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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트 가슴에 샤만의 댕기가 펄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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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랴트 가슴에 샤만의 댕기가 펄럭이다

김봉준의 '유라시아 문화기행' 〈8〉

뗀유리 언덕에서 8월 4일 아침 9시에 떠나 380km를 달려서 치타시에 도착했습니다. 7월 22일 부산을 떠난 지 14일 만에 4,290km를 달려 치타시에 도착했습니다. 하루 평균 약 300km를 주행했습니다. 치타시 길 중에서 약 3분의 2는 비포장도로로 달린 셈입니다.

그동안 10대의 차가 펑크가 났습니다. 온 로드 바퀴로 오프 로드를 달렸으니 펑크가 더 많았습니다. 이제 치타 시내 120키로 지점을 앞두고 연해주 수준은 돼보이는 포장도로가 이어집니다. 내일은 우리 차를 치타 시내에 놓고 관광버스로 이동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나도 게으름을 피우며 놀면서 가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치타주는 건조한 스텝지역입니다. 하바에서 마고차를 지나 체르니셉스크까지 가는 동안 볼 수 없었던 바위산들이, 체르니 산을 넘으니 보입니다. 여기부터는 초지, 즉 스텝지역입니다. 동아시아의 몬순기후대도 벗어나 대륙성 기후를 실감합니다. 우리가 왔던 동쪽지역과 다른 땅입니다. 동쪽보다 숲은 점점 적고 초지는 더 많습니다. 겨울은 더 춥고 여름은 더 건조할 겁니다. 그만큼 살기 척박할 겁니다. 그래도 이런 스텝지역이 삶의 터가 될 때에는 먹고 살 만한 방식이 나름대로 있을 겁니다. 짐작하건대, 소, 양, 말 등 가축과 곳곳에 무수히 나타나는 크고 작은 호수 등 수자원이 있어 살아갈 겁니다.

8월 4일 한창 여름인데 이곳은 저녁이 서늘합니다."6월이면 아직 여름이 아니고 8월이면 이미 여름이 아니다."는 말을 여기서 합니다. 그만큼 겨울도 긴 지역입니다. 그래서 곡식이나 과일나무는 거의 안 되는 곳입니다. 일찍부터 동물을 잡아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자연 환경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동물을 쫓아다니며 사는 유목생활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자연환경 때문입니다. 동물숭배사상이나 태양빛을 숭상하는 문화적 특징도 자연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지역이 다르면 삶의 양식이 다르고 문화가 다릅니다.

치타 파나마시티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나니 10시에 치타주 교통경찰국장이 왔습니다. 버스와 안내인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물론 관광차와 안내인은 유료입니다. 전문안내인이 들려주는 치타주에 관한 정보를 들으며 우리는 오랜만에 편한 관광을 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적으며 지나가는 관광, 정신 차리지 않으면 건성으로 지나치기 쉽습니다.

사진1.치타 시내 전경

치타주는 인구는 123만명(부랴트인 4.8%), 그중 37만이 치타시에 삽니다. 치타 시민 중 9만명은 부랴트인. 아가부랴트 자치구가 따로 있습니다. 한국의 약 4.4배 면적, 동으로는 아무르주, 남동으로는 중국, 남서로는 몽골, 서로는 부랴트 자치공화국, 북으로는 사하공화국과 접경하고 있습니다. 치타지역(자바이칼)은 13세기 징기스칸 제국에 예속됩니다. 17세기 다시 러시아 왕국, 20세기 초에는 독립운동도 물거품이 되고 소련에 복속됩니다. 브랴트는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린 민족입니다.

구릉과 스텝의 지형, 겨울에는 영하 25도까지 내려가고 여름에는 20도 날씨의 혹심한 대륙성기후입니다. 금광 철광, 탄광 등 광업과 젖소 목축업이 성합니다. 지도에도 선명하게 호수 5개가 큰 구슬처럼 늘어져 있습니다. 몽고와 중국 접경지역에는 거대한 호수 둘이 나란히 줄지어 있습니다. 준도리 바른도리, 부랴트어로 왼쪽 오른쪽 호수라는 뜻이랍니다. 치타시에서 보면 오른쪽입니다. 우리말 바른 손과 같습니다. 바위산과 초지와 산림과 호수가 많아 천혜의 관광지입니다.

