의 후신이 조작이다..라는 이 현저한 사실은 형사법에 없더라도 특별한 경우를 생각해서 할 수 있죠.
박인규 : 2002년도에 재심을 신청했는데 3년째 아직 개시가 안 되고 있는데, 잘 하면 내년에도 할 수가 있겠네요?
강신옥 변호사 : 네.
박인규 : 어떻게 보십니까? 앞으로 이 분들의 명예회복이라든가..
강신옥 변호사 : 법적 절차에 의해서 재심 개시가 되고, 무죄확정 판결이 되어야 그 다음에 손해배상 같은 것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절차는 밟아야죠.
박인규 : 그런 분들의 대한 사회의 보상이랄까? 대접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보십니까?
강신옥 변호사 : 형사 보상 차원도 있고 그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생명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죠.
박인규 : 앞으로 재심까지 잘 되어서 억울했던 부분들이 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강신옥 변호사 : 그렇게 될 겁니다.
박인규 : 강 변호사께서는 이미 대학 재학 중에 이른바 행정사법 양과를 이수하셨고, 대략 40여년 이상 법조인으로 활동을 하셨는데, 60년대 초에 판사를 하셨으면 굉장히 오래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불과 일 년 만에 그만두시고, 변호사로 나오셨는데 혹시 특별한 뜻이 있으셨던 건지 궁금합니다?
강신옥 변호사 : 결국 그 당시에 젊은 법관으로서는 평생을 법원에 보낸다는 마음으로 법원에 갔는데.. 판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이상을 가지고 갔었죠. 그 당시 학생들의 데모문제도 있고 해서 젊은 판사들이 영장을 기각한다..라고 하는 것을 청와대에서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었습니다.
박인규 : 판사로 임명되신 것이 61년이시죠?
강신옥 변호사 : 네. 젊은 법관들을 손을 봐야겠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제가 하루는 출근을 했더니, 저는 경주지원으로 발령이 나고, 이세중 변호사는 순천지원으로 발령을 냈어요. 핑계는 있어요. 그러나 핑계는 구실일 뿐이고, 젊은 법관 두 명을 갑자기 지방으로 쫓아내는..그 때 제 기분으로는 "이 사법부가 독립이 되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와 보니, 청와대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서 대법원장이 젊은 두 사람을 지방으로 쫓아내 버린다?" 저는 지방으로 간다는 것에는 불만이 없었어요. 하지만 정규인사에 간다든지..
박인규 : 딱 두 분만 선택해서요?
강신옥 변호사 : 네. 왜 그랬냐고 하면서 저희들이 사표를 내니까..놀라죠. 선배법관들이 와서..심지어는 한승수 고등법원고등원장을 하던 분이 저를 특별히 불러서 말씀도 하시고, 다른 분들도 조금만 참고 내려가 있으면 된다..그러나 나의 정의감은 '이런 식으로 사법부를 건드린다면 이건 가치가 없다. 저항을 해 줘야지..자꾸 순응하게 되면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냐..' 저는 적어도 저의 인사에 대해서 그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저항의 의미로 사표를 냈습니다.
박인규 : 말씀을 듣고 보니까 박정희 정권이 초기부터 말하자면 사법부를 길들이기 위한 부분들이 있었군요?
강신옥 변호사 : 저도 보니까..자신도 군법회의를 진행해 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군법회의 법무관들이나 하는사람들은 사형선고를 해도 사단장이 빼내면 그만이예요. 그런식으로 사법부를 움직여 왔는데, 와서 보니 다르니까 이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당시 사소한 것들을 대법원장이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그런데 그 분이 따라가니까 그러다가 결국은 인혁당까지 간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 말하자면 그것들에 동조하면서 청와대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법관으로서 출세를 하고, 판사가 되고..이런 사람들이 인혁당 판결을 한 겁니다.
박인규 : 말만 삼권분립이지, 삼권분립이 아니군요?
강신옥 변호사 : 아니죠.
박인규 : 지난 가을에 이용훈 대법원장이 새로 취임하시면서, "그 동안 사법부가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 가슴 깊이 반성한다"고 하셔서 말하자면 사법부의 과거사를 나름대로 규명을 해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잘 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강신옥 변호사 : 잘 되고 있다기 보다 사법부의 과거를 밝힌다고 하는 것은, 역시 제가 보기에는 잘못된 판결이나 재심 같은 것..결국 법적인 재심사유를 완화해서 구해야지..일반적인 모든 재판 전부를 들춰내고..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박인규 : 오히려 재심 조건을 완화시켜서 억울한 사람들은 재심을 하는 것이 더 빠르다?