***치타에서 첫 샤만의 댕기를 보다**

거리로 버스투어를 하면서 레닌 광장, 병원, 학교, 극장, 성당, 인고다강을 건너 전망대 약수터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위장병에 특효라는 약수는 치타 시민에게 무척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결혼을 하면 의례 이곳에서 성수를 마시고 갑니다. 그 샘터 위에 러시아정교 사원을 지었습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예배소입니다. 원래는 샤만의 성지인데 정교사원을 지었습니다.

샤먼의 흔적은 10미터 뒤 신목의 댕기에 남아 있습니다. 작은 버드나무에 샤만의 댕기가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색색가지 천을 매단 신목인데, 이곳에서는 아직도 샤만이 일년에 한번씩 의례를 치른답니다. 동시베리아 구간 여행 중 처음 만난 샤만의 댕기입니다. 박물관에서 말고 생활 현장에서 만난 첫 샤만의 나무입니다. 반가워서 두 손 모아 손빔을 했습니다. 예전부터 댕기는 자신의 옷을 찢어 매달았습니다. 신의 나무에게 자신과의 영혼을 소통시키는 것입니다. 지금도 부랴트의 샤만이 신령을 받을 때 나무를 돌면서 춤을 춘다고 합니다. 우리 전통인 정월 초에 나무 주위를 돌며 풍물을 치는 당산굿과 같습니다.

샤만은 특별히 예배소를 짓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에 영혼이 깃들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지은 성소가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성소와 세속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랜 유목의 문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머무는 처처가 모두 성스러운 어머니 대지입니다. 이런 세계관은 동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인디안 문화에도 면면히 흐릅니다.

산을 내려오며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들렀습니다. 치타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입니다. 작은 정교 성당 한가운데는 알렉산드리아 상이 걸려 있습니다. 칼을 찬 러시아 왕자. 13세기 징기스칸 군대에 체포되어 치타주까지 끌려 와서 죽임을 당했다는 러시아의 왕자랍니다. 이것을 슬라브인들은 종교적 순교라고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서로 침략을 주고받은 셈인데 침략자가 자기 합리화를 위해 시민적 계몽으로 세운 것 같습니다. 치타시가 온전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 중앙에서 소련 사회주의 때도 건재했다니 그것도 모순입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데 국가적으로 유리한 상징이라면 이용합니다. 결혼한 쌍들이 차를 타고 계속 들어옵니다. 우리는 결혼기념사진을 찍는 장소가 결혼식장과 신혼여행지뿐인데, 역사적 성지가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는 백범이나 안중근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신혼부부가 별로 없습니다. 대체로 그 지역의 시민이 중요시하는 상징기념물을 보면 시민의식의 일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원입구에서는 청년들이 길목에 끈을 가로질러 놓고 서있습니다. 통과료를 뜯어냅니다. 몽골계통의 황인종입니다. 토착민의 텃세가 통과의례처럼 변했습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치타에서 러시아가 일본군과 전쟁을 치렀답니다. 놀랍게도 일본군이 내륙 깊숙이 침략해 온 것입니다. 참 겁 없는 나라입니다. 사방팔방으로 영토확장의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동아시아 내륙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치타 시민은 일본 침략군을 막아낸 전쟁을 큰 자랑으로 여깁니다. 부랴트족의 입장에서 보면 두 제국 간에 식민지 쟁탈전쟁을 자기들 땅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의 6·25 전쟁이 미·소·중·일 강국들의 대리전 양상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모든 전쟁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침략전쟁은 위악을 가리는 위선의 극치입니다.

종족문화의 특색들은 역시 박물관에서도 극명합니다. 부랴트와 에벤키의 토착 샤만문화와 티베트에서 온 라마교문화와 이후 들어온 러시아정교문화가 지금도 공존하는 접점이 이곳 치타입니다. 한국은 이쪽보다 더 심하겠지요. 우리는 세계 종교백화점을 방불케 합니다. 에벤키의 줌(이동식 집)에서 멈췄습니다. 줌 안에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불을 피워 놓았고 필요한 가재도구와 실을 담아 놓는 함, 음식 저장 함, 그릇, 주전자 등이 있습니다. 이동이 간편한 최소 규모의 살림살이입니다. 컴컴한 시베리아 숲에서 아이를 안고 사냥 나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낙이 앉아 있습니다. 불빛처럼 꺼지지 않고 따듯한 유목족의 모성이 느껴집니다. 이들이 불을 신성하게 생각하며 여신에 비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솟대를 다섯 개 줄지어 세워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왜 새를 세웠을까? 우리 솟대와 모양은 같으나 또 다른 기능이 있답니다. 이 나무새를 세워놓고 새소리를 내면 새들이 바보처럼 날아 와 앉는데 이 때 새를 잡는다고 합니다. 솟대는 사냥의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솟대는 원래 사냥과 제의에 같이 쓰이는 다목적용인가? 그렇습니다. 고대 유목문화의 특징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사냥 행위나 생존에 감사하는 제사행위나 신성한 의례로 본래 하나였습니다. 부랴트 샤먼 마네킹에는 주렁주렁 정령의 댕기를 매달았습니다. 땅의 정령들 주렁주렁 매단 흑샤만 같습니다. 머리에는 뿔, 이마에는 새, 가슴에는 명두, 등에는 뭍짐승들, 쇠붙이와 나무와 헝겊 등의 재료로 만든 이 옷은 무려 30kg이나 된답니다.

2. 새를잡는 솟대- 치타박물관

치타주 다음으로 서쪽으로 붙은 브랴티야공화국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 서쪽으로 투바 공화국, 다음 서쪽으로 하카시야 공화국, 알타이주, 알타이자치공화국이 나옵니다. 모두 동아시아족의 발원지에 해당합니다. 알타이·바이칼 고대문명이고 몽골리안의 후예들이 살았던 나라이며 토속신앙 샤마니즘과 라마교의 문화권인 지역입니다. 아직 불씨가 사라지지 않은 동아시아의 혼이 깃든 곳입니다.

우리가 이들의 문화를 주목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 고대유목문화권은 잊혀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서구인의 관점에서 연구한 샤마니즘은 오리엔탈리즘의 한계가 있습니다. 동북아의 고대유목족 중에서 오늘날 변변한 나라로 살아남은 곳은 우리와 몽고밖에는 없습니다.(물론 우리민족이 순수한 북방계 유목민족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근대적 국가환경에서 주권 없이 종족의 문화가 온전히 유지발전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치타주를 지나 부랴티야 공화국 수도 울란우데 가는 길은 볕이 따듯합니다. 부랴트 공화국으로 넘어가니 집들의 장식이 조금 더 화려해지고 집들이 번듯합니다. 라마교건축 문양들이 보입니다. 들판에서 일광욕하는 주부들을 보았습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들판에서 모두 거의 알몸으로 썬탠을 하고 있습니다. 손을 흔들어주니 웃으며 답합니다. 따듯한 여름볕을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기적 같이 생존한 동북아시아 전통문화**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울란우데에 내려서 거리를 보니 도시 사람의 절반이 황인종들입니다. 지금까지 온 어느 주를 보아도 황인종은 소수족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낯빛을 지천으로 보니 괜히 반갑습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황인종이 몇 %나 됩니까?"

"브랴트족이 울란우데에 절반은 산다. 소수종족으로 에벤키족은 부랴티아 외곽지역에서 1,500명 정도 산다."

"부랴트는 무엇을 믿습니까, 종교는?"

"샤만 40%, 라마교 60%"

"라마 사원은 어디 있지요?"

"지금 그곳부터 간다."

인구는 101만 정도, 바이칼 호수 동남쪽으로 길게 위치합니다. 여기도 13세기에 징기스칸에 의해 예속됩니다. 서쪽으로 가면 이루쿠츠크주로 우리의 종착점이 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산악지대로 농사가 힘든 지역이고 목축과 광산, 시베리아 동서를 잇는 교통 가교지역입니다. 수도는 울란우데로 인구는 37만, 최근 모스크바 등 대도시로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3. 동아시아족 부랴트의 젊은 여인들

8월 7일, 울란우데 여름 아침은 선선합니다. 안내자 고담 유리는 부랴트 30대 청년입니다. 영어로 안내하는 인텔리, 부랴트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가 더 솔깃합니다. 부랴트족은 징기스칸의 어머니족이랍니다. 울란우데는 붉은 강이란 뜻이랍니다. 붉은색은 부랴트족이 가장 좋아하는 색입니다. 빛의 색, 생명의 피를 상징합니다. 울란우데를 흐르는 셀랭가 강은 수심이 깊은 강으로 도시 중심을 흐릅니다. 강가에는 홍수가 나면 잠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빈민촌을 이루었습니다.