강신옥 변호사 : 입법적으로 해야지..정치적인 의미 같은 발언은 사실 의미는 없는 것이고, 실제로 유신말기까지의 근무했던 법관들의 판결 내용을 하나하나 따진다면 부끄러운 것이 한 두개가 아니죠. 지금 모두 들춰내서..지금 분위기는 그래요. 그 당시의 그런 불행한 사건들을 맡았기 때문에 그런 결론들이 나오지..맡지 않았던 사람들도 만약에 민사재판들만 했던 사람들도 참여하지 않아서 그렇지..그런데 우연히 민사재판만 하다가 공안재판을 안한 판사들도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큰 소리 칠 일은 아니고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참 비극이죠.
박인규 : 최근에 사법개혁 문제도 많이 나오고, 저희도 한승헌 변호사님을 모시고 말씀도 들어봤는데,사법개혁방향이 어떤 것으로, 근본방향이랄까? 어떻게 된다고 보십니까?
강신옥 변호사 : 사법개혁도 요새 자꾸 말들을 많이 하면서, 배심제라든지 그런 것들은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시 법관들의 정신입니다. 법관들의 스스로의 독립을 지켰던 결의, 행동, 이런 것들이지 다른 것이 없어요. 검사들도 마찬가지이고. 우선은 청렴해야 하고..지금 사법권이 독립된다고 하면서, 사법권 독립속에 숨어서 부패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 멋대로 부패해서 돈을 받고 할 수도 있고..사실 그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박인규 : 61년부터 63년까지 45년간 법조인 활동을 하시면서, 그 중에서 40년 이상을 변호사로 생활하셨기 때문에 항상 판사와 상대를 하셨죠? 많이들 아직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사법부가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강신옥 변호사 : 많이 좋아졌죠. 예전에 비해 좋아졌다고 하는 것은, 하지만 예전은 오히려 법관들이 기개가 있었다고..그러나 지금은 기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같은 것은 많이 들어 있지만 예전과 같은 기개는 없어요.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거에요. 출세하려고 하면 친정부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그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고, 그래서 좋은 자리에 옮기고..그러면서 관료가 무슨 승급 되듯이 법관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판사들의 기개가 적어지고 하나의 사무원 비슷하게 되고 법관으로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박인규 : 약간은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검찰수사권을 가지고 경찰과 검찰이 서로 국민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수사권 문제가 경찰이 가지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검찰이 독점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웃음)
강신옥 변호사 : 검찰이 독점을 해서 잘 해왔으면 괜찮지요. 검찰도 독점하면서 경찰의 권한만 자꾸 낮추면서 홀대하게 되고..이런 문제들이 생기는데 현재는 분위기가 우선 경찰의 수가 더 많고 또 청와대에서도 그런 눈치를 보이고..
박인규 : 힘 겨루기..? 검찰이 잘 해왔으면 그런 말들이 없었을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 : 그럼요.
박인규 : 한 때는 국회위원도 하셨고, 정치를 해 보시니까 어떠셨습니까? 법조계 생활과는?
강신옥 변호사 : 정치를 하면, '그런 더러운 곳에 왜 가느냐..백로가 까마귀 싸우는 곳에 왜 가느냐..너도 까마귀 된다.' 이런 식으로 주위의 친구들이 저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도 했지만, 아무도 안 한다면 누가 하느냐..이러면서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국가를 생각하는 사람, 다음 대통령을 생각하는 사람, 당선되자 마자 다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제가 가 본 느낌은요. 세상이 정치꾼들이 모인 것이 아니냐..이러면서 그런 행태에 어울리지 못하면 외톨이가 되요. 말하자면 저 혼자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른 소리를 하게 되면, 결국은 김영삼씨 같은 경우도 처음에 좋아하다가..공천을 주지 않고 결국은 무소속도 출마를 해 봤다고요. 안되더라고요.(웃음)
박인규 : 그럼 정치는 또?
강신옥 변호사 : 나이도 있고요.(웃음) 하지 않을겁니다.
박인규 : 인권변호사로 40년동안 해 오셨지만 앞으로도 계속 우리 나라의 법조발전이랄까요? 인권운동을위해서 계속 일 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 드립니다.
강신옥 변호사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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