울란우데, 부랴트 자치주청 앞 광장에는 송아지를 든 여인 동상이 서 있습니다. 풍요와 생산의 여신상입니다. 흰구름에 대한 전설도 들었습니다. 몽고제국으로 시집 간 공주가 백마를 타고 달아나 고향으로 돌아오다 죽었는데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흰 구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랴트족은 따뜻한 정이 많고 특히 손님에게 친절하답니다. 먼 곳에서 고생하며 온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전통이랍니다.

현지인들은 브랴티야를 동북아문명의 발원지로 보고 있습니다. 바이칼 호수의 동쪽에 위치한 땅으로 스텝과 타이가와 툰드라를 고루 갖춘 광활한 대지입니다. 기원전 1세기 훈족이 번창하여 중국에서 항가리까지 영토를 넓혔고 퉁구스, 터어키, 몽고의 조상들도 여기라고 봅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발원지라고도 말합니다. 아메리카인디안 나바호족도 이곳에서 건너갔다고 봅니다. 이곳 박물관에서 본 에벤키의 집, 줌이 아메리카인디안 집과 모양이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장대 여럿을 시옷(ㅅ)자로 기대어 뼈대를 만들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을 덮고 여름에는 자작나무 껍질을 덮습니다. 음식 저장소는 들짐승에게 빼앗기지 않게 높은 원두막을 지어 보관하는데 우리네와 같습니다.

고대 아시아족들 중에서도 에벤키족은 숲에서 순록을 키우며 살았을 텐데 부랴트족은 스텝지역에서 양과 소를 방목하며 살아왔습니다. 타이가와 스텝에서 사는 부족의 생산력 규모는 다릅니다. 에벤키족은 아직도 소규모 부족으로 흩어져 살고 부랴트는 비록 러시아 땅으로 빼앗긴 나라가 되었지만 자치주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이웃나라 몽고는 부랴트족을 러시아에 땅을 내준 비겁쟁이라고 흉을 본답니다. 소련이 몽고를 점령할 때 부랴트족은 앞잡이 노릇을 했기에 몽고인으로서는 더 감정이 안좋은 것 같습니다. 몽고는 중국에게 내몽고를 내주고 러시아에게 바이칼 시베리아(지금 치타주, 부랴트 공화국)를 내주고 국토가 쪼그라들었으니 이래저래 속상할 겁니다. 대국의 꿈은 20세기 국가경쟁시대에 생존하기 위한 국가주의 산물입니다. 아직도 대중의 애국심을 고취하느라 국가적 영웅을 근대의 신화로 만듭니다. 칭기스칸의 영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시아 평화의 길일까요.

라마사원으로 가는 길에 '리치피터라'라고 불리는 머리산을 보았습니다. 라마교인이나 샤만이 모두 신성시하는 산입니다. 달라이 정령산이라고 부릅니다. 달라이는 대덕, 큰 지혜라는 뜻으로 이곳 종교문화는 라마교와 샤만이즘이 이렇게 섞여있었습니다.

4. 러시아불교의 본산 라마사원 '볼긴스크 다짠'

1917년 40개에 달하는 라마 사원이 폭파되었답니다. 다시 재건합니다. 스탈린은 전쟁 독려로 종교를 이용합니다. 2차세계대전중 눈이 유독 밝은 부랴트족에서 명사수를 차출해 저격수로 이용했답니다. 큰 공을 세운 전쟁영웅에게 포상을 무엇으로 줄까 물으니 라마사원을 짓게 허락해 달라고 답합니다. 그 터를 잡을 때 백마가 달려가다가 멈춘 지역을 라마사원의 새터로 잡았답니다.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몽골의 시조신화에도 나오던 이야기 같습니다. 부랴트 최대의 라마사원은 이 '볼긴스크 다짠'입니다. 러시아 불교의 총본산입니다. 부랴티아 최대의 관광지입니다.

라마교는 아시다시피 티벳불교에서 옵니다. 1256년 징기스칸의 2세때 라마불교를 허용합니다. 1286년 몽골은 티벳의 독립에 참여하면서 라마를 모셔옵니다. 라마교는 티벳에서 시작했지만 동북아시아에 넓게 퍼져있는 원초신앙 샤마니즘과 처음에는 갈등을 합니다. 몽고왕족은 받아들였지만 민중 층은 여전히 샤마니즘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다가 점점 수백년의 포교 끝에 라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데 그 결정적인 원인은 치료술입니다, 병을 더잘 고쳐주는 라마승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5. 라마사원에서 공존하는 샤만의 댕기

샤만도 병을 치료하는 의례와 의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의학을 라마교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승려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로 의술도 공부하고 연구해왔는데 우리나라의 한의학보다 앞선 동양의술이 있습니다. 그들의 의서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데 인체를 해부해 놓은 세밀한 인체해부도가 있는가 하면, 자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약재용 동물부위들 그림, 식물과 광물을 세밀화로 그려놓고 의학적 효과를 상세히 설명한 것 등 고대의 의서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반면에 우리 조선시대의 한의학에는 이런 정도로 발전된 연구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한의서는 벌거벗은 인체를 세밀하게 그리는 것 자체를 터부시 했습니다. 유교의 교조주의가 실사구시적 진리를 탐구하는 길을 가로막아 왔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라마교를 너무 몰랐습니다. 국내에 라마교에 대한 소개도 거의 없고 기껏해야 티벳 불교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소개서인데 동북아시아의 일반종교로서 라마교에 대한 연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동북아시아 인문학 이란 것도 없습니다. 어째든 여기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동아시아 라마교의 보편성입니다. 라마교를 이해하려면 샤마니즘 역시 알아야합니다.

민족문화에는 원소적 관념(Folk Ideas - 각 민족마다 나타나는 지역적 민속적 차이)과 민족적 관념(Elementary Ideas - 한 민족이나 지역을 넘어 같은 주제와 같은 이미지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샤마니즘에서 여러 부족마다 지닌 독특한 민족적 관념을 넘어선 원소적 관념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신의 이름도 다르고 의례도 다르고 풍습도 다릅니다. 그런데 라마교는 이 민족적 관념의 장벽을 넘어 초민족적인 종교이념을 동북아시아대륙에 퍼트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몽골제국은 사라져도 문화는 생물처럼 자생하며 번식해서 남았습니다. 샤마니즘적 라마교, 여기에 동북아시아적 보편성이 있다고 봅니다. 라마교는 말 그대로 큰 가르침으로 민중 속에 깊이 들어간 종교 같습니다. 몸의 고통으로부터 치유하는 방법을, 마음의 번뇌로부터 평화 찾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라마교는 동북아시아에서 탈민족적 차원으로 종족 간에 평화와 생명의 영혼을 추구한 범몽골리안 종교입니다. 물론 오랜 신정체제로 지배종교의 봉건성이 함께 공존함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6. 샤만의 나무아래 앉아 기뻐하는 라마상. 울란우데 박물관

러시아가 동진을 한 지 300여년 동안 모진 식민지 침탈에도 불구하고 부랴티야공화국에서 절반의 인구를 유지하고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기적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이 파괴된 것과 비교하면 말입니다. 오랜 식민지 속에서도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일까? 저는 그 정체성의 원천이 샤마니즘을 아우른 보편적 동아시아 연대문화를 라마교에 의해서 이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샤마니즘만으로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과학적 지혜를 갖춘 치유술,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생명과 평화의 법문들, 동아시아 대륙의 자연풍토로부터 내려온 샤마니즘의 수용이 동아시아 문화적 정체성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대륙문화에서 다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에서 라마승으로부터 배웠듯이 말입니다. 동북아에 몰아친 서방제국의 식민지 침략을 겉으로는 굴복했으면서도 속으로 다시 피어오르게 한 생명 에너지가 라마교에 있었던 것입니다. 라마의 경전 한곳을 펼쳐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미라래빠의 노래'가 들립니다.

악마의 시궁창을 피하듯 자신의 영토를 포기하는 것 기쁘고
굴레를 벗어난 준마처럼 주객을 떠난 명상 기쁘고
은밀한 곳 즐기는 들짐승처럼 거처에서 즐기는 수행자 기쁘고
푸른 하늘 독수리처럼 흔들림 없는 수행 기쁘고
하늘로 솟구치는 솔개처럼 거침없는 수행 기쁘고
양떼를 지키는 양치기처럼 밝은 빛 체험한 것 기쁘고
세계의 수미산처럼 당당하게 흔들림 없는 마음 체험하는 것 기쁘고
흐르는 강물처럼 부단히 느껴지는 명상이 기쁘고
묘지에 잠든 시체처럼 하염없는 수행이 기쁘고
대양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수행 기쁘고
나무에 떨어지는 잎처럼 되살지 않는 불생不生수행이 기쁘다.

나도 기쁨이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참 좋겠습니다. 기쁨은 그 질은 끝이 없어서 남들은 고통으로 느끼는데 기쁨이라 여길 수 있겠고 남들은 재미없는데 기쁘다고, 남들은 부족한데 만족한다고 느끼는 마음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노래하는 불심은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는 세계입니다. 우주 자연과 하나 되는 깨달음입니다.

라마교는 샤마니즘과 영혼관에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일신, 절대적인 거룩함에 의해서 '신'이 존재하느냐가 아니고 모든 세계에도 거룩함이 다 있다고 보는 우주만물의 영혼관입니다. 범신주의입니다. 자연물의 영혼에 신성이 있다고 보는 동아시아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나오는 신 개념을 절대신 개념으로 보면 오해가 생깁니다. 신선, 산신, 수신, 천신, 선녀, 귀신, 지신, 목신, 석신, 마귀, 만신, 단골 등등 모두 신·귀·인이 서로 공존하는 신관이지 완전한 신성만이 존재하는 절대신이 아닙니다.

***선녀와 산신의 고향 부랴티야**

그래서 동아시아족의 선녀는 서유럽에 나타나는 천사와 다릅니다. 모습도 달라 날개가 없습니다. 나와 김원호, 김현동은 자유시간을 내서 울란우데 시내에 있는 박물관을 어렵게 찾아 갔습니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서 부랴트족의 신관, 종교세계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북방으로부터 들어온 우리 민속문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내가 학창시절 그토록 기이하게 여기며 해서(海西)탈을 만들었었는데, 기묘하게 울툭불툭한 목중탈이 여기 북방문화와 연관이 있음도 알겠습니다. 산신할아버지나 선녀의 문화는 이곳 동북아시아 유목문화에 연원이 닿아 있음도 알겠습니다. 어릴 적 친척집에 왔을 때 어딘지 비슷해 보이는 느낌처럼 말입니다.

울란우데 시내에는 산신과 선녀의 그림이 곳곳에 보입니다. 벽화나 장식무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슴과 불로초 그림도 자주 보입니다. 우리의 민화세계와 같습니다. 조선의 민화적 세계는 고려시대 이미 성숙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중화주의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그림을 흔히 도가사상의 영향이라고 얼버무려 왔으나 틀린 말 같습니다. 샤마니즘과 북방불교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울란우데 박물관에서 찍은 산신할아버지 달마승 모습을 사진으로 올립니다.

7. 한국의 민화에 나오는 산신과 비슷한 부랴트의 산신

선녀는 서구의 천사와 다른 신관에서 나옵니다. 선녀는 일방적인 초월자 하늘의 사도가 아닙니다. 땅의 사람이 승천하기도 하고 하늘의 신이 인간이 되기도 하는 중간적인 존재입니다. 천사는 날개를 달고 인간세계를 초월한 형상을 합니다. 서양천사는 동아시아에서는 이질적인 문화입니다. 어깨에 날개가 달린 이종교배 된 천사입니다. 그러나 이곳 선녀는 옷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것으로 신성을 나타냅니다. '옷이 날개'인 셈이지만 초월성이 바람을 타면서 생기는데 옷이 그 바람결에 반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혼(浮魂)하는 샤만의 형상입니다. 선녀의 휘날리는 옷은 현실성과 초월성의 관계성을 상징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서 신성은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상징으로 표현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형상을 버리지 않고 신성을 얻는 것은 신성이 인간의 몸으로 접신하는 샤마니즘 전통에 연원이 있습니다. 신이 접신한 상태의 이미지가 선녀이며, 산신이며 신인입니다. 영혼이 어디와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원귀도 되고 하늘로 날아가는 선녀도 됩니다.

샤마니즘의 산신은 라마교에서 달라이 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양과 공부를 원하는 젊은이들을 도와주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화랑이 팔도 명산을 유람하며 전인학습을 했다는데 화랑을 가르치던 이들도 산신입니다. 수도자가 성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산신 - 선인은 동북아시아의 풍류도인입니다. 유·불·선이 당나라로부터 밀려들어 외래문화로 혼란해질 때 최치원이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불선 3도를 포함하는 도가 본래 내려오는데 이것이 풍류도라 했습니다. 이 풍류도의 근원도 이곳 바이칼 지대의 동북방 대륙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퉁구스 계열, 몽골 고리족 계열의 북방유목문화의 풍류도가 한반도까지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에벤키, 유목민 평화의 영혼**

브리야트 박물관에는 에벤키족의 샤만 의상이 있습니다. 옷에 댕기를 주렁주렁 달고 북을 치는 시늉을 하면서 서 있습니다. 영혼을 부르는 소리를 내는 것이 샤만의 북소리입니다. 사슴 가죽을 나무틀에 매서 치는 에벤키의 북소리는 영혼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중국 북방의 소수족으로 생존한 에벤키족(어원커)도 바이칼에서 아무르강 일대에서 퍼져나간 종족입니다. 에벤키가 부르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을 우실하 교수는 중국 현지인이 만든 사전에서 찾았습니다. 중국 동북방 대흥안령 지역에서 찾은 아리랑은 '(영혼을) 맞이하다', 쓰리랑은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뜻이랍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리는 알에서 왔고 알은 영혼의 순 우리말 뜻입니다. 북을 치며 맞이하고 북을 치며 깨어나는 춤을 추는 대표적인 춤과 노래가 우리네 아리랑입니다. 아리랑 쓰리랑은 동아시아족이 영혼을 부르고 깨어나는 통과의례의 노래와 춤으로 널리 퍼졌음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진도에서는 최근까지도 장례행열이 나갈 때 아리랑을 부르며 매장지로 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넓게 퍼져 있는 에벤키족은 현대적인 용어입니다. 고대의 퉁구스족과 같은 뜻입니다. 바이칼 일대에서 흥안령산맥을 타고 아무르강 일대, 우리가 거쳐 온 하바로브스크와 프리모르스키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고 만주와 극동까지 이어집니다. 인류족 중에서 소수족이면서도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서 생존하고 있는 종족이 에벤키족입니다. 어느 러시아 인류학자는 에벤키의 발원지는 아무르강 중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나온 아부르치에나 베라고르스크 아래 어디쯤 인지도 모릅니다.

시베리아 동서남북으로 넓게 퍼져나간 에벤키는 한 쪽은 툰드라지역에서 순록을 타고 다니며 살고, 한 쪽은 강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고, 한쪽은 숲에서 걸어 다니며 사냥을 하기도하고, 반농 반유목을 하며 살기도 합니다. 워낙 적응력이 뛰어난 종족이라 광역으로 퍼져나갔을 것 같습니다. 타이가와 툰드라지대를 누비지만 스텝의 초지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숲의 종족이라고 말합니다. 대부족으로 뭉친 몽고제국을 피해서 숲에서 나오지 않았고 러시아제국을 피해서 사슴 썰매를 타고 흩어져 살았습니다. 소련 일국주의를 피해서도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때로는 바이칼에서 어물을 잡아다가 보드카와 바꿔 먹으며 아직도 소수종족으로 살아가는 에벤키족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평화를 사랑했던 종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유목족입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평화의 영혼을 간직한 인류족 에벤키!"

퉁구스 계열의 동아시아 어족의 광범한 형성은 이 에벤키의 광대한 유목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부랴트도 그 조상이 에벤키라고 현지 안내자는 말합니다. 에벤키의 고대 조상은 숙신의 후예이고 읍루의 유족이며, 거란족으로 불려졌고, 여진, 말갈의 근친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 퉁구스 계열의 동류족입니다. 아리랑의 어원이 같은 것 말고도 퉁구스어에는 우리말과 비슷한 말이 많다고 합니다.

8. 에벤키의 집 줌, 아메리카 인디안의 집과 모양이 같다.

여기까지, 캄캄한 밤길을 가듯이 시베리아문화를 겁 없이 더듬으며 왔습니다. 부랴트 공화국 수도 울란우데의 낡은 호텔에서 잠을 청하려니 오늘 낮에 본 에벤키 샤만의 북이 귓가에 둥둥둥 북소리를 내는 듯 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겨레문화의 뿌리가 북방 유목민족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는 예감이 사실로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유라시아 대장정으로 얻은 나대로의 소득을 중간 결산해보았습니다. 솟대와 장승, 신목에 쌓인 돌무덤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단 샤만의 댕기들, 아리랑, 선녀와 산신, 샤만 굿, 죽은 자의 영혼을 실어나르는 순록, 에벤키의 발원지 아무르강, 퉁구스어 등은 동아시아문명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통상징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부랴티야에는 선녀에 관한 신화와 성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신성의 뿌리는 창조신 모계신화입니다. 이곳 문화의 밑바탕을 이룹니다. 모든 대지의 근원적인 생명의 영혼들. 불, 물, 바람, 돌, 새, 순록, 말, 양, 나무, 꽃의 영혼을 탄생하시는 모신이 이곳에도 있습니다. 우리 신화에서와 같이 마고와 삼신할망, 바리데기, 금강산 선녀가 그러하듯이 여기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동북아문화의 원형(Archetype)지입니다.

9. 탄생과 풍요의 신화가 깃든 여신-브랴트민속촌

10.부랴트의 장승들-부랴트민속촌

지나온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원혼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청과 러시아, 소련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부랴트민족이 펼친 종족 생존사를 우리는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코자크 기병대가 1631년에 이 영토에 최초의 요새를 세우면서부터 시작한 30년 넘는 저항사가 있었습니다. 1918년에는 러시아내전이 발발하자 4년 동안 주권을 가지고 6개의 군벌과 14개의 상이한 정부가 투쟁을 벌입니다. 사회주의 소련으로 흡수되면서는 스탈린의 무자비한 소수민족 말살 정책으로 1천명 이상이 처형되고 1만9천명 가량 추방과 투옥을 당하며 2만명 이상 재산이 몰수됩니다.

라마교는'사회주의 건설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며 라마승을 처형, 유배시킵니다. 1937년~38년 사이만해도 어림잡아 6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감옥에 갇혔으며, 1,000명이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사원은 공장이나 창고로 쓰였으며 경전과 유물은 불태워 졌습니다. 1926년부터 1939년 사이 인구는 23만7,500명에서 22만4,700명으로 감소했습니다. 부랴티야의 가축수는 1/2 이하로 감소했답니다. (이상의 자료는 안나 레이드 저 〈샤만의 코트〉 참조-미다스북스 발간)

평온해 보이는 대지에 피투성이 역사가 있었습니다. 치타와 울란우데를 떠나면서 나는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곳에서 300여년간 펼쳐졌던 역사는 과연 문명의 역사인가? 러시아 제국이 서방문명이란 이름을 앞세우고 진출한 선교와 생활양식 개조, 소련이 스탈린 사회주의 식으로 인간을 개조한 지금 이 땅에는 무엇을 남겼는지 다시 생각합니다. 한겨울에도 빵 하나를 사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이곳 인민들의 참을성은 침략사에서 숨죽여 온 인민의 생존양식임을 알겠습니다.

민족의 자주와 자립, 그리고 다민족 다문화가 공생하는 새로운 문명사회는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다시 쓰여질지도 모릅니다. 이미 투바공화국과 부랴티아 공화국에는 동아시아족들이 인구비례 절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샤만과 라마교 문화도 빠르게 양성화하고 있습니다. 대도시에 샤만의 집이 들어서고 라마사원이 재건축됩니다. 종족마다 자치·자존의 몸부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동아시아족의 원형문화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조상의 흔적으로 자존 높은 샤만의 문화라면, 그들은 이 원형문화를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동토에 땅 속 깊이 묻어둔 샤만의 영혼입니다. 시베리아에도 여름은 있어서 부랴트 가슴에는 다시 샤만의 댕기가 펄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